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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출생 비밀 추적에 관하여 손창식와의 인터뷰 - 월간조선 [5]

2009-08-17 2356
월간조선

혼자서 재판 준비


[Q] : 재판을 받는 심정이 어땠습니까.

『첫 재판 기일을 통고받은 뒤, 이틀인가 사흘일인가를 아무 생각 없이 잠만 잤어요. 변호사도 없이 재판하는 놈이 잠만 자니까 친구들은 저를 속이 없는 사람으로 봤을 거에요. 그러나 저는 원칙대로 살아왔으니까 꿀릴 게 없었어요』


[Q] : 변호사는 누구였습니까.

『세상 인심이라는 것이 참 웃기더라고요. 25년을 야당생활하면서 제가 주로 맡은 분야가 인권입니다. 구속된 운동권 학생들과 야당 당원들의 변호사 선임이 인권국장인 저의 일이었으니까 세칭 인권 변호사라는 사람들을 많이 압니다. 그분들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더니 노골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맡지 않았으면 하는 낌새더라고요. 대통령과 관련된 사안이니까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Q] : 수임료를 못 받을 것 같아서 거절한 것 아니겠습니까.

『돈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피하는 거예요. 무지하게 서럽더라고요. 혼자서 재판 준비를 했습니다. 법대 출신인 이경식 선배로부터 법률적인 도움을 받았고, 남산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았습니다』


[Q] : 법정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오후 4시에 시작한다고 하고는 밤 10시에 개정하는 재판은 처음 보았습니다. 재판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까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못 먹고 법정에서 기다렸지요. 오후 7시나 8시쯤 재판이 시작돼 끝나고 나오면 컴컴했어요. 텅 빈 법정에서 재판부하고 검사하고 나하고 셋이서 재판을 했으니까요』


[Q] : 증인 신청도 했습니까.

『김종필씨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증인으로 신청했지요. 「윤대중은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붙었던 김해 김씨 문중 제사에서 초헌관이 김종필씨였기 때문이고, 전두환씨는 김대중씨에 대해 「대통령은 고사하고 자기 성씨나 찾도록 하라」는 발언을 했기 때문인데, 재판부가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Q] : 재판장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1심 재판장이 대구 분이었어요. 대구는 신성무역 다닐 때 살았던 곳이라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는 뎁니다. 재판장한테 호의를 가졌고, 재판장도 저한테 호의적이었습니다. 1심 때는 김홍일 측 사람이 저를 찾아오고 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정을 재판장에게 얘기했더니 만나보고 나서 재판하자며 재판 날짜를 계속 연기해 주었습니다. 재판장도 화해를 원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홉 번째 재판을 하는데 시작하기 전부터 재판장 얼굴이 상기돼 있더라고요. 그러더니 선고를 하는 겁니다. 그 후 재판장은 법복을 벗었습니다』


[Q] : 항소심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1심과 똑같았습니다. 제가 신청한 증인들과 제가 제출한 증거들을 재판부는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審理(심리) 미진과 採證(채증) 법칙 위반 등을 이유로 상고했는데, 대법원에서 역시 기각했습니다. 제 사건은 1999년 10월26일 종결되었습니다』


[Q] : 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대중 정부가 왜 저를 기소했는지 지금도 의문입니다. 이 재판은 불행의 씨앗을 남겨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제 친구나 친척, 심지어 제 아내에게도 김대중씨 출생 비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씨 본인이 직접 말하기 전에는 제가 들었던 얘기들을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을 했습니다.

제 녹음 테이프가 공개될 경우, 증언자들에게 미칠 김대중씨 측의 협박, 공갈도 두려웠지만 제 질문에 순수하게 대답해 준 하의도 주민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가 녹음하는 줄도 모르고 투박하게 응해 준 그들의 눈망울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증언자들뿐 아니라 하의도에서 터를 박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2세나 3세, 4세에 미칠 파장이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판으로 인해, 제가 했던 일은 제 뜻과 다르게 공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숨길 게 없습니다. 저에게 유죄를 선고한 이 재판은 제 개인에게도 불행이지만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불행입니다』


[Q] : 생활은 어떻게 꾸려 나갔습니까.

『김영삼 정부 시절에 광주사태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이 나왔습니다.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던 저도 몇 천만원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살았습니다』


하의도를 찾아 가다

2001년 여름, 기자는 손창식씨의 탐사 작업을 검증하기 그와 함께 하의도를 찾은 적이 있다. 김대통령의 「호적상 아버지」 김운식이 살았던 집은 대리마을에 그대로 있었다. 김운식은 문중의 종손이었지만 처가 두 사람인 관계로 문중 묘소에 묻히지 못하고 집 뒤의 산에 묻혔다. 김운식 묘를 바라보고 왼쪽에 그의 본부인 김순례 묘가 있고, 그 오른쪽에 장로도의 가묘가 있었다.

김운식-김순례 묘는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으나 김운식-장로도 묘 사이는 그보다 훨씬 간격이 넓었다.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리다 죽으면 첩의 경우엔 본부인보다 묘 사이의 간격을 더 두는 게 옛날 풍습이다.

김운식 묘는 破墓(파묘)가 되어 봉분은 있지만 유골은 없었다. 유골은 1997년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다. 金대통령은 용인 묘소에 김운식-장로도만 合葬(합장)하고, 김운식의 본처 김순례 묘는 고향에 그대로 두었다.

김운식 묘소 바로 위에 김대통령의 배다른 형 김대본 묘가 홀로 있었다. 묘 앞에는 비가 서 있는데 앞에는 「金海 金公 大奉之墓」(김해 김공 대봉 지묘)라 쓰여 있고, 뒤에는 「弟 大中 追慕 奉立」(제 대중 추모 봉립)이라 새겨져 있다. 동생이 형을 추모해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묘 곁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손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출생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사람의 입을 막고, 호적서류 일부를 없애고, 관련자들을 핍박했으니 정치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저는 지혜롭거나, 요령 있게 살지를 않았습니다. 적당하게 하는 식으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사는 방식이 서툴렀는지는 몰라도 미련이나 후회는 없습니다』

손창식씨는 광주 5·18 묘역에 묻혔다. 기자는 유족의 요청에 따라 그의 비문을 썼다.

<30대의 그는 기업인이었고, 40대의 그는 민주화 투사였다. 그는 부귀와 영화 대신에 신념을 위해 살았다. 고인의 진지한 삶에 대하여 많은 민주화 동지들은 경의를 표한다>


- 끝 -

source : 130000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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