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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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가 왜 뉴에이져인가 ... [2]

2010-02-02 2181
이수삼 목사

종교는 평등합니다.


See(보는가)? 전술한 대로 조용기는 재삼 종교가 평등하다고 강조하는데 그의 내심은 다르다. 그 다음 주일 자신의 교회서 변명한 것을 보면 가히 거짓말에 가깝다.

"(기독교에서는)..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말을 기독교외 예수님, 하나님 외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생각해도 되겠는가?" 란 참석자(불자)의 질문에 대하여 조용기 왈 "불교는 불교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히려 불자가 바른 복음을 인용하고 있는 역설적 순간을 대한다. 그러나 조용기는 이 칼날 같은 기습(?)에 대하여 사뭇 비겁한 답변을 한다. 평등하고 공평하니 사이좋게 갈라 먹자는 뜻? 기독교 메시지의 유일절대 생명성을 완전 초탈한 듯 보인다. 그 (메시지의) 한계를 불교도 뛰어 넘을 수 없고 기독교를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차별성을 인정을 하고 대화를 하자는 것입니다. 즉 (역설적으로) 기독교 진리의 유일절대성이라도 희생시키고 타협하자는 것. 그런데 '차별성' 보다는 '차이'라고 해야 어법에 맞다.

그리고 우리가 불교가 주장하는 것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권한이 없어요.

See? 그는 (우상종교에 불과한) 불교를 결코 비판적/비평적 태도로 보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가 보는 불교는 절대 비판불가한 불교(不敎)다. 그러나 사도 파울은 이천년전 그리스 아테네의 우상종교를 보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조용기의 영어명이 Paul이다. 파울의 이름을 여지없이 짓밟고 더럽히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뿐인가..

불교는 불교대로 존중을 하고, 인정을 하고, 기독교는 기독교대로의 구원의 방식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종교라는 평등한 공통분모에서 차별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 가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집안에서도 우리 집안 식구들 중에도 아직도 불교를 믿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서로 차별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용기는 기독교를 불교와 같은 '공통분모' 선상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 없이 대하자는 주의이므로 불교에 대해 아무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뒷전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불교신자들에게 전도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말이 된다. (조용기가 어떻게 신자들 앞에 '해명'을 하든 간에) 논리적으로는, 세상 앞에서는 불교를 기독교와 거의 동등한 진리로 생각한다는 뜻이 돼 버린다. 안 그런가?

우리 동생은 불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확신을 믿기 때문에 존중하고 인정하고, 나는 기독교 목사니까 기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을 인정하고 내 것만 절대 진리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너는 죽이고 나는 살겠다-그렇게 되면 상생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것은 부처님도 예수님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비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잘 보라! 조용기는 기독교의 절대진리성을 정면 부인하고 있다. 불교도인 동생한테 전도할 아무 의무도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는 게 조용기의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 종교적인 위치에서 볼 때 마음은 우리의 뇌 실체 속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뇌라는 것은 마음이 사용하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이 특강에서) 그가 말하는 '마음'은 영/혼 사이에 구분이 없는 마음이다. 그가 교계에서 평소 가르치는 말과는 사뭇 다르다. 마음은 뇌 실체 속에 있다. 뇌는 마음이 사용하는 도구다. 이 진술의 논리적인 모순과 엉성함을 보는가?

저는 목회를 하면서 신비체험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는데, 우리 교회 부목사로 계셨던 김상호 목사님이 심장마비가 걸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사망 진단을 받았습니다. 삼일장을 지냈는데, 관 속에 집에 넣으려고 의식을 하는데 살아났습니다. 완전히 죽어서 우리가 염을 하고 그랬는데, 3일 만에 살아나서 영계를 체험한 것을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몸과 마음이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얼핏 그럴싸 해 뵈지만 위 끝말은 불자들이 듣기 좋으라고 한, 속 들여다 뵈는 말이다. 몸과 마음이 '완전분리'된 게 아니라 조용기의 몸과 마음(정신/혼/심리)은 서로 자주 야합한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통해 영과 혼이 서로 쪼개질 수 있다는 건 방언 하나로 충분히 입증된다. 그러나 그는 평소 가르치던 것을 여기선 입장과 체면상 생략한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적인 종교생활을 할 때를 보면 깊이 명상을 할 때나 두뇌를 의지하지 않고 그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무한한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명상을 통해 그런 신비체험을 가끔 하곤 하는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 4차원의 세계, 영원한 세계... 그런 세계에 들어가서 무한한 평안을 느끼곤 합니다. 이러한 체험은 두뇌의 조직 속에서는 도저히 만들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나의 실체가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내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윗 부분이 조용기를 관상영성가 내지 뉴에이저로 믿게 하는 단서가 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모든 것에 하나님의 신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를 동시에 섭렵한 것이 도움이 된 것처럼 계유불성이란 것은 벌레 한 마리도 부처의 심정으로 성경은 하나님은 만물 안에 계시며 만물을 초월한다고 했습니다. 만물 안에 계시면 풀 속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벌레 한 마리에도 신성이 계시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연훼손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조용기의 뉴에이지/범신론 사상은 점입가경이다. 그는 풀 속에도 벌레 한 마리에도 "신성이 계시기에"(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절대 자연훼손을 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조용기=범신론자] 등식을 자증하는 고백이다.

조용기는 살아 오면서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를 밟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을지 모를 (또는 적당히 밟아 자주 살생했을지 모를?) 알뜰한 불교도(?)이면서 동시에 긍정철학적 기독교인으로 살아 왔다는 말이 된다.

굳이 김삼을 탓할 필요 없이.. 조용기는 자기 말로 스스로 뉴에이저임을 자증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순(수)복음을 통한 천국 길은 멀고도 먼 길이다.


- 끝 -

source : 1300000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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