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출생 비밀 추적에 관하여 손창식와의 인터뷰 - 월간조선 [3]
세 개의 녹음기를 준비하다
[Q] : 어떤 방식으로 탐사를 하였습니까.
『낚시꾼 차림으로 변복하여 김대중씨 출생지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와 그 인근 섬인 상태도·하태도·장병도·옥도 등지를 찾아가 그곳에 사는 촌로들의 말을 녹음하였습니다』
[Q] : 그 사람들이 쉽게 입을 열었습니까.
『보통 경계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기 몇 년 전에 젊은 사람 하나가 면사무소에 찾아와 김대중씨 호적을 떼려다 뺨까지 맞았고, 객지 사람들에게는 김대중씨 얘기를 하지 말자는 동네 회의까지 있었다고 합디다. 김대중씨 호적서류를 떼기 위해 하의면사무소 직원을 인근 다방으로 불러내어 차 한잔을 사주고 부탁하다가 저 역시 면박만 당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하의도에서 맨 처음 만난 사람은 김대중씨의 하의보통학교 동창생이었습니다. 그는 김대중씨의 어릴 적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정도만 이야기했고, 제가 「그 윤성만이가 오늘날 그 유명한 김대중 선생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언제였습니까」라고 묻자, 그때부터 입을 다물고는 가버렸습니다.
그 노인을 통해 알게 된 다른 동창생을 찾아갔더니 김대중씨와 관련된 질문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보고 『당신, 中情(중앙정보부) 사람 아니냐』고 따지 듯이 묻다가, 제가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어느 신문사 기자냐』고 물었습니다. 이 노인을 통해 얻은 유일한 수확은 김대중씨가 1923년생 돼지띠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탐사작업은 동네 사람들의 경계심으로 소득 없이 끝났지만, 목포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만난 장사꾼들로부터 하의도 일대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의도 인근 섬에서부터 서서히 시작해 실체에 접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Q] : 녹음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소형 녹음기 한 개로는 준비 부족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문부터는 녹음기 세 개를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상의 윗주머니에 넣고, 또 하나는 소형 라디오 속에 숨기고 나머지 한 개는 舊形(구형) 핸드폰처럼 개조했어요. 시험을 해보니 한두 개는 항상 녹음이 되었습니다』
김대중 생모의 첫 남편은 제갈성조
[Q] : 출생의 내막을 개략적으로 설명해 주시지요.
『金大中 대통령의 생모는 張鹵島(장노도·나중에 장수금으로 개명)라는 분인데, 1893년 전남 신안군 하의면 오림리에서 장지숙의 장녀로 태어나 197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호적에 따르면 그분은 열여덟 살이 되던 1911년에 하의면 大里(대리)에 살던 諸葛成祚(제갈성조)라는 사람과 혼인을 하는데, 이 남편이 요절하였습니다.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 제갈성조의 호적 서류가 법원과 면사무소 양쪽에서 모두 폐기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를 기록하는 호적 서류는 그 중요성 때문에 행정부(본적지 관할 면사무소)와 사법부(본적지 관할 법원) 양쪽에서 영구 보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장로도가 제갈성조와 혼인했다는 사실은 하의면 사무소에 보관 중인 제갈성조 부친의 제적부에 남아 있습니다.
호적은 맨 첫 장에 호주 이름이 나오고 이어서 출생순서에 따른 자식들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제갈성조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제갈성조 부친 호적에는 제갈성조 형과 관련된 기록은 남아 있지만, 묘하게도 제갈성조 부분만 毁棄(훼기: 특정 페이지가 사라지고 없음)돼 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제갈성조 부분만 찢어 버린 것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몰라도 장로도가 제갈성조의 처고, 제갈성조가 죽은 뒤 장로도가 그의 부친 장지숙 호적에 재입적되었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왼쪽 사진 참조).
이를 근거로 하여 저는 하의면을 관할하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에서 보관 중인 제갈성조 부친의 호적 원부 및 除籍(제적) 원부에 대해 「인증 등본」을 신청하였습니다. 「인증 등본」은 법원에 보관 중인 서류가 관에서 인증하는 절차를 거쳐 발급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신청에 대해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제갈성조에 대한 서류가 폐기되었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 어머니의 호적상 첫 남편 호적서류가 법원에서는 폐기해 버렸고, 면사무소에는 부친 제적부에 일부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결혼과 함께 부모 호적에서 제적된 장로도가 1925년에 아버지 장지숙 호적에 재입적되었다는 점입니다. 1925년이라면 김대중 대통령의 출생과 맞물립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호적에 의하면, 그는 외할아버지 장지숙에 의해 檀紀(단기) 4257년(서기 1924년) 출생신고가 되었습니다. 출생신고를 외할아버지가 했다는 것은 부친의 존재가 호적에 이름을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김대통령은 생모 장로도가 1960년에 김운식과 혼인하면서 김운식의 「嫡出子(적출자)」가 되었습니다. 1960년이라면 장로도의 나이 쉰일곱일 때의 일입니다.
스물여덟 명의 증언을 비밀 녹음
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제갈성조는 결혼하고 몇 년 후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여자는 出嫁外人(출가외인)이라 하여 시집을 가게 되면, 남편이 죽더라도 시댁의 귀신이 되는 게 옛날 풍습입니다. 김대통령의 어머니도 남편 사망 후 계속 시댁에서 살았는데, 시숙(남편의 형)이 한 분 있었습니다. 이 시숙이 울타리 하나를 담장으로 하여 제수와 나란히 살면서 홀몸이 된 제수를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제갈성조 사망 후에서 시작해 장로도가 친정 호적에 재입적되는 1925년까지가 김대중 대통령의 출생을 둘러싼 미궁의 세월입니다. 김대통령의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김대통령 문중 사람에 따르면 金대통령은 돼지띠(1923년생)라고 합니다. 김대통령 본인도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돼지띠인 내가 뱀띠인 박정희 후보를 잡아먹을 수 있다」며 돼지띠라고 말했습니다.
김대통령 호적을 보면 알겠지만, 기재 내용을 정정하는 도장이 무려 아홉 개나 찍혀 있는데, 이것만 봐도 출생 내막이 복잡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왼쪽 사진 참조).
하의도 일대 촌로들에 따르면 김대통령이 출생하기 얼마 전에 장로도는 시댁에서 멀리 떨어진 후광리에서 소금장사들을 상대로 주막집을 차렸답니다. 이 주막집에서 金대통령이 출생했습니다. 하의도에 지어 놓은 김대통령의 생가가 이 주막집입니다.
주막집 시절에 김 전 대통령의 어머니는 윤모씨와 상당 기간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김대통령의 어릴 때 이름이 윤성만이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김대통령 어머니는 윤모씨와 살 때, 주막집에 드나들던 하의도 부자 김운식을 알게 되었고, 김운식이 마련해 준 집에서 살다가 1960년에 김운식과 정식 혼인신고를 합니다. 김운식은 김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입니다.
김운식에게는 본처가 있었습니다. 본처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대본(호적상 이름은 대본인데, 비석에는 대봉이라 적혀 있고 동네에서도 대봉이라고 불렀음)씨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신고된 사실을 알고, 金大中씨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치면서 동네가 시끄러워지고, 동네 사람들이 출생의 내막을 알게 됩니다.
저는 金대통령의 생모 장로도 집안 사람과 장로도의 「호적상 첫 남편」 제갈성조네 사람들, 그리고 김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김운식 문중 사람들과 장로도와 일시 동거했던 윤모씨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1950년, 60년대에 하의도 면사무소 호적계에 근무했던 직원들도 접촉했습니다. 이 가운데 스물여덟 명의 말을 비밀 녹음했습니다』
김대중을 죽이려한 그의 이복 형
[Q] : 김대통령의 생모와 일시 동거했던 윤모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몇 년 전에 세상을 떴는데, 가정적으로 참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처복도 없고, 아들복도 없었습니다. 아내를 얻기만 하면 딸만 낳고 죽어 버려 세 번 결혼에 딸이 여섯이나 되었답니다. 그런 형편이었던 터라 주막집 여주인 장로도가 아들을 낳자, 윤성만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겁니다』
김대통령 호적에는 윤모씨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요.
『친척분 말은, 그때 윤모씨에게는 장성한 딸들이 있었답니다. 딸들은 바람기 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다고 합니다. 「이 아들이 과연 아버지 자식이 맞느냐」고 따지기도 했다는 거지요. 또 하나 이유는 윤모씨의 벌이가 시원찮아 주막집 아낙 장씨와 싸움이 잦았다고 합니다. 자식들 공부도 못 시키고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던 중 김운식 영감이 나타난 것입니다. 윤모씨 딸들은, 자기 아버지가 김대중씨를 호적에도 못 올려 주고 학교에도 못 보내 준 게 두고두고 죄라고 합니다. 그 바람에 윤씨니, 김씨니, 제갈씨니 하며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Q] : 김운식씨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의 큰아들 대본씨와 친구라는 사람에 의하면, 돈 많고 술 좋아하고 노래 잘하고 잘 놀았던 멋쟁이라고 합니다. 김운식 어른이 주막집을 드나들면서 윤모씨가 꼼짝을 못했다고 합니다. 김운식 어른이 매일 주막을 차지하고 앉아서 술 먹고, 자고 가기도 하니까 누가 술집에 옵니까. 그래서 장씨는 술집을 그만두고 김운식 어른이 차려준 세 칸짜리 집에서 김대중씨 형제들을 키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김대중씨 어머니를 위해 목포에 여인숙을 차려준 분이 김운식 어른입니다』
[Q] : 김운식씨 부인에게는 기분 나쁜 일이었을 텐데요.
『남편이 저지른 일인데 어쩔 수 없이 큰집, 작은집하며 살았답니다』
[Q] : 김운식씨의 큰아들과 김대통령의 사이는 어땠습니까.
『어릴 때는 나쁘고 좋고 할 게 없었는데, 김운식 노인이 1960년에 본처와 이혼하고 장로도와 혼인신고한 사실을 면사무소 직원으로부터 전해듣고는 그때부터 김대중씨를 죽이려고 했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고, 집에 불을 지른다고 고함치면서 자기 아버지까지 때려, 동네 사람들이 말리느라고 난리였답니다.
대본씨는 식칼을 들고 몇 차례나 목포에 있던 김대중씨를 쫓아갔답니다. 그럴 때마다 김대중씨는 목포 선창가에 지프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형을 술집으로 데리고 가, 술을 사주었답니다. 대본씨는 목포 여관에서 며칠씩 머물다 동생이 돈을 듬뿍 주면 그제서야 하의도에 내려가, 낮부터 저녁까지 허구한 날 술만 먹었답니다. 그러니 그 집이 온전할 리가 없지요. 몇 해 못 가서 대본씨는 술병이 나서 어머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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