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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출생 비밀 추적에 관하여 손창식와의 인터뷰 - 월간조선 [2]

2013-01-08 2399
월간조선

1971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돕다


완도중학을 졸업한 손씨는 완도 수산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광주로 나가 숭의실업고교로 전학했다. 손씨는 1968년 조선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누이를 통해 들은 것이 대학 입학 후였다. 대학생인 그는 실의에 잠겼다. 못 배운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이 죄가 되고, 6·25 전쟁 중에 좌익 손에 죽은 아버지를 「1949년에 병사」한 것으로 허위 기록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공부가 싫었고, 사람들의 위선적인 행동이 미웠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반건달 생활을 1년간 하다가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는 고향에서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4H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완도군 4H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1970년엔 가정을 꾸리고, 완도 특산물인 해태(김)를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이듬해 그의 운명을 뒤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1971년 대통령 선거였다.

손씨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金善太(김선태)씨가 농촌의 젊은 지도자인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완도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선태씨는 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의 당선을 위해 뛰고 있었다. 김선태씨는 전남 보성·장흥·강진·해남 지역의 유세 독찰반 책임자였다.

스물세 살이었던 손씨는 사업을 잠시 접고, 신민당 완도군당 선전부장 겸 김선태씨 보좌역이 되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씨는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가 가산을 온통 쏟아 부은 해태 사업도 망해 버렸다.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그는 친지 소개로 대구에 있는 신성무역이라는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1972년이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대구에 있는 공장에 공원 겸 견습사원으로 들어갔다. 신성무역은 대일 「홀치기」 무역회사였다. 홀치기는 얇은 비단에 각종 문양을 새긴 후 염색한 옷과 의복을 말하는데, 손으로 한 바늘씩 정성스럽게 짠 우리나라 제품은 일본 상류사회에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휴일도 일요일도 없이 근무했다고 한다. 이 무렵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공장 가동에 필요한 벙커C유를 구하기 위해 전직원들이 외지에 출장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사귄 친구들을 통해 유공 대구출장소장을 소개받았다. 그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소장님, 신성무역은 좌절한 제 인생을 구해 준 회사입니다. 이 회사에 저는 꼭 報恩(보은)을 하고 싶습니다. 말단 사원인 제가 사장님과 간부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번만 도와 주십시오』

유공 대구 소장은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봉투 한 장을 주었다. 『봉투 속에는 기름 한 차를 살 수 있는 주유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기름 한 차를 몰고 회사 정문에 들어가니 간부들이 문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출장간 직원들이 1.8ℓ짜리 기름 한 통을 겨우 구해 오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일로 회사의 인정을 받았죠. 다음날엔 입사 후 처음으로 회사의 최고 어른인 사장님도 뵈었습니다.

당시 군수 월급이 1만5000원인데 저는 3만원을 받았습니다. 밤에는 대구 계명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적을 두고 못 다한 대학 공부도 마쳤고요. 1974년부터는 대구 친구들의 도움으로 밤마다 기름장사를 하면서 거금 500만원을 벌었습니다. 날려버린 가산을 거의 보충했죠. 아버지 제사 지내러 고향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다녔습니다. 신성무역 일본 교토 지점장을 지내고 나서 정치를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6년 정도 회사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8년, 그는 김선태씨 권유로 정치판에 복귀했다. 김선태씨가 양일동씨와 함께 통일당을 만든 때였다. 그는 인권 부국장을 맡았다. 김상현씨가 만든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부장을 맡아 「동교동」과도 인연을 맺었다. 김대중씨가 김씨가 아니고 윤씨라는 말에 분노해 출생 내막을 밝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본격적인 야당 당료 생활을 시작하던 이 무렵이었다.


이희호 여사가 선물한 벙어리 장갑

결심은 했지만 손씨는 바로 김대중씨 고향인 하의도로 내려갈 수 없었다. 광주사태와 관련해 불법 유인물을 살포한 혐의로 1980년 5월 말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보도 통제가 되었던 광주의 참상을 서울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선배 이경식씨 등 동지들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어 신촌·청량리·잠실·영등포 일대의 전화부스와 건물 옥상에 뿌렸는데, 저는 신촌 일대를 맡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김홍일·한화갑·김옥두·함윤식씨 등이 수감돼 있었다. 손씨는 정통 동교동맨은 아니었지만 광주사태 관련자여서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김대중씨는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었지만 이희호 여사가 아들 김홍일씨 옥바라지를 위해 대전교도소에 자주 면회를 왔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저에게도 광주사태로 고생한다며 겨울철엔 귀마개하고 벙어리 장갑을 넣어 주었습니다.

참 고마워서 고맙다는 편지를 써보냈더니 이여사가 자필로 답장도 보내 주었습니다. 김홍일씨는 저와 동갑(1948년생)이어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홍일씨는 마른 오징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뚱뚱한 사람이 운동은 안 하고 오징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일본인 시바다 기자를 만나다

출소 후 그는 생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양복 재단사인 매형과 합자하여 서울 종로에 양복점을 냈다고 한다.
거기서 번 돈으로 그는 서울 관악구에 있던 미원 대리점을 인수했다. 전국 270개 대리점 중에서 판매율이 꼴찌에 가깝던 이 대리점을 그는 인수 1년 만에 전국 10위권으로 올려놓았다고 한다. 강남과 과천 일대를 발로 뛰며 시장을 개척한 결과였다. 그의 활약상은 미원 사보에도 소개되었고, 그는 판매 교육 강사로 강연도 다녔다.

사업에서 성공을 거둔 그는 정치판에도 열심히 나갔다. 번 돈으로 돈 없는 야당 의원들을 지원하기도 하고, 야당에서 하는 일을 위해 돈도 내놓았다고 한다. 이 시절 그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을 맡았고, 1985년 민추협 발족 때는 인권국장에 기용됐다. 데모하다 구속된 학생이나 야당 당원들에게 인권변호사를 소개하는 것이 인권국장의 일이다. 쫓기고 숨어 지내는 야당 시절이었지만 별도 사업체를 갖고 있던 그는 항상 넥타이에 정장 차림을 하고 다녔다.

잘 나가던 그는 1987년 후반, 몇억원 어치의 물건을 팔면서 받았던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졸지에 망했다. 부도를 막기 위해 집도 내놓았다. 그가 평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던 때였다. 부도 수습을 위해 정치는 뒷전이었다.

겨우 빚을 수습한 손씨는 휴식과 새로운 충전을 위해 그동안 미뤄 왔던 하의도行을 결심했다고 한다. 하의도에서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해 그는 맨 먼저 일본 산케이(産經)신문 한국 특파원 시바다 미노루(紫田穗) 기자를 찾아갔다. 시바다 기자는 「김대중의 좌절」이란 책에서 김대중씨의 실제 아버지는 윤모씨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손씨는 시바다 기자를 통해 제보자들의 이름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시바다 미노루 기자의 사무실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었다. 손씨는 사전 연락도 없이 사무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런 돼먹지 않은 글을 쓴 사람이 당신이오』

손씨의 흥분한 모습에 놀란 시바다 기자는 유창한 한국말로 『진정하시고 찾아 온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 정치범 동지회 대변인 손창식이란 사람이오. 대통령에 두 번씩이나 출마한 야당 지도자 김대중 선생의 출생이 의혹스럽다며 신군부 구미에 맞는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글을 쓴 것을 보면 당신은 전두환 소장의 1등 첩자임에 틀림없소. 당신을 국제법에 의하여 제소하겠소』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소?』
『당신에게 이따위 허위 정보를 제공한 취재원을 가르쳐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행동을 국제 사회에 폭로하겠소』
『취재원은 알려 줄 수 없고, 金大中씨 호적 초본은 드릴 수 있소』

더 따져보았자 소득이 없다고 판단한 孫씨는 시바다 기자가 건네주는 호적초본을 받고 사무실을 나왔다고 한다.
손씨는 시바다 기자가 쓴 「김대중의 좌절」이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김대중씨 가계와 만나야 할 사람들의 윤곽을 파악하는 한편, 하의도 출신의 김해 김씨로 김대중씨와 같은 집안인 金敬仁(김경인) 전 의원을 수시로 찾아갔다고 한다.

『김경인 전 의원은 김대중씨보다 나이가 두 살 정도 어리고, 초등학교는 목포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목포에서 8대, 9대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문중 사람들의 근황과 하의도 사정에 밝았습니다』

대충의 윤곽을 파악한 손씨는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上衣(상의) 윗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소형 녹음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준비를 마친 손씨는 1988년 4월, 난생 처음으로 하의도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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