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인의 행실기록 자녀안 (姿女案) .. [1]
사람은 모두가 동물로서의 공통적인 본성(本性)과 개개인에 고유하게 내재되어 있는 고유한 본성(本性)을 가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저절로 엄마의 젖을 물고, 뭍에서 갓 태어난 거북이 새끼들이 줄을 지어 바다로 달려가며, 암컷과 수컷의 연어는 바다에 살다가 알을 낳기 위해 생명을 다해가면서 강의 상류로 올라가는, 모든 동물들이 생존과 종의 번식을 위한 본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의 본능을 더욱 강하게 소유하고 있다.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사대부 양반가문이 사회의 중심을 차지했던 조선조는 엄격한 가부장제(家父長制) 하에 모든 제도가 마련되고 시행되어졌다.
가부장들에게는 그 권위만큼 많은 특권이 주어졌고, 조선조 성문화 역시 이들의 영역을 훼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고려 때 시작된 '자녀안(姿女案)'이 조선조에서는 더욱 엄격해져
' 자녀(姿女)'라 함은 '방자한 여자', 즉 '행실이 음란하고 방탕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자녀안'은 바로 그런 여자들을 기록하여 국가에서 신분을 낮추거나 그 자손들이 일정한 관직에 오름을 제한하기 위해 국가에서 관리하던 대장(臺帳)이었다.
그 대상은 사족(士族)인 양반집 여자였고, 양반가문의 여자가 간통 등을 저질러 행실이 바르지 못하였거나 삼가(三嫁)하였을 경우에 이 문서에 기록했다.
양반집 여자가 자녀안에 기록되는 것은, 음탕한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당사자는 물론 가문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양반가의 남자들은 자신의 집안에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여자를 죽이기도 하는 등, 스스로 처벌을 가해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처벌은 대개가 덮어지기 마련이었다. 조선조 초기만 해도 제사를 물려받는 장자에게만 조금의 차등이 있었을 뿐 여자들에게도 상속권이 인정되었지만,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조선조 후기 들어 더욱 심해져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으로 아예 상속권도 인정되지 않았고 여성들의 생활환경은 더욱 척박해져 갔다.
이 제도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철폐되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사회적 풍속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자녀안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당시에는 남편이 있는 여자가 간통을 하였을 경우 이에 기록하여 신분을 낮춰 종(針工)으로 삼기도 했다.
이렇듯 고려시대에서는 간통한 유부녀만을 대상으로 자녀안에 기록하였으나, 사대부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고려 말에서 조선조로 넘어 오는 시기에서는 남편이 죽어 개가하는 경우로까지 대상범위가 넓어져가게 되었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1년 1389년에는 '6품 이상의 처첩은 남편이 죽은 뒤 3년 간 재가(再嫁)할 수 없으며, 수절할 경우에는 그 정절을 포상한다'는 규칙이 만들어져, 사대부들이 실질적 권력을 장악한 이 시기부터 과부의 재가를 제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었다.
공양왕은 3년 간 재위에 머무르다 폐위 된 3년 후 삼척에서 살해되고, 이성계가 문을 연 조선왕조가 건국된다.
태조는 양반집 부녀자들이 가까운 친척 외의 남자들과 왕래하는 것을 금하였고, 양반의 이혼은 왕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태종에 들어서는 이 분위기가 더욱 구체적으로 확대되어 양반가 여자들의 간통은 물론, 남편이 죽어 세 번 이상을 결혼하는 삼가(三嫁)까지 음란한 행동으로 보아 자녀안에 기록하도록 하였다.
태조와 태종도 이미 결혼했던 경험이 있는 여자를 후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던 터라, 이 시기만 해도 재가까지는 큰 문제없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종에 들어서는 1447년에 재가까지 금지하게 되어, 조선왕조가 안정된 기반을 확립해가면서 유교에 바탕을 둔 가부장제 또한 더욱 강화되어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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