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 - MASADA를 증언하다 .. [5]
마사다 요새의 발굴
요세푸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서기 73년에 마사다에 있지 않았으며,더구나 유태인을 배반하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질 날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E 로빈슨과 E 스미스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에 나서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냈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 사바(저주받은 땅)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이 점차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 가자 이스라엘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1963년 마침내 유태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았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참여해 군 참모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부총리에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태 광야와 사해 근처에서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1964년 5월,1964년 11월∼1965년 4월 두 차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냈다.
그는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 발굴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워낙 외진 데다 날씨가 고약한 곳이어서, 스스로 나선 사람이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 스물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000여명은 한 번에 두 주일씩 스물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다. 가드나(이스라엘 청소년 전투부대) 학생들과 키부츠(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는 곳에 발굴본부를 차렸는데, 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에 마사다에서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로 불어 천막을 갈가리 찢었고,느닷없이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박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웠다.
말라붙었던 개울이 강으로 바뀌고,캠프와 캠프 사이로 흙탕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로데 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 기록을 믿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바위산 꼭대기에서도 빗물을 잘 저장해 물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야딘이 제일 먼저 발굴한 곳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지어진 3층 건물이었다.
요새라기보다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왕궁이었다. 헤로데 왕은 사해의 해면으로부터 340m나 되는 높은 곳, 로마 시대의 수려하고 전통적인 공중 목욕탕을 본뜬 독탕에서 찬물과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럽게 지냈다.
헤로데의 궁전을 발굴하느라고 자원봉사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했다.
헤로데가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경치 좋고 방어하기 좋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야딘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골 세 구를 찾아냈다. 하나는 젊은이의 것이었는데,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
또 하나는 금방 손질한 듯이 땋은 까만 머리카락이 붙은 젊은 여자의 유골,나머지 하나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3층 왕궁 옆 커다란 창고 건물을 복원하는 데는 이스라엘군 공병대가 뜯어서 올린 뒤 조립해 준 기중기를 썼다.
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헤로데의 별장인 서궁(西宮)과 큰 수영장이 있었다.
그밖에 작은 궁 세채가 더 있었다. 왕은 마사다를 빙 둘러 성벽을 쌓고,군데군데 탑 38개를 세웠다. 탑 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이 110개.유태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
대·중·소 크기의 목욕탕이 나란히 발굴되자 야딘은 이것이 유태교에서 침례 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미크베가 아닐까 생각했다.
밖에서 대형 욕탕으로 통하는 수로가 지붕들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욕탕으로 끌어들이는 데 쓰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유태 율법에 따르면 미크베는 하늘에서 떨어져 곧바로 흘러든 ‘순수한’ 빗물로 채워야 한다.
물통 따위로 길어온 물은 안 된다. 율법학자들이 마사다의 욕탕을 제2 성전시대 미크베라고 고증하자 온 이스라엘이 떠들썩했다.
그 동안 제2의 성전시대(기원전 520∼516년·스룹바벨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한 때) 때 미크베는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장 뜻깊은 유물이 나왔다. 성벽의 한 방에서 파편더미를 2m 넘게 치우자 옷, 이불,바구니 따위와 함께 두루마리 구약성서가 나왔다.
자원봉사자들이 달려와 양피지 한 조각을 내밀었을 때 야딘은 그것이 시편 81∼85편인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적외선 사진을 통해 판독해 보니 서기 40년 이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내용은 몇몇 작은 변화 외에는 오늘날 쓰이는 성서와 똑같았다.
마사다에서 나온 두루마리 구약성서는 모두 14개였다. 시편, 레위기, 에스겔서, 신명기 부분들과 유태 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喜年書), 그리고 외경(外經;구약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책 14권.
카톨릭에서는 이를 구약성경과 같은 무게로 다루지만 신교에서는 ‘성경은 아니지만 읽어도 무방한 책’으로 인식한다)인 ‘벤 시라의 지혜서’, ‘벤 시라의 지혜서’는 탈무드에 널리 인용되며 율법학자에게 성서와 마찬가지로 권위 있게 취급된다.
원본이 자취를 감추고 희랍어 번역이 ‘외경’에 수록되었는데,마사다에서 히브리어 원본이 나온 것이다.
보통 고고학 발굴이 느리고 지루하게 진행되는데 비해 마사다에서는 매주,심지어 시간마다 새로운 유물이 발굴됐다.
“우리는 거의 매일 뭔가를 찾아냈다.무얼 찾아내느라 며칠씩 땅을 팔 필요가 없었다.” (고고학자 암논 벤토르)
발굴팀은 갖가지 항아리와 살림 도구,‘유대인의 자유’라고 새겨진 진귀한 동전, 세계를 통틀어 6개뿐인 은화 3개, 가장 오래된 천조각 따위를 찾아냈다.
반란군이 쓴 검소하고 한맺힌 유물과 헤로데가 남긴 화려한 유물은 대조적이었다. 고고학적으로는 헤로데의 유물이 더 값졌지만 정신의 고귀함은 반란군의 유물에서만 볼 수 있었다.
마사다가 ‘영웅들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것은 이 고귀한 정신 때문이다. 가드나(청소년 전투부대)에 들어간 이스라엘 청소년들은 마사다 꼭대기에서 이렇게 외친다.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지 않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