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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나라의 1호들 .. [4]

2009-08-04 2052
Sundance

◆ 수염 긴 노인이 도안된 국내 최초 지폐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사용된 지폐는 어떤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고종 30년 1893년에 만들어진 지폐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바로 호조태환권이라는 지폐. 지폐 제조를 관장했던 부서가 호조였다는 것을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데, 50냥ㆍ20냥ㆍ10냥ㆍ5냥짜리가 있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이 지폐를 만든 것은 당시 화폐로 쓰고 있던 엽전을 회수하여 새로운 화폐제조를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다. 태환(兌換)이라는 말은 바로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 화폐와 바꾸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폐는 만들어놓기만 했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화폐 업무를 담당한 일본인들의 운영권 다툼 때문.

만약 그 문제가 해결돼 새로운 화폐로 쓰였다면 호조태환권이야말로 한국 최고의 지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지폐는 한 장도 사용되지 못한 채 모두 소각되고 말았다.

이후 나온 지폐는 모두 식민지 시대에 발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때의 지폐는 우리나라의 돈이라 할 수 없다. 한국의 지폐로 최초인 것은 당연히 광복 이후 맨 먼저 한국인들이 화폐로서 사용한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때 맨 먼저 사용된 지폐는 1백 원짜리 조선은행권. 1945년 9월 1일부터 사용됐다. 광복이 된 나라에서 발행하여 사용한 지폐이기 때문에 이 돈은 분명 우리나라의 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화폐업무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광복이 되었을 때 우리의 손으로 그 일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

광복이 된 상태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지폐는 그렇기 때문에 액면도, 모양도, 도안도 모두 일본사람들의 주도하에 만들어졌다. 액면 1백 원은 고액이었다. 통화 조절을 명분으로 남발한 것이었다.

도안도 1915년부터 일제가 각종 지폐에 공용으로 쓰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크기는 가로가 162mm, 세로가 93mm, 조선서적주식회사에서 옵셋 인쇄로 제조되었다. 화폐를 인쇄할 수 있는 시설은 일본에 있었는데, 그렇게 국내에서 인쇄한 것은 일제가 전쟁 말기 수송상태가 마비될 것을 염려하여 시설을 서울로 공수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폐는 아직까지도 수집가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다.

다름 아닌 탐스러운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어느 노인의 모습이 인쇄되어 있는 도안인데, 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 때문이다.

화폐 도록에는 이 노인이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으로 되어 있고, 그렇게 알려져 왔다. 그는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벼슬을 받은 반면, 조선 독립의 청원서를 보내기도 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의 사진을 보면 도안의 노인과 비슷하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관보에 그 도안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1947년도 이런 논란 때문에 한 시민이 중앙방송국에 문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조선은행 영업부 부지배인 최기룡 씨는 그 도안의 주인공이 운양이 아니고, 가공적인 수복신(壽福神)이라고 해명해주었다.

이런 사실은 그 프로그램의 질의응답 내용을 책으로 엮은 '상식독본'에 실려 있다. 위조 방지를 위해 수염이 있는 인물화를 도안으로 사용하는 것은 흔한 방법이라는 설명을 했던 것. 즉 수염 긴 노인 도안은 수복신 상징. 이 지폐는 정부수립 직전까지 사용되었다.


1백원짜리 조선은행권


◆ 국내 최초 근대묘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마포구 합정역 근처 바른 편에는 천주교 절두산 기념교회가 왼쪽에는 개신교 외국인 연합교회가 소재해 있다.

두 교회는 공히 양화진이라고 하는 한국적 역사와 맞물려 고난 속에서 역사의 분수령을 넘다가 붉은 태양처럼 몸을 태우며 숨을 거두고 잠들었다는 특징을 간직한 곳이다.

합정동 2호선 전철이 지나는 육교 옆 바른쪽으로 넓게 트인 공원이 있는데, 외국인 묘지다. 10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성장위주의 개발논리에 밀려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온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우리의 소중한 근대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마포구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는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많은 저명한 외국인들이 그들이 자녀와 함께 안장되어 있으며, 17개국의 약 430여기의 묘가 조성되어 있어 근대 묘지 형성 과정 및 비문의 변천사를 연구할 수 있는 역사 학습의 장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묘원들은 서양 영화 속에서 쉽게 보이는 묘지 형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 "여기 주를 사랑하는 종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누워있다"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인의 영혼을 어루만지다 숨진 아무개가 여기 누워있다“ 어느 묘지 뒷면에는 “우리는 결코 한국인을 위해 쏟은 당신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귀도 새겨져 있다.

하나같이 평토장이고 희미한 봉분이 형태만을 드러낸 애장도 꽤 많다. 일반적인 묘지와는 차별성이 있는 이 묘원은 외국인 선교사로서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의 땅에서 옳은 신념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다 순교한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기에 가치가 높은 유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묘지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 '자유공원'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1가·전동·북성동3가에 걸쳐 있는 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인천 앞바다와 인천항, 인천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응봉산에 조성된 공원으로 면적이 6만4480㎡ 에 이른다.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응봉산 일대에 일본·청나라를 비롯한 미국·영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들이 어울려 형성한 '만국지계'가 들어서게 되자, 5년만인 1888년 11월 이들에 의해 만국공원이 공동명의로 조성됐다.

그러나 일본 세력의 확장으로 각국 거류지가 철폐되고 공원 관리권이 1914년 인천부로이관되어 서공원이라 불렸다.

그후 1957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자유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인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자유공원은 민족상잔의 뼈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인천시민의 안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공원 정상의 맥아더 동상과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을 비롯해 자연보호헌장탑, 충혼탑, 자유의 여신상, 연오정, 석정루 등이 세워져 있으며, 학익동 언덕에 묻혀 있던 선사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를 옮겨놓았다.

그밖에 1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인천시립박물관과 교육청·측후소 등의 문화기관이 들어서 있다. 각종 시민을 위한 행사도 열리고 있다.

또 매년 4월이면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길은 벚꽃으로 만발한다. 이를 기념해 벚꽃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공원 정상에서 인천항과 월미도를 바라보는 맛도 그만이다.

늦은 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인천항의 밤 경치는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도 유명하다. 인근에 중국인촌, 신포동시장, 인천백화점, 올림포스관광호텔 등이 있다.

약간 멀리는 연안부두, 월미도가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내려오는 길에 홍예문을 보고 오는 것도 좋다.

일본인들이 자국의 조계와 축현역(현 동인천 역)을 연결시키려고 응암산 줄기를 뚫어 1905년착공했다. 1908년 준공했는데 고개문의 형태가 무지개와 같아 홍예문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 '자유공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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