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출생 비밀 추적에 관하여 손창식와의 인터뷰 - 월간조선 [4]
주막집에서 있었던 일
[Q] : 김운식의 말년은 편했습니까.
『1974년에 돌아가셨는데 늙어서 설움을 많이 받고 살았답니다. 김대중씨 어머니한테 천덕꾸러기 대접받으며 서울 동교동 집을 다녔다고 합니다. 영감(金云式)이 동교동에 가서 소파에 앉아 있으면 장로도는 「뭐 한다고 여기까지 왔소. 당신이 대중이에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또 찾아오냐」며 무안을 주었답니다. 그러다가 며느리 (이희호 여사)가 봉투에다 몇만원을 넣어서 탁자에 올려놓으면 그걸 들고 슬그머니 내려오고 그랬다는 겁니다』
[Q] : 김대통령은 어머니가 김운식과 살기 전에 태어났으니까 윤씨가 맞겠네요.
『윤씨 친척 분을 만났더니, 윤씨 생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김대중이는 자기하고 살기 전에 주막집 아낙이 밴 아기인데 자기하고 살면서 낳았고, 그(김대중)의 동생은 자기하고 살면서 생겼으니까 자기 아들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Q] : 김대통령이 제갈씨라는 근거가 그것입니까.
『하의면에 살고 있는 나이 많은 어른들은 다 제갈씨라고 했고, 김해 김씨 문중 어른들도 제갈씨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제갈성조란 사람의 집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형과 동생이 나란히 살았는데, 동생 제갈성조가 요절한 뒤 시댁에 살고 있던 제수를 시숙이 돌본다고 하면서 제수 집을 드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숙이 제수를 위해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뻘이섬 또는 봉도라고도 하는 鹽田(염전) 옆 부둣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주막집에 시숙 친구가 되는 윤모씨가 살게 되었는데, 석 달인가 넉 달 만에 애기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애가 김대중씨라는 것이 김해 금씨 문중 어른의 말입니다. 아들이 귀한 윤모씨가 자기의 성을 따서 윤성만이란 이름을 지어 주긴 했지만 실제로는 제갈씨라는 것이지요』
[Q] : 제갈씨 쪽에서도 그런 사실을 인정합니까.
『70세 후반의 제갈 家(가) 할머니로부터 똑같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열 살 때, 시숙이 제수씨 방에서 나오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만 몇 번 된다고 하였습니다. 열 살 때 일을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하느냐고 저도 추궁한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말은, 그 때 열 살이면 밥도 하고, 애도 보는 나이였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열 살쯤 더 먹은 언니도 시숙이 제수씨네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했다고 그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장로도는 시댁을 떠나 뻘이섬에 주막을 차렸답니다. 그 할머니가 클 때는, 여자들끼리 모이면 제갈성조의 형이 김대중씨 아버지라고 소문이 났다고 했습니다』
[Q] : 제갈씨 사람들은 지금도 하의도에 살고 있습니까.
『제갈성조의 형은 1958년에 고향을 떠나 내륙 모처로 이사갔습니다. 제가 그곳까지 찾아가 그분 후손들을 만났지만 전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Q] : 증언자들은 모두 생존해 있습니까.
『1999년 정초에 네 명이 사망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김홍일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다
손씨는 「김대중 출생비밀」의 탐사작업을 기록한 녹취록을 기자에게 보여 주었다. 녹취록에는 손씨가 만났던 사람들이 A노인, B씨 등 익명으로 기록돼 있고, 그 옆에는 성별, 나이, 만난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0자 원고지 500장 분량의 방대한 기록이었다.
『이 녹취록은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제가 3회에 걸쳐 다시 듣고 확인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말했기 때문에 이 녹취록이 공개될 경우, 행여 불이익이나 탄압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급적 실명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이와 사는 동네 정도는 표기하고자 하였으나 하의도 일대가 워낙 작은 동네이다 보니 금방 소문날 것 같았습니다. 사투리는 가능한 살렸습니다. 생략된 부분은 취재원 보호를 위하여 옮기지 않았고요. 녹취록 원부는 CD(콤팩트 디스크)에 수록해 놓았고, 녹음 테이프는 외국에 거주하는 친구의 은행 비밀금고에 보관돼 있습니다.
저는 1심 재판에서는 이 녹취록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측에서 제가 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송을 취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자 저도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항소심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했는데 증거 채택이 되지 않았습니다. 증거로 채택되면 재판기록에 첨부돼 영구 보존되고 열람이 가능합니다. 아마 재판부로서는 이 점을 우려했던 것 같습니다』
[Q] :「김대중 출생비밀」에 대한 탐사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동교동에서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 작업의 결과를 혼자만의 비밀로 영원히 간직할 것인지, 아니면 김대통령에게 직언하여 뒤늦게라도 진실을 밝히도록 할 것인지 하는 문제로 고민하던 끝에 목포에 거주하던 하의도 출신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김해 김씨 문중 사람 중에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중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가 김대중씨는 제갈씨라고 하는 말에 격분해 그 친구와 대판 싸움을 벌였고, 그 뒤 동네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것을 알고 어른들께 사실대로 바로잡자고 건의했다가 야단맞은 일도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그러더군요.
「이 문제는 본인과 무관한 부모 책임이다. 따라서 김대중씨 스스로, 우리 어머니는 참 불행했고 나도 불행했다라고 국민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야 한다. 어쩌면 귀싸대기를 맞을 수도 있겠지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많은 내용을 알고 있는 당신이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당초의 목적은 실체에 접근할수록 본 궤도를 벗어나 버렸습니다. 해답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해답을 안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그냥 돌아갈 뿐 멈출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갈등 끝에 저는 김대통령의 큰아들 김홍일씨를 만났습니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씨가 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난 이후입니다. 동갑이고, 대전형무소 감방 동기였던 그에게 제가 조사한 얘기, 들었던 얘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김대중 선생은 대통령이 되어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어머니는 불행한 분이다. 때문에 나의 소년기도 외로웠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야망과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정도는 밝히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저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냉담이었습니다. 동교동 측근들을 만날 수 없었고, 다시는 동교동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동교동의 장벽은 참으로 높았습니다』
김대중만이 풀 수 있는 새끼 꼬기
당시의 심정을 孫씨는 녹취록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나도는 김대중씨와 관련된 해괴망측한 소리들의 진원지가 하의도였다니. 내가 그렇게도 궁금해 왔던 김대중 선생의 실체가 하나씩 들춰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참담했다. 전두환, 김종필 등 김대중 선생의 정적들에게 『당신들은 거짓말쟁이오』라고 외치고 싶었던 내 생각들이 점점 스스로 자멸하고 있는 게 아닌지 나는 두려웠다.
역사를 밝히고, 올바른 인물사 추적을 위하여 소리 없는 투쟁가처럼 과연 나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 내가 출생의 비밀을 밝혀 낸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더 이상 추적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있다면 그 답은 김대중 선생 본인만이 갖고 있을 것이다. 김대중 선생이 답을 한다고 해서, 아니 답을 안 한다 하더라도 어쩌란 말인가.
선생이 해야 할 일은 이제라도 호적 정리를 하는 것이다. 호적정리를 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잘못 각인돼 있는 「김대중」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 누가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김대중 선생 본인만이 풀 수 있는 「새끼꼬기」가 아닌가.
이 탐사작업을 하면서 때로는 봉변도 당했고, 기관원들이 눈치를 챌까 봐 긴장되고 두렵기도 하였다. 직장도 없는 상태에서 몇 년 동안 돈벌이도 되지 않은 일에 매달린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나를 고달프게 했다. 하루 여덟 시간 노동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집사람 볼 낯도 없었고, 점차 쇠약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김대중 선생에 대한 나의 애정을 식혀 버렸다.
이 탐사작업을 통해 손씨는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인생 후반기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Q]: 김대중 대통령이 김씨가 아니고 제갈씨란 사실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길소식지에 실렸습니다. 그 기사는 직접 쓴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썼어요. 한길연구회 간사장 겸 한길소식지 편집인이었던 저도 원고를 보지 못했습니다』
[Q] : 검찰 조사를 몇 번이나 받았습니까.
『7개월 동안 열여덟번 검찰에 불려 나갔습니다. 조사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했는지는 몰라도 주로 야간에 출두하라고 했어요. 담당 검사가 김해 김씨였는데, 제가 조사한 김대중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소상히 이야기하니까 놀라더군요. 담당 검사는 출생의 실체를 다 알 것입니다. 그러나 제 진술을 듣기만 할 뿐 조서에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검사는 저보고 「조사만 하지 기소하지는 않겠다」고 하더니 기소 만기일인 1998년 6월18일에 저를 기소했습니다』
1심 첫 재판은 1998년 7월14일 오후 4시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밤 8시에 열렸다. 다른 재판이 다 끝난 뒤였다. 서울형사지법 319호 법정의 방청객은 孫씨의 친구인 이경식씨와 조복형씨가 유일했다. 이날 재판에서 손씨는 冒頭(모두) 발언을 통해 재판장과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재판은 누구를 위한 재판입니까. 이 재판이 대통령의 통치에 보탬이 됩니까. 입에 담기조차 조심스러운 현직 대통령의 출생과 관련된 재판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불경스럽기 때문에 재판을 취소해 주십시오』
재판이 시작되자 김홍일 의원의 측근이며 손씨도 잘 아는 현역 국민회의 의원이 손씨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돈과 자리를 제의하며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Q] : 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해외 대사관에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까 국내를 떠나라고 해요. 돈도 10억인가 20억을 준다고 했어요. 제가 그랬어요. 명예훼손 사건이니까 소부터 취하해 달라고요. 세 번인가 찾아왔는데 소 취하를 안 하니까 계속 재판을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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