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미스테리 - 30년마다 나라를 뒤흔든 4인의 큰 죽음 .. [1]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세상이 눈물과 비통함에 빠져 있을 때, 덕수궁에 시민들이 차려놓은 분향소를 찾는 수많은 조문객을 보며 자연스레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서거로 덕수궁에 집결했던 인파가 떠올랐습니다. 고종 황제가 1919년에 서거하셨고 그로부터 90년 후인 2009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는데, 저는 왜 우리의 역사는 그 고비마다 연도의 끝자리가 아홉수인 해에 '서거'라고 하는 큰 죽음의 격랑을 만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1949년 아홉수에 서거하셨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1979년 아홉수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들은 30년을 주기로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죽음들 모두 그 뒤 우리 역사를 크게 격동시키면서, 더욱 확장되고 깊어지는 역사의 한 걸음을 내딛게 하였으므로 오늘,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1919년 고종 황제 승하
고종 황제는 아시다시피 비운의 황제라 할만합니다. 500년 사직을 일본에 내주는 망국의 왕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동학농민운동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아관파천, 을미사변, 을사늑약, 경술국치 등 국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실들만 보아도 개화기의 그 숱한 혼란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겪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내인 명성황후를 일본인의 칼날 아래 보내야 했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일제의 무단통치 10년을 바라보며 살아야 했으니 참으로 슬픈 운명을 가진 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 고종 황제
칼을 차고 식민지 조선을 다스렸던 일제의 폭정 아래 신음하던 조선 민중에게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서거는 항거의 에너지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제의 미움을 받던 고종을 일제가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 울분이 더욱 고조되었으니, 드디어 고종의 서거가 도화선이 되어 기미독립만세운동(3·1 운동)의 뇌관을 터지게 하였고 만세 운동은 메마른 들판에 불길처럼 퍼져 나갔습니다.
기미만세운동은 당시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식민지 민중의 항거로는 처음으로 기록되면서 그 뒤에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비폭력투쟁 등 제3세계 민중의 저항 운동을 추동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1949년 김구 선생 서거
그러므로 고종의 서거는 우리 근대사를 격동시킨 큰 죽음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1949년, 해방 공간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합니다. 백범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7살에 동학의 접주가 되어 활동하였고, 농민 전쟁에도 참가하여 어린 시절부터 반외세 운동을 펼칩니다. 백범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고, 이후 임시정부의 주석을 역임하면서 일제 통치 기간 내내 강도 일제에 무력 투쟁을 전개합니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추동하였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고 하였지요.
▲ 백범 김구 선생
평생의 독립 투쟁으로 국민들의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백범은 해방 공간에서도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펼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통일 정부 구성을 위한 남북 협상을 주창하였습니다. 백범은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며 민족 분단의 현실에 단호히 맞서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가 쏜 총탄에 서거합니다.
7월 5일 국민장이 열리는 날,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전 국민이 오열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족통일을 갈망하다 쓰러진 백범 서거일로부터 일 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 한민족은 유례없이 참혹한 살육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백범의 죽음은 한국의 역사를 격동시킨 참으로 '큰 죽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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