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신화와 전설, 역사가 함께 담겨있다
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01월 13일
지난 주일편지 ‘나는 의심하는 신앙인이 좋다’에 대한 답글을 여러 경로로 받아보았습니다. 제 의견에 반대하시는 분도 동의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중에는 성경의 어느 부분들이 신화이며 어느 부분들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 좀 더 자세히 제시해주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성경의 기록 가운데 신화와 전설, 그리고 실제 역사를 자세히 구분하고 나누어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설화, 즉 신화나 전설 가운데는 역사와 무관하게 어떤 의미 전달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도 있지만, 역사적 사건을 기초로 발전된 이야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신화나 전설이라 하더라도 역사와 얽혀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보고 싶습니다.
1. 이스라엘 민족과 숫자철학
어떤 주장이나 기록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려면 다른 문헌이나 고고학 자료에 의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다윗과 솔로몬이 통치한 서기전 10세기까지는 문헌 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시대이기에 고고학에 의해 증명되지 않는 한 역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울과 다윗, 솔로몬 시대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례로 출애굽은 기록 그대로 역사적 사건일 수는 없습니다. 우선 3000여 년 전에 60만이라는 방대한 인구가 집단으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 동안 시나이 광야에서 생활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그런 규모의 인구 이동이라면 곳곳에 고고학적 자료를 남길 수밖에 없는데 그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요셉이 총리로 재직했던 이집트를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셈족인 힉소스 왕조가 통치했다거나 히브루라 불리는 부랑족속이 가나안땅에서 활동한 흔적이 있다는 주장들이 있지만 그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성경이 묘사하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증거 자료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여 학자들은 출애굽에 대한 기록을 ‘출애굽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고 ‘출애굽 설화’라고 말합니다. 출애굽 기록을 사건이 아니라 설화라고 보아야 하는 중요한 근거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의 생애는 이집트 궁전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40년, 이렇게 40년 단위의 3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0년 단위의 3곱. 이 구분은 통일왕국시대를 이루는 사울의 통치기간 40년, 다윗 40년, 솔로몬의 40년과도 일치합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극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유대인들은 숫자철학에 능통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숫자는 그냥 숫자가 아니라 중요한 의미를 담은 항아리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3은 하나님의 수고 4는 사람의 수입니다. 3과 4를 합한 7은 완전을 의미하는 수로 역시 하나님의 수입니다. 6은 7에 접근해가려는 교만하고 건방진 수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사탄을 상징하는 수이며, 계시록에는 666이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유대인의 숫자철학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제임스 칼라스가 지은 <요한계시록>을 참고해 주십시오.)
유대인들은 강조할 때 10을 곱했습니다. 사람 수인 4에 10을 곱한 40은, 사람이 어떤 중요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 충분한 기간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세는 40년 단위로 극적인 삶을 세 번 살아 12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은 모두 40년씩 통치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와 초기 왕들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120년을 이어간 통일왕국은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기록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120세를 사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과학과 의학이 최고조로 발달한 요즘 시대에도 지구마을 전체에서 120세를 넘게 사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아브라함부터 솔로몬에 이르는 시대, 즉 서기전 20~10세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성경 말씀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설화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앞의 편지에서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 이전의 기록은 신화의 영역으로 구분됩니다.) 그래도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고 믿으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2. 성경에 나타난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
성경의 모든 기록이 역사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존재, 이후의 포로생활, 페르시아에 의한 해방 등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실제 역사라고 믿어왔던 구약시대의 ‘역사적 기록’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경, 특히 구약성경에는 세 가지 기록 양식이 있습니다.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입니다. 신화와 전설을 묶어서 설화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 기록 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진실을 아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 편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신화는 옛날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삶에 대해, 또는 그 기원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실제 사건을 기초로 기록된 역사와 구분되며, 역사는 ‘사실’에 집중하지만, 신화는 ‘의미’에 집중합니다. 그러므로 신화를 역사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와 사실을 모두 잃게 됩니다.
전설은 오래 전에 있었다고 믿어지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설은 세대를 거치며 구전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기록된 것이기에 이전의 전승 과정을 충분히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처음 사건과 그 의미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설을 기록된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으면 전설 속에 담긴 의미와 사실을 모두 잃을 수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실제 사건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기록된 모든 역사는 필연적으로 기록자의 시각과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기록자가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데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일어난 사건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인데도 기록자의 시각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여 자신의 기록에서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후대의 다른 기록자가 자신의 견해를 첨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서로 기록된 절대 객관의 역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모든 역사는 기록자의 '해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기록된 역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절대 객관의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적절하지 않습니다. (신화와 전설, 역사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하고 싶은 분은 저의 책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또는 데이비드 힌슨이 지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참고해 주십시오.)
3. 성경의 기록을 과학과 역사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면 영적인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성경의 기록자들은 왜 모세가 120년을 살았노라고, 또한 초기 왕들이 40년씩 통치했노라고 과감히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역사'를 기록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를 기록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경에서 역사를 찾아내려는 무모한 시도를 중지하고 영적인 의미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과학책은 과학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가치가 있습니다. 역사책 역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과학책이나 역사책에서 영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시도한다면 무리가 따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영적인 의미를 담은 종교경전이지 과학책이나 역사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의 기록을 과학과 역사의 관점에서 보려고 하면 사실과 진실이 모두 왜곡될 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놓치게 됩니다.
구약성경에는 무섭고 잔인한 하나님의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이런 기록들을 모두 사실로 또한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우리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회피하거나,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고 신약시대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답으로 묻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신 우리의 하나님은 가나안땅으로 이주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 곳 주민을 모두 살육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단지 이집트 왕 파라오 한 사람을 징계하기 위해 이집트의 장자를 모두 죽여버린 무서운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이민족에게는 가혹하고 자신의 백성을 편애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은 주변 민족과의 갈등과 전쟁에 늘 시달려야 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극한 상황에서 인식한 하나님이지 실제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다음에 기회가 될 때 충분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지켜주시기 위해 이방민족을 몰살시켜 주시는 분이라고 진실로 믿었을 것입니다. 생존이 달린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그렇게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간절한 신앙과 진정성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삼천 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식한 하나님을 지금도 그대로 믿는다는 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순진한 믿음을 의심하고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런 무리한 해석들이 교우님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을 계속 갖게 되면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는 많은 갈등과 비극이 재생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도, 그분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신 우리 예수님께도 큰 결례가 되며, 무엇보다 기독교의 참된 신앙과 가치가 훼손되어 한국 교회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만들 것입니다.
교우님들과 가정에, 또한 섬기시는 교회와 하시는 일에 하나님의 은총과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