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학살 90년] "주고엔 고짓센(한국인이 발음 어려운 일본어·15엔 50전이란 뜻
日, 대지진 후 민심 흉흉해지자 "조선인, 毒 풀고 폭동" 소문내
署長들 "조선인 죽여도 좋다"… 3600여 자경단도 '조선인 사냥'
'조선인 폭동' 실체 안드러나자 日 정부 "사실이 되도록 노력"
국가 차원의 학살 은폐 시도
"'주고엔 고짓센'을 발음해 봐!" "기미가요를 불러 보라."
1923년 9월 초, 지진으로 폐허가 된 일본 수도 도쿄(東京) 일대에서 칼을 찬 사내들이 몰려다니며 살기에 찬 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협박했다. '15엔 50전'이란 뜻의 '주고엔 고짓센'을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렸다. 발음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센징(鮮人·조선인)이다"라는 외침과 함께 폭행과 살인이 자행됐다.
탁음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은 한국어의 특성상 '주고엔 고짓센'은 조선인으로선 발음이 어려운 일본어였다. "'파피푸페포' '가기구게고'를 발음해 보라" "에도 시대 노래를 불러 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오직 조선인을 색출해 죽이려는 목적이었다. 명백한 '인종 학살'이었다.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규모 7.9의 대지진이 가나가와(神奈川)현에서 일어나 도쿄와 요코하마(橫濱) 등 간토(關東) 지방을 휩쓸었다. 10만명 넘는 인명 피해가 난 큰 재해였다. 지진 발생 직후 통신이 두절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정부는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야마다 쇼지(山田昭次) 일본 릿쿄(立敎)대 명예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지진 당일인 1일 저녁부터 이미 일본 경찰이 "조선인이 살인 방화를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관동대학살 당시 일본 자경단원들이 학살당한 조선인의 시체를 몽둥이로 건드리며 내려다보고 있다(사진 위). 자경단원은 칼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조선인을 수색했다(사진 가운데). 경찰이 압수한 자경단의 흉기. 이 칼과 창으로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다(사진 아래).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2일이 되자 소문은 더욱 빠르게 퍼졌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산업시설을 파괴하고 있다" "약탈 강간까지 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적극적으로 퍼뜨린 것은 일본 군인과 경찰관들. 강덕상 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부터 여러 지구의 경찰서장이 "조선인은 죽여도 좋다"고 공공연히 발언했다는 것이다.
2일 오후 6시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後藤文夫)의 명의로 "조선인이 각지에서 방화하고 있으며,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는 자가 있으니 엄밀하게 단속하라"는 전문(電文)이 전국에 발송됐다. 실탄을 가진 계엄군이 출동해 도쿄와 지바(千葉) 등에서 조선인을 살해했고, 자발적 무력 조직인 3600여개의 자경단(自警團)이 각지에서 조직돼 거리를 활보하며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의 군·경과 민간이 모두 학살의 주체로 나섰던 것이다.
학살은 끔찍했다. '경관에게 연행돼 가던 한 남자를 군중이 조선인이라고 욕하더니 가까운 연못에 던지고 세 명이 굵은 몽둥이로 내리쳤다. 이미 죽은 시체를 연못에서 꺼내 몸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9월 2일 도쿄) '손에 쥔 죽창과 칼로 조선인의 몸 이곳저곳을 찔렀는데 신음과 고성이 섞인 처참한 광경이었다.'(9월 2일 요코하마)
9월 4일 도쿄에서는 이런 참상도 벌어졌다. '열 명이 피투성이가 된 조선인을 철사로 묶고 한 되나 되는 석유병을 부어 불을 붙였다. 몸부림치며 뒹굴자 이번엔 부지깽이로 짓눌렀다.' 목과 사지가 절단돼 몸통만 남은 시신도 사진 자료로 확인됐다.
그러나 '조선인 폭동'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자, 당황한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풍설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이것이 사실로 되도록 긍정적으로 노력할 것"이라는 결정을 내린다(9월 5일 임시진재사무국 경비부의 결정). 자신들이 유포한 유언비어가 사실인 것처럼 날조해 국가의 학살 책임을 은폐하겠다는 것이었다. 허문도 전 국토통일원 장관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잔혹한 악행이 저질러진 사건"이라며 "일본이라는 국가를 상대로 한 진상조사와 사죄 요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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