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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 - MASADA를 증언하다 .. [4]

2010-01-07 2064
Sundance

마사다 요새의 함락


서기 72년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제10군단과 보조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로 진군해 왔다.
군세는 병사 9,000명과 노역에 부릴 유태인 전쟁 포로 6,000명. 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

그러나 반란군보다 그들을 포위한 로마군의 사정이 더 열악했다. 로마군은 먼 데서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태광야 너머에서 날라왔다.

포위 작전이 소용없다고 깨달은 실바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

마사다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실바는 그 바위에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

꼭대기는 마사다 성벽보다 20m쯤 낮았다. 이 엄청난 흙산 쌓기 공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 포로들이 해냈다.
마사다 쪽에서는 활을 쏘아 이 공사를 막으려 했지만 좁은 전선(戰線), 즉 성벽의 한 지점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다음 단계로 로마군은 망루같이 생긴 공성탑(攻城塔)을 만들어 비탈 위로 올렸다.
공성탑 높이는 마사다 성벽보다 조금 높았다.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궁수들이 활을 쏘아 엄호하는 사이에 다른 병사들이 투석기(投石機)를 끌어올렸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투석기는 무서웠다.



사거리가 400m나 되는 투석기가 20∼25㎏짜리 돌들을 날려보내자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태인들은 무너진 성벽 자리에 서둘러 또 다른 벽을 쌓았다. 그들은 나무기둥을 두 겹으로 박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자 실바는 박격포에서 벌컨포와 미사일 공격으로 바꾸었다.
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가 박히고 횃불이 던져졌다. 남풍(南風)마저 가세하자 나무 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4월15일이 기울었다. 실바는 일단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날이 밝으면 공성탑에서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마 정규군 9,000명과 유태 반란군 수백 명의 대결. 마사다는 로마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 병정들은 유태인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물샐 틈 없이 지켰다. 밤 사이에 유태인 전원이 자결한 것을 실바가 알 리 없었다.

날이 밝자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놓았다. 로마군 선봉이 함성을 지르며 구름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했다.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성은 무섭도록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불탄 건물과 960명의 장렬한 주검이 로마군을 맞았다. 그들은 뜻밖에 벌어진 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실망하고,경탄하도록 만듭시다’라고 열변을 토한 벤 야이르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장렬한 죽음 앞에서 로마군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수색하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여자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실바는 두 여자와 아이들 다섯을 모두 살려 주었다.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년 가량 지나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 이슬람 교도들이 유태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 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도는 사이에,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source : 130000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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