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잘하는 방법 .. [3]
[7] 남의 설교를 복사하지 말라
설교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일 받아먹었던 만나로 비유된다. 그때의 만나는 어제의 것을 오늘 다시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만나는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날들 동안 그날 받아 그날 먹어야 했던 가장 신선한 양식이었다. 생각하면 오늘의 설교도 언제나 신선한 만나와 같은 양식으로 회중의 심령에 넣어주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한 주간 내내 말씀의 전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몸부림을 치면서 메시지를받고, 그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에 자신의 시간을 아낌없이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말씀에 먼저 용해되는 감격을 경험하고 난 후에 회중 앞에 서서 그 감격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하나의 이변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설교집이 당연한 경쟁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점이다. 그 목적이 뚜렷하지 않다. “나는 이렇게 설교를 했다”는 자랑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설교를 기록하여 교인들에게 다시 읽도록 하는 목적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의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수반하는 경우를 본다.
하나는 동역자된 설교자들이 그 설교문을 그대로 복사하여 강단에 들고 나서는 부끄러운 죄를 유발하는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펴낸 설교를 교인들이 읽고 난 후 어느 때인가 “목사님은 지난번 했던 설교들을 다시재탕하십니다.”하면서 새로운 실망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필자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사건에 더욱 깊은 두려움을 가져 본다. 자신이 먹이고 이끄는 양들을 위하여서 목자는 더 좋은 꼴을 찾아 헤매는 수고를 해야 함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땀흘림이 없이 다른 목자가 이미 먹여버린 것을 가져다가 자신의 것인 양 내 양들을 먹여도 되는 것인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행위가 습관화되는 날 찾아오는 결과는 참으로 비참한 것들이다. 그것은 자신의 설교 능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그 회복이 너무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회중이 다른 곳에서 듣거나 동일한 설교집을 읽은 경우 조금의 동정도 없이 경멸의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게 된다는 사실에 깊이 유의해야 한다.
현대를 사는 설교자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교회마다 그들의 환경과 수준과 신앙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만을 위하여 필요한 양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결코 남의 설교를 복사하여 그대로 먹일 수 없는 자신들의 양들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삯꾼이 된 목자는 그 이마에서 땀 흘리기를 거부하고 쉽고 편한 곁길을 즐겨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참 목자는 눈물과 땀을, 때로는 피까지 흘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양들의 먹이를 찾아 먹인다.
홍수처럼 쏟아진 설교집이 오늘의 설교 사역에 에덴동산의 과일처럼 설교자들에게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되고 있다. 특별히 자신이 설교하려는 본문과 주제를 결정한 후에 설교자의 손이 서서히 남의 설교집을 만지고 그눈길이 거기에 머물려는 유혹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참된 설교자는 거기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면서 야곱처럼 자신의 환도뼈가 상하더라도 하나님을붙들고 내 양들이 살찔 수 있는 양식을 달라고 매달리면서 펜을 잡고 자신의 설교 원고에 받아쓰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본회퍼가 조국에 돌아가 히틀러의 칼날을 피하여 지하의 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서 열강을 토하면서 남긴 말이 새삼스럽게 한국의 설교자들을 향하고 있다.
“설교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 ……말씀으로서 회중 가운데를 걷고 있는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
그렇다. 자신의 간절하고 진지한 기도와 땀흘린 준비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나에게 맡겨진 회중에게 오셔서 그 가운데 걷도록 해드리는 것이 오늘 한국 강단의 지키는 설교자의 진정한 사명이다.
[8] 설교자의 삶이 일치하는가
필자는 한국교회의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여 연구 조사한 바 있는 “설교 사역자에 대한 평신도의 의식구조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바 있다.
“귀하가 아는 설교자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들의 설교와 삶의 연관성이 어떠하다고 보십니까?” 여기에 대한 응답자의 80.2%가 “완전치는 못하지만 설교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응답을 하였고, 10.3%는 “설교자는 설교하는 대로 생활한다.” 라고 대답한 바 있다.
이러한 응답의 비율은 서구교회에 비교하여 월등하게 높은 비율로, 이 땅이 유교 문화의 영향권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온 결과, 도덕성 강조와 선비와 비견되는 그들의 고결한 인격에 대한 높은 기대가 그대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문제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장 고결한 성직인 목사로서 자신이 전달한 메시지를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설교자 자신들의 대답이다. 이에 대한 솔직한 대답은 최근에 들어 대단히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사회에서 실종의 위기에 직면한 윤리와 도덕성이 설교 사역자들의 삶과 인격에 의하여 살아나지 못한 채 오히려 심각한 탈선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성전에서의 살인 사건, 밀수에 가담한 목사들의 이름, 수표의 위조, 그리고 외화 낭비의 선두 주자로서의 목사의 생활, 외국 신학교의 분교를 설치하고 박사 학위를 남발하는 주범들로 신문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현상은 오늘의 설교 사역을 가장 멍들게 하는 치욕적인 보도들이다. 신부처럼 제복을 입고 설교자임을 외형적으로 표시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는 한 설교자가 범할 수 있는 탈선의 유혹은 앞으로 더욱 심화되리라 본다.
설교자가 이 땅에서 풍겨오던 고유한 상은 남다른 것이었다. 일상생활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헌신적이고 검소한 생활의 주인이며, 풍기는 인격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결한 품성과 지식을 소유한 것이 한국의 설교자상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서 목사는 물질의 풍요를 앞서서 누리는 상류사회의 생활인들로 변화되고, 때로는 극소수의 설교자들에 의하여 자신이 외친 메시지가 자신의 삶과 인격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드러내어 이 땅의 설교 사역을 어둡게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생활하는 집과 말씀의 집’을 따로 지을 때 설교 사역에 찾아 드는 비극적인 결과는 엄청날 것이라는 데 유의해야 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뜻’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설교는 기본적으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설교자 개인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없다. 설교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는 무대가 될 수 없고,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회중을 선동하여 자신을 옹호하는 개인적인 집단으로 만드는 시도를 할 수 없다.
그런데 현대의 소수의 설교자들에 의하여 설교의 본래적인 성격이 퇴색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지식과 연구의 결핍을 회중이 보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신비주의를 도입하는 사례를 본다. 방언과 예언의 신비한 현상을 유도하여 그것이 말씀 위에 군림하도록 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것만 아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직접적인 지적을 하면서 때로는 위협을 한다.
순종이라는 미명 아래 설교자를 맹종하도록 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절대화하고 비판자를 향한 저주를 예사롭게 행하는 모습을 본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헌금을 강조하며 수집하는 무대로 설교를 활용한다. 이럴 때는 마치 설교자가 하나님의 둔갑한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이러한 비참한 모습을 가리켜 설교가 ‘목회자의 뜻’을 펼치는 수단의 도구가 되었다고 한다.
한때 목회자들의 사회에서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오고갔었다. 부흥집회를 위하여 강사를 모실 때 헌금을 많이 하게 하는 강사를 초빙하면서 수입을 어떻게 분배한다는 약속을 했던 시절도 있었다. 생각하면 얼마나 한국교회의 강단이 철저하게 탈선했었는지를 잘 말해주는 사례이다. 이처럼 설교가 목회 수단으로 이용되는 효과적인 이기(利器)로 전락한다면 거기에는 밝은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어둡고 침울한 장래만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설교는 “은혜의 효율적인 방편으로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지 결코 인간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하거나 설교자의 정신적 피곤을 풀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의식을 갖춘 설교자는 어떤 경우도 설교를 목회의 방편으로 전락시킬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설교자 진행되는 순간에는 설교 자체가 설교자의 권위나 목회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없다.
비록 설교자의 입을 통한 설교지만 그 주인은 절대로 설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에 설교학계에 새로운 감각을 일깨웠던 데이비드 버트릭(David Buttrick)은 개혁자들의 설교 신학을 그대로 이어받아 그의 ‘설교학’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우리의 설교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교회에 말씀을 계속하신다. 이는 그 말씀이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들려지기 위함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설교는 은혜의 방편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내가 말하되 내가 주인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실 뿐이다.”
[9] 과신(過信)에 빠져있는 설교
인간이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은 일의 진전에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일정한 일을 수년을 넘게 계속하면 스스로 진전시킬 수 있는 요령과 기술이 터득되면서 전문인의 세계에 들어선다. 그럴 때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한다.
설교 사역 역시 이상과 이론을 도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어느 설교자나 자신의 강단에 설 때 자신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고 유창한 설교를 펼쳐나간다. 그 몸가짐에서, 그리고 쏟아져 나오는 달변에서 회중은 설교자의 전문성과 그 성스러운 직책에 대해 인정을 한다. 그리고 ‘아멘’을 연발하면서 그 설교에 심취되는 경우를 본다. 이런 현상 앞에서 어떤 설교자도 자신의 부족에 대한 인정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설교자 자신의 설교를 비디오에 담아 설교자 자신이 보도록 할 때마다 거의 모든 설교자가 반응하는 다음의 말은 우리가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저게 나의 설교인가요? 저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던가요? 실망인데요.”
이 반응의 응답은 바로 자신의 설교가 자신이 생각했던 수준에 미달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 필자가 20년이 넘도록 경험해 온 설교학 교실에서의 실태는 아무도 자신의 설교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우월하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환언하면, 거의 모든 설교자가 착각이 불러온 과신의 늪에 빠져서 설교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의 향상을 위한 겸허한 노력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모른 채 이어지는 설교를 메우면서 달리고 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자신감이 형성되게 되는 드높은 권위의 의자에 앉아 교주와 같은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슬픈 그림을 그린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성공적인 설교자라고 자부하게 되는 교만의 자리에 앉게 한다.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은혜의 파장이 일어나는 것을 본 설교자가 그 순간 그러한 도구로 쓰임 받음에 행복감을 조심스럽게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만족이나 자만의 감정이나 자세는 금물이다. 많은 설교학자들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 자만심을 가질 때 사단의 손에 이끌리기 시작하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설교자의 착각은 막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 착각이 거듭되었을 때 설교자는 실로 엄청난 속도로 퇴화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시대의 변화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오늘 나의 설교의 형태와 전달의 기술이 탁월했더라도 어느새 구물(舊物)이 되어 버리는 시대에 오늘의 설교자는 살고 있다. 언제나 설교학의 새로운 이론들을 알아보고 변화에 적응하는 설교자만이 달리는 시대의 설교 무대에 설 수 있다.
이제 미래의 설교자들은 완벽한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있으나 완벽한 설교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자신이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완벽할 수 없다. 만에 하나 그러한 느낌을 갖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과신(過信)이 착각을 가져온 순간이다. 그리고 그 느낌은 내리막길을 걸어가는 실패의 발길이 자신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기미가 보이는 조짐이다.
솔직히 한국교회의 강단에는 자신의 설교가 최상의 단계에 이른 것 마냥 믿고 더 이상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는 착각에 빠진 과신의 주인공들이 너무 많다. 이 때마다 한국교회 설교 사역의 미래가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설교의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는 설교자에게는 성령님의 도움이 떠나고 다음의 말씀만 그 귀에 들려질 뿐이다.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같이 보금자리를 높이 지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