미국 신학과 한국 교회
한국교회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양 떠받들고 있는 중요한 신앙적 기준들이 실제로는 성경과는 별 상관없는 매우 세속적인 것들임을 확인해 볼 것
근래에 들어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여러 분야에서(특히 정치적인 분야에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말들이 많습니다. 과거 미국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어있다시피한 한국사회가 이로부터 벗어나 동등한 관계에서 양국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고 하지요. 이는 교회와 신학이라는 종교적 주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전쟁이후 60년 가까운 시절동안 한국교회는 정말 미국교회의 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결코 미국의 신학이 그 해답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대와 교회들이 여전히 붙잡고 있는 현대 미국식 신학과 교회관을 반드시 개혁해 내야 할 것입니다.
시크릿(Secret)이라는 책을 읽지는 않으셨어도 아마 한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꽤 큰 반향을 일으켰던 책이지만 미국에서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이라는 말을 쓸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던 책입니다. 론다 번의 최초의 저서가 발행된 후 이와 관련된 저서가 수십 권이 넘게 발행될 정도로 이 책은 미국사회에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시크릿 관연 번역서들이 십여권이 벌써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의 주제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힘을 믿어라]라는 것이지요. 온 우주의 힘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믿음(기원)의 기운이기 때문에 이것을 진정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면 반드시 그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응?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입니다. 가까이서는 여의도에 있는 매우 큰 대형교회 담임목사님 (아, 이젠 원로목사이긴 하군요. 매독으로 유명하기도 하고..)께서 심심하면 이야기하는 [4차원의 영성] 가운데 등장하는 말입니다. [믿는대로 이루어지고 말대로 성취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골자죠. 좀 멀리서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인 레이크 우드교회의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 이 책 역시 최근 기독교 관련 도서 가운데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입니다] 역시 이와 동일한 내용입니다. [말의 힘은 능력이 있으니 무슨 말을 하든지 긍정적으로 하고 내가 잘 될 것을 믿어라] 라는 것이 오스틴 목사의 주장의 골자입니다. 둘 다 [시크릿]의 내용과 거의 차이가 없는 말입니다.
제가 왜 [시크릿]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이 책이 오늘날 미국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기독교적 사상의 바탕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오늘날까지 미국 대통령 취임식때 대통령이 성경에 대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세계사를 언급하지 않다도 미국을 세운 사람들의 종교적 바탕이 청교도라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청교도(퓨리탄)는 개혁교회의 신학적 갈래 가운데에서도 매우 보수적이고 근본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교파입니다. 따라서 미국의 신앙적 바탕 역시 이러한 부분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의 청교도주의와 미국의 청교도주의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유럽의 청교도 주의는 다른 유럽의 신학들이 그렇듯 사상적, 철학적 방면으로 자리를 잡아간 반면(영국쪽은 조금 예외입니다만) 미국의 청교도주의는 현실적 실용주의 종교사상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미국이라는 신대륙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미국인들 입장에서 종교는 단순한 철학적, 사상적 기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미국인들에게 종교는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닌 직접적 삶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신적 권위와 정당성을 차츰 부여해 나갑니다. 점점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미국의 뜻=하나님의 뜻]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렇게 거대화되고 권력화된 종교의 힘은 미국 정치인들에게 매우 사용하기 좋은 도구가 되었으며 결국 미국사회에 있어서 신앙은 정치적인 힘과 직결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최근까지만 해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보수적 기독교 백인들의 표를 반드시 얻어야만 했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의 교회는 단순한 종교적 체제를 넘어 정치적인 힘으로 부각되었고 미국교회의 신학 역시 이러한 영향아래 패권주의적, 세속주의적 신학과 신앙관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럽의 청교도주의와 미국의 청교도주의가 달라지게 된 이유라고 저는 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이클 호튼 교수의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Made in America): 나침반 역간]를 추천해 드립니다. 중요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패권주의와 세속주의는 미국 기독교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입니다. 미국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고 있는(혹은 믿게끔 세뇌하는) 미국의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은 앞으로도 이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교회의 패권주의와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이슈인 세속주의는 좀 더 다른 방향에서 발전해왔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소위 말하는 베이비 부머 시대(1946-1964년 사이에 미국에서 태어난 세대를 지칭함)의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된 20세기 후반은 미국사회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이비 부머 시대 이전의 미국세대들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신앙관이 매우 확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대 사람들은 이런 관념화되고 체계화된 미국교회를 거부하고 싫증을 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매우 지루하고 고루한 것으로 취급하여 교회에 매이기를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잡기 위해서 미국교회에서 생겨난 것이 소위 구도자예배(Seeker's Service Worship)입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교회예배와는 달리 기독교를 잘 모르거나 관습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좀 더 현대화되고 부담감 없는 내용들을 가지고 구도자 (여기서는 비신자나 초신자들을 뜻합니다)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교회는 전자악기를 비롯한 밴드음악, 화려한 조명과 영상, 재미있는 설교와 공연등이 추가된 예배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윌로우 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가 메가처치로 성장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1990년대부터 한국교회에도 도입이 되어 한국교회에서는 [열린예배]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대형교회의 거의 대부분은 이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세부적인 내용은 다릅니다만 기본적 시스템과 사상은 거의 동일합니다.
미국교회의 세속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최근들어, 베이비 부머 시대와 그 이후의 세대들은 이런 종합예능과 같은 시끄럽고 현대화된 미국의 교회 시스템에 염증을 또 느끼고 있습니다. 이들은 쇼핑센터처럼 변해버린 교회에 대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종교적인 체험과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매우 중요한 현대 사상의 사조를 언급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이것을 다 언급할 필요는 없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특징 가운데 하나인 주관주의에 관련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관주의는 자신이 납득하고 자신이 체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에서의 절대적 기준의 제시에 대한 반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바로 종교적 체험과 경험이고 이것이 미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미국사회에서는 점차 신비주의에 입각한 종교적 체험 및 우주적 힘에 대한 관심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시크릿]과 [긍정의 힘]은 오늘날 미국사회에 나타난 이러한 요구들에 대한 사회적, 종교적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공통된 내용과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시크릿]에서는 [우주적 힘]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긍정의 힘]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 뿐이고 시크릿에서는 [강렬한 염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긍정의 힘]에서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 뿐입니다. 그 외에는 거의 내용은 동일합니다.
이 우주적 힘(혹은 믿음)이 오늘날 미국교회에서 추구하고 있는 신앙적 흐름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염원과 소원을 이루기 위함이고 더 잘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바탕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 정점에 있는 곳이 바로 레이크 우드 교회고 이 [새로운 신앙]의 전도자가 조엘 오스틴 목사입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슬프게도 한국교회에 고스란히 들어와 있고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조금 규모가 있다하는 교회치고 이 긍정의 힘을 말하지 않는 교회는 사실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미국인들의 기독교적 흐름의 변화로 최근 나타난 것이 바로 이머징교회(Emerging Church)입니다. 이 이머징교회는 과거의 화려하고 문화에 민감한 구도자 예배에서 주지 못한 종교적 체험과 신비한 영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교회입니다.
흡사 미국인들이 불교의 명상적 분위기와 수행에 매력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머징 교회에서는 과거의 수도원적 영성을 중심으로 각각의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목표로 이에 도움이 되는 명상적 분위기, 데코레이션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이머징 교회를 가보면 화려한 조명과 깔끔한 인테리어가 아닌 어두운 조명과 명상적 환경으로 구성됩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의 주제와 직접적 관련은 없습니다만 말씀드리는 것은 과거 구도자 예배가 그렇듯 이 예배와 흐름 역시 반드시 한국으로 수입(?)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향후 10년 이내로 이러한 스타일의 예배가 한국의 예배흐름을 주도하는 최신의 유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명상적, 신비적 신앙은 한국사회의 무속적 기반과 맞물려 분명 더욱 심각한 방향으로 변질될 것이 자명합니다.
지금까지 현대미국교회의 신앙적 흐름과 형태에 대해 길게 언급한 것은 벌써 눈치 채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한국교회가 정통 혹은 올바른 것이라고 따르고 있고 신봉하고 있는 것은 성경본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미국교회의 모습과 신앙관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미국교회 내에서도 이러한 부분에 대한 맹렬한 비판과 지적이 있긴 합니다만 불행히도 매스미디어를 지배한 미국주류교회에는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이에 대해서는 행크 헤네그래프 교수의 [바벨탑에 갇힌 복음(Christanity In Crisis): 새물플러스 역간]과 마이클 호튼 교수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nty): 부흥과 개혁사 역간]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와 같은 현대미국교회의 신학적, 신앙적 흐름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의 메인스트림이 되었습니다. 대다수 목회자와 성도들은 이러한 것에 대한 성경적 비판과 해석 없이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처럼 떠받들고 있습니다. 위대하신 미국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한국교회다보니 그들의 신학과 사상은 고스란히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이에 대해 비판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졸지에 마귀사탄이 되는 것이 다반사지요.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왠만한 대형교회, 그리고 그런 교회를 꿈꾸고 있는 중형교회들 치고 설교시간에 이런 이야기 하지 않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이 얼마나 교회 내에서 어처구니없게 사용되고 있습니까? [시크릿]에 보면 이렇게 간절히 바라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그 일은 100%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고객(?)들 가운데 클레임이 발생합니다. 왜 하라고 했는데 안되냐고 말입니다. 그럼 그 사람들은 태연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요]
믿음이 부족하다니! 이거 정말 교회 현장에서 수도 없이 듣는 말입니다. 믿음대로 이루어지고 바친대로 복받는다고 그렇게 설교하다가 왜 그렇게 했는데도 나는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맨날 이모양이냐고 말하는 성도들에게 목사들 혹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말하는 답과 똑같지 않습니까? [당신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요,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의심하지 말고 더 많은 것을 바치세요]
레이크 우드교회의 조엘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 [잘되는 나]는 현재 미국교회의 단적인 표상입니다. 미국교회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냐는 실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뒷전이고 [믿음]이 중요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한국교회의 지향점이자 궁극적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누구든지 잘 되고 복받는 것을 싫어하거나 거부할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세속의 종교시스템이 그러한 인간의 근본적 욕구를 자극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종교시스템에 심취하게 하려는 것 자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속주의와 현실기복주의가 교회의 참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 역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믿고 복받기 위해 혹은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피해갈 수 있는 보험적 성격으로의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멀리하라고 경계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야웨신앙을 이용해서 유대인들에게 맹목적 신앙과 복종을 강요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이요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질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천국에 못가면서 남들까지 못가게 막고 있는 자들]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지금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이익과 유익을 위해서 성도들의 눈과 귀를 막고 맹목적인 헌신과 복종을 강요하며 그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가르치는 모습이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모습입니까? 전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단순히 미국교회의 그늘을 벗어난다고 해서 모두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세속주의와 기복주의는 비단 미국의 모습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선 시급하게 개혁할 문제는 이런 미국식 신앙과 교회관이 설교단상에서 가르쳐지고 또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이 교계의 베스트 셀러 자리의 상위권을 죄다 차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부터 먼저 교회와 성도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때문에 신앙을 갖고 있는지 왜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는지에 대한 답변을 성경 속에서 스스로 찾아내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런 미국식의 신학과 신앙에 휘둘리게 되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학관에 있어 주요한 사상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의 신학]이요 하나는 [고난의 신학]입니다. 이 두가지는 둘 다 중요합니다. 또한 이것은 둘 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을 향한 중보와 희생, 섬김과 포기라는 인생의 본능과 반대되는 길을 가야 하는 [고난]의 길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약속된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고난]은 사라져 버리고 [영광]만이 남았습니다. 이는 60년 가까이 종속되어온 미국교회의 신학과 사상이 고스란히 이 땅의 교회들에게 옮겨진 결과입니다. 이제 이를 비판할 사람도, 이를 극복할 사람도 많지 않은 실상이 바로 오늘의 한국교회입니다. 더 늦기 전에 이것을 개혁해 내야 다음 세대에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문제와 현실에 대한 답을 미국교회가 아닌 한국교회가 스스로 찾아내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신앙은 절대 사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자신이 속한 곳에 대한 현존하는 문제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시대에 따라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현실화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신앙과 교회는 존재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성경 가운데 아모스는 [정의와 공의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와 늘 짝을 이루어 언급되는 이 아모스 선지자는 당시 주전 8세기경의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던 선지자입니다.
이 아모스서의 앞부분을 보면 열방심판에 대한 신탁(예언)에서 주변의 근동지방의 국가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그들은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과 유다를 지목하면서 앞에서 언급한 국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죄악의 목록들을 열거하며 그들에게 더욱 가혹한 심판과 징계를 예고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정신은 깡그리 상실하고 폭정과 억압, 착취와 약탈, 불의와 탐욕으로 사람들을 짓눌렀기 때문이라고 아모스서는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돌이켜 공의와 정의를 다시 물같이 흘려 보내지 않는다면 이스라엘과 유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물론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고 그들은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이 아모스서의 내용을 오늘 우리 한국교회들이 무겁고 진지하게 듣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모스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광야에서 부르짖는 사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믿음대로 빌기만 하면 뭐든지 들어줄 것 같은 산타클로스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섭리와 질서를 파괴하고 공의와 정의, 진실과 긍휼을 상실한 소위 선민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준비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교회는 이렇게까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엄격한 실천을 요구하시는 성경 속의 하나님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도둑질하고 착취한 돈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바친들 말라기서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런 돈따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오늘날 미국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번영신학은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을 하나님의 뜻처럼 신봉하고 있는 한국교회 역시 결코 건강하고 정상적인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미국을 선택할 것인지 성경을 선택할 것인지는 이제 한국교회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한국교회가 아모스서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귀담아 듣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산적해 있는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들과 어려움들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이것을 그리스도인들이 각성하여 성도들 각각의 개인의 물질적 성취와 이익에만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에 대해서 성경의 정신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