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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 - MASADA를 증언하다 .. [3]

2010-01-07 1937
Sundance

마사다 요새


사해(死海)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유태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해발 434m에 이르러 문득 치솟기를 멈추고, 단칼에 베인 듯이 평평해진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같은 모양을 한 바위산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둘레 1,300m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그 진흙땅 위에 놀랍게도 2000년이라는 세월을 간직한 성채가 거센 바람 속에서 말없이 유태광야와 사해의 푸른 물결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거칠고 메마르면서도 웅장한 아름다움이 깃든 이 요새의 이름은 마사다.

마사다에 얽힌 사건을 역사책 ‘유태전쟁’에 자세히 기록한 요세푸스는 서기 66년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태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나중에 조국에 등을 돌리고 로마군에 넘어갔지만, 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싸움을 후세에 전했다.

마사다는 배신자 요세푸스 덕분에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영웅들의 성지(聖地)’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이었다. 그 뒤 유태왕 헤로데가 기원전 35년 여기에 성벽을 두르고 무기와 식량을 저장했다.

그는 로마에 기대어 유태를 통치했는데, 유태인들은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았다.

게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까지 유태 왕국을 자기에게 달라고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졸라대는 것을 알게 된 헤로데는 로마가 자기를 배신할까 봐 두려워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를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로데가 죽은 뒤 마사다에는 로마군이 머물렀으나,유태전쟁이 일어나자 반란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서기 70년 로마군은 유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웠다. 모든 유태인이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그 중 한 무리가 마사다로 도망쳐 로마군에 항거했다.

그들은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롯파(열심당;유태교의 한 갈래) 신도들이었다.



마사다에는 헤로데가 가져다 놓은 옥수수와 콩, 대추야자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은 신선했고, 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로데가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 무기도 1만명 정도가 그보다 훨씬 많은 공격군을 상대해 지구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창고에 그득했다.

사막과 다름없는 광야를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성 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넉넉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젤롯파 유태교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태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1,000명이 채 안되었다.

로마제국의 눈에는 한줌에 지나지 않았지만,그들은 마사다를 게릴라 기지로 삼아 끊임없이 로마군을 괴롭혔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꺼져 가는 반란의 불길이 또다시 타오를 것 같았다. 이미 2년 전에 유태왕국을 무너뜨리고 ‘유태 정복 기념 동전’까지 만들어 쓰던 로마제국으로서는 마사다의 유태인이 큰 골칫거리였다.

결국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이 정예 군단으로 꼽히는 제10군단에 마사다를 함락하라고 엄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source : 130000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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