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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출생 비밀 추적에 관하여 손창식와의 인터뷰 - 월간조선 [1]

2009-08-17 2156
월간조선

월간조선 2005년 1월호 기사

사인은 심장마비

2004년 11월25일 오후 1시30분쯤, 서울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뒤쪽 길에서 지나가던 한 남자가 갑자기 쓰러졌다.

남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길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한 행인이 급히 119에 신고했다.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 강북삼성병원 응급실로 후송된 이 남자는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사망 시각은 오후 3시20분.

망자의 이름은 孫昌植(손창식·56)

「자유 언론수호 국민포럼」 전 사무총장이다. 그는 모처럼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 나왔다가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하직했다. 망자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은 아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이른바 「동교동 가신」들 사이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그가 1988년부터 10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출생 비밀을 몰래 추적해 그 실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 놓았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이뤄지던 그의 추적 작업은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한길연구회」란 단체가 기관지 한길소식지에 「김대중씨는 김해 김씨가 아니고 제갈씨다」라고 보도함으로써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이 일로 당시 한길연구회 간사장이었던 그는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후보 측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손창식씨를 만났다.

10년 동안, 긴장과 불안 속에서 비밀 探査(탐사)작업을 하고, 그 후 1년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손씨는 건강을 크게 해친 상태였다. 과중한 스트레스가 심장병을 일으켜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조금만 걸으면 숨이 차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생활도 말이 아니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5만원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다가 이 아파트가 철거대상이 되자, 좀 더 허름한 서울 시내 모처에서 살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추적작업은 계속되었다. 그의 추적작업을 검증하기 위해 기자는 2001년 여름, 그와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 일대를 둘러보기도 했다.

50대 후반의 나이에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추적작업을 책으로 출간하는 것이 손씨의 숙원이었다.
한 인간의 家系(가계)를 폭로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모든 사람들의 가계를 조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가 10년의 세월을 바쳐 왔던 비밀 탐사작업의 종착역은 국민들에게 지도자감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객사했다.

다음의 글은 기자가 생전의 孫씨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목포상고 시절 부터 최근의 전 김대중 대통령 모습


『김대중 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리려고 시작했다』

[Q] : 김대중 대통령의 출생 내막을 추적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충복 金載圭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逝去(서거)함으로써 민주화를 위한 바람이 거세게 일던, 이른바 1980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저는, 제가 존경하는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10일자 신문을 보면서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날짜 조선일보, 동아일보, 대구매일신문 등 3개 신문의 정치면에 「김대중씨는 김해 김씨가 아니라 윤씨라는 주장이 김해 김씨 문중 제사에서 거론되었다」는 기사가 실린 것입니다. 선생님이 김해 김씨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윤씨」라니요. 선생님에게 대통령이 될 찬스가 오니까, 경상도 사람들이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별의별 음해를 다 가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명을 바쳐서 선생님의 명예를 회복해 드려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손씨는 문제의 기사를 보여 주었다. 기사 내용은 이랬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金庾信(김유신) 장군을 위한 제사인 금산제가 1980년 5월9일 경주 인근인 興武王陵 (흥무왕릉·김유신 장군묘)에서 열렸다.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初獻官 (초헌관: 제사에서 첫 술을 따르는 사람)으로 금빛 모자에 남빛 도포의 朝服冠帶 (조복관대) 차림이었으며, 김대중씨는 일반 祭官(제관)으로서 검은색의 제복을 입었다. (중략)

이날 아침 대제가 열린 흥무왕릉 앞에는 「김대중」 아닌 「윤대중」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좌익들에게 맞아 죽은 아버지

기사를 읽고 나자 손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 고향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입니다. 김대중 선생의 고향인 하의도에서 뱃길로 한 시간 거리입니다. 한서린 전라도 사람으로서, 또 같은 섬마을 출신으로서 선생님의 누명을 벗겨드리는 일이야말로 저의 숙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누가 권해서가 아닙니다. 출생에 관한 흔적은 고향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녔던 학교, 어릴 적 친구, 동네 어른들이 다 증인입니다. 저는 이들이 말하는 내용을 녹음해서 있는 그대로를 공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손씨는 계속해서 말했다.

『성씨 문제는 김대중 선생의 정치 행보에서 아킬레스건입니다. 자기 성씨와 관련된 더러운 모함이 제기되면 본인이 직접 해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김대중 선생은 너무나 미온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는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적게 얻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간 그를 따르는 동지들에게 허탈감을 안겨 주는 사안이었습니다. 본인이 못한다면 그를 대신하여 그의 정적들에게 모함의 추잡스런 실체를 밝혀 줘야겠다는 것이 제 탐사 작업의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번째는 제 어머니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는 6·25 사변 중에 빨갱이들 손에 죽었습니다. 나이 마흔에 청상이 된 어머니는 저 하나를 보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김대중씨를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하던 저에게 「사상도 온전하지 않은 김대중이를 따라다니는 것은 무덤을 파는 격이니 제발 조심하라」고 신신 당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이 작업을 통해 김대중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모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 앞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손창식씨는 누나만 일곱인 집안의 외아들이다. 그의 아버지(손귀봉)는 일제 시대 때 일본에 건너갔다가 광복 직후에 귀국해서 뒤늦게 아들을 보았다. 손씨 아버지는 손씨가 태어난 지 2년 후, 6·25 혼란기에 마흔여섯이란 젊은 나이로 지방 빨갱이들에게 타살되었다. 집안의 대를 이을 유일한 아들이 손씨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Q] : 부친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일본에서 철공장에 다니며 고물상을 했다고 합니다. 돈도 꽤 벌어 일본에 온, 완도 출신들에게 학비를 지원했다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도움받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귀국 후엔 면장, 군수 등 지역 유지들과 어울리며 지역 사회를 살리기 위해 주민 계몽운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Q] :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6·25 동란 때 저는 세 살이었기 때문에 사연을 알 수 없었습니다. 고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완도중학 2학년에 다닐 때, 하루는 만취한 외삼촌이 잠자는 저를 깨워 바닷가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외삼촌은 완도군에서 오랫동안 조선일보 지국장을 했던 분입니다. 외삼촌은 저를 보고 「네 아버지는 내가 죽였다」고 하면서 막 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내가 너한테 죽을 죄를 지었다」며 그냥 우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니까 저로서는 세상물정을 모를 때였죠. 궁금해서 호적을 살펴보았습니다. 호적에는 아버지가 1949년에 병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물으면 한숨만 쉬면서 「억울하게 당하지 말고 살아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말이 그 당시 제 가슴속에 늘 맴돌았습니다. 대학 입학 후, 누님으로부터 비참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범인들을 처형하면 더 많은 원수가 생긴다』

6·25 전쟁 중에 완도군을 점령한 지방 좌익들이 시골 사람들을 계몽하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손씨의 아버지를 잡아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는 동네 사람들로 하여금 죽창, 몽둥이 등으로 타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손씨 외삼촌 두 사람도 이 일에 가담했다고 한다. 끔찍한 이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 완도는 해방되었고, 손씨 아버지 살해에 가담했던 동네 주민 27명은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Q] : 체포된 사람들은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어머니의 恨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시 완도 경찰서장이 어머니 사촌 여동생의 남편이었습니다. 나중에 변호사까지 지낸 분이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를 업고 완도경찰서로 찾아가 그분에게 동네 사람들은 한 명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사정을 했답니다. 그것은 저 하나만은 꼭 살려야겠다는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완도경찰서장에게 이렇게 호소했다고 누님이 말해 줍디다.

「내 아들은 원수가 27명이다. 나라에서 이놈들을 전부 사형시키면 이들의 자식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는 이 어린 새끼 하나 키우며 살아야 하는데, 이놈들을 전부 죽이면 내 아들은 저들에게 딸린 수십 명의 자식들한테 원수가 된다. 이 아들 키우면서 절대 적을 만들지 않고 살 테니 저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말아 달라」

어머니의 이 호소로 동네 사람 27명은 무사히 살아났다고 합니다. 제가 일곱 살 때의 일로 기억이 선명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의 조그만 외길을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수염을 길게 기른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저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나이 어린 저를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참으로 의아스러웠습니다.

마을 노인들이 저를 보면 고개를 숙이고 다녔던 것도, 외삼촌이 어린 저를 붙들고 울었던 것도 다 제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비만 오면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 널려 있는 곡식부터 걷어 주고 자기 집 일은 나중에 할 정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런 좋은 일을 하고도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랑하거나, 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윗사람 노릇하기보다는 항상 아랫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고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후배나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베풀며 사는 것이 편하지, 가진 자의 것을 뺏거나 약한 자의 약점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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