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인의 행실기록 자녀안 (姿女案) .. [5]
당시의 사건들 (3) : 수십 명과 간통한 유감동(兪甘同)
유씨에게는 극형을 명했던 세종이었지만 검한성(檢漢城 : 명예 한성판윤(현재의 서울시장)) 유귀수의 딸 유감동에게는 처음에는 자원하여 부처하도록 했다가, 사헌부에서 전례와 형평이 닺지 않음을 이유로 재고를 요청하자 변방 노비로 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니, 관련자들의 배경에 따라 가했던 벌도 천태만상이었다.
1427 년 세종 9년 9월 16일, 사헌부에서 유감동의 음행사실과 관련자들의 형량을 아뢰었다.
유감동은 최초 남편인 현감 최중기의 부임지로 따라갔다가 비접(避接 : 병을 앓는 사람이 자리를 옮겨 요양함)하러 가는 길에 김여달(金如達)을 만나 순찰한다고 위협받아 강간당하고, 김여달이 직접 최중기의 집을 드나들며 간통하다 김여달을 따라 남편을 떠나 도망을 했다.
유감동은 이후 창기(倡妓)라 거짓하며 서울과 외방(外方)을 돌아다니며 음행을 일삼았다.
그가 상대한 수십 명의 남자들 가운데는 고위 관리들은 물론이고, 아전과 장인(匠人) 등 각계각층을 망라해 성종 때의 어우동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특히, 이승(李升)과 이돈(李敦)은 유감동과 간통을 하면서도 감동의 아버지 집에 드나들며 교분을 유지했고, 이효량(李孝良)은 비록 복제에 들지 않았지만 유감동이 처남의 아내임에도 간통을 저질렀으며,
권격(權格)은 고모부(姑母夫)인 이효례(李孝禮)가 유감동과 먼저 간통한 것을 알면서도 여러 차례 간통하기도 해, 이들의 음행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세종은 이들의 벌을 정함에 있어 이돈·효량·상동·수생은 공신의 후손이므로 외방에 부처하고, 진자(嗔紫)는 공신의 아들이므로 파면하라 하였고, 이자성(李子成)은 논죄하지 말라 하며 전체적으로 경한 벌을 과했다.
세종의 결정에 대해 사헌부에서는 상소로써 벌이 너무 가벼우니 수정하여 줄 것을 고하고 있다.
사헌부는 이 상소에서 "전하께서 형률에 의거하여 죄를 처단하심은 형벌을 신중하게 하시고자 하는 아름다운 뜻이기 때문에 감히 목을 베기를 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의 경우에 같은 죄를 범한 사람은 극형을 받았는데 이번의 경우만 형률에 의거하면 경중의 균형을 크게 잃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풍속을 바로잡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변방의 노비로 삼아 종신하도록 하소서"라 했고, 세종은 이를 윤허했다.
당시의 사건들 (4) : 세종의 회고
세종 18년 4월 20일. 세종은 사헌부에서 이석철(李錫哲)이 처제인 종비와 통간하였음을 아뢰며 중벌을 내리기를 바라는 말에, 자신이 예전에 가했던 가혹했던 형벌을 회고하며 율(律)대로 처할 것을 명하고 있다.
세종은 이 말을 하며 예전 자신이 극형을 명했던 것을 후회하는 마음을 내비치면서 기억하고 있는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었다.
" 고려 말에 풍문을 가지고 죄를 묻고 벌을 주어 무고한 사대부 아내까지 원통하게 된 경우가 많았으므로, 태조와 태종께서는 그 해독을 아시고 법을 혁파하셨다.
그러자 변중량(卞仲良)의 누이동생이 가노(家奴)와 간통하고 그 일이 탄로되자 그 죄를 덮으려고 오히려 자신의 지아비가 모반한다고 고소하여, 무고한 그 지아비는 매로 인해 죽었고 아내는 지아비를 무고하여 참형을 당했다."
"유은지(柳殷之)의 누이동생은 중과 은밀히 간통한 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가노 세 사람을 다 죽였으니, 비록 종이라 하더라도 인명이 지중함으로 법으로 다스려 참형에 처하였다"
"승지 윤수(尹須)의 아내 조씨(趙氏)는 고종형[表兄] 홍중강(洪仲康)과 장님 하경천(河景千)과 통간하였으므로 역시 극형에 처하였으니, 이는 우리 조종께서 형벌이 적당하고 그릇됨이 없었던 것이다"
" 내가 즉위한 뒤로 이귀산의 아내가 지신사 조서로와 간통하여 그 때 내 나이 젊고 한창이었던 때라, 치교(治敎)에 흠이 될까 하여 율문 밖의 형벌인 극형에 처하였었다.
그러나 유감동은 율에 따라 결죄(決罪)하여 천인으로 만들었고, 고종형 홍양생(洪陽生)과 통간한 유장(柳璋)의 딸인 안영(安永)의 아내, 부사정 이의산(李義山)과 양인(良人) 허파회(許波回)와 통간한 이춘생(李春生)의 딸인 별시위(別侍衛) 이진문(李振文)의 아내는 모두 다 율에 따라 다만 외방으로 축출하였다.
이석철의 일에 대해 율외의 형벌을 가하는 것은 실로 잘하는 정사가 아니다.
지난 날 한두 가지의 율외의 형벌은 지금 후회가 된다. 의정부에 가서 잘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이 "이석철의 더러운 행실은 일국의 신민들이 모두 다 미워하는 바입니다.
만약에 율문대로만 따를 것 같으면 물의 (物宜 : 사물이 당연히 그러하여야 할 상태)에 맞지 않을 것 같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율문대로 과죄하시고 종신토록 변방에 충군하여 벼슬할 수 없도록 하소서"라 청하자, 세종은 그에 따랐다.
이렇듯 조선조 양반가에서 행해졌던 간통의 예는 비일비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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