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김씨·김해 허씨·인천 이씨 "한핏줄" 결혼 안해 .. [2]
통혼 않는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인주) 이씨
김해 김씨의 시조는 가락국의 김수로왕인데, 그 왕비는 멀리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許黃玉)이었다.
그런데 김해 김씨는 김해 허씨, 인천(인주) 이씨와 통혼하지 않는다. 장자 거등왕(居登王)은 수로왕의 뒤를 이어 김해 김씨가 되었지만 김해 허씨 등은 어머니 허황후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문적인 '금관고사급허성제문집(金官古事及許性齊文集)'은 허황후는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 거등은 태자에 봉해졌고 차자는 어머니의 성을 좇아 허씨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형제간이기 때문에 통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씨가 포함된 데는 신라 경덕왕 14년(755)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고 알려지고 있는 허기(許寄)와 관련이 있는데, 그는 안록산의 난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당나라 현종을 따라 촉나라(蜀國)로 피란했다.
난이 평정된 후 현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종성(宗姓)인 이씨 성을 하사했는데 이후 허씨는 이씨와 복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인천 이씨는 양천 허씨에서 갈라진 태인 허씨에서 다시 갈라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원래 김해 허씨로,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군량을 공급한 공으로 공암(양천)을 식읍으로 받았는데 여기에서 허사문(許士文)을 시조로 하는 태인 허씨가 갈라져 나왔고, 태인 허씨에서 다시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는 인천 이씨가 갈라져 나왔다.
이처럼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은 모두 같은 시조에서 갈라진 한핏줄이며, 그래서 이들은 서로 다른 성씨에도 불구하고 가락중앙종친회에 함께 소속되어 있다.
결혼 금하는 청송 심씨와 나주 박씨
반면 서로에 대한 원한 때문에 혼인을 거부하던 성씨들도 있었는데 청송 심씨와 나주 박씨가 한때 그랬다.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의 부친 심온(沈溫)은 세종의 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세종 즉위년(1418)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갔다가 그를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던 것이 상왕 태종의 심기를 건드려 화를 당한다. 태종은 심온의 동생 심정이 총제(摠制)로 있으면서 '금위(禁衛) 군사로 상왕(태종)과 주상(세종) 두 분을 호위하려니 숫자가 적다'며 불평한 것을 역모로 몰아 고문 끝에 심온을 끌어들인다.
귀국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사형 당한 심온은 이를 좌상 박은(朴誾)의 무고 탓으로 돌려 '이후로는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두 집안이 혼인하는 예가 드물었는데, 사실상 심온을 죽인 인물은 박은이 아니라 태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당파 따라 옷고름 달리 매기도 조선 후기에는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로 다른 당파끼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당파에 따라 옷고름 매는 방법까지 달라 멀리서 봐도 서로 무슨 당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니 그 정도의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조상을 섬기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과거의 원한이나 당쟁 시절의 잘못된 유산까지 계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매일처럼 신문지상에 넘쳐나는 현대판 당쟁들을 볼 때마다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