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영토확장 = 땅이 국력…열심히 사고, 얻고, 빼앗았다
영미전쟁 이후 애국심 고양, 서부개척 거대한 물결 이뤄
멕시코와의 전쟁 이긴 후엔 텍사스·캘리포니아 수중에
미국은 대국이다. 군사력, 경제력이 커서 대국이고 땅이 커서 또한 대국이다.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는 러시아다. 2위는 캐나다, 그 다음이 미국이다. 하지만 얼어붙은 동토의 땅이 대부분인 러시아 캐나다와 달리 미국은 모두가 알짜배기 땅이다.
처음부터 그 넓은 땅, 그 좋은 땅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1776년 독립선언을 할 때는 대서양 연안 13개주에 불과했다. 1783년 독립전쟁 승리 후엔 오대호에서 애팔래치아 산맥 넘어 미시시피강까지 영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이후 미국은 사고, 뺏고, 얻으면서 불과 60여년 만에 건국 당시의 3배가 넘는 땅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 이면엔 빼앗기거나 잃은 자의 눈물과 울분, 후회와 회한이 있었다. 아메리칸 인디언, 멕시코, 스페인, 프랑스 등이 그들이다.
요즘 각국은 손바닥만한 작은 땅 뙈기를 놓고도 눈에 불을 켠다. 툭하면 벌어지는 영토분쟁이 그것이다. 초창기 미국은 그 많은 땅을 그저 줍다시피 했다. 전쟁으로 빼앗기도 했고 돈을 주고 사기도 했지만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 미국을 축복받은 나라라고 하는 이유도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국은 그 넓은 땅을 갖게 되었을까. 간단하게나마 과정을 더듬어 본다.
#. 루이지애나 매입
역사는 겹친 우연으로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미국이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얻게 된 것도 그랬다. 당시 프랑스 지배자 나폴레옹은 신대륙 루이지애나에 또 하나의 제국을 건설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카리브해 연안의 자국 식민지 산토도밍고(지금의 아이티)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 유럽 원정에도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했던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관리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맞수 영국은 호시탐탐 그 땅을 노렸다. 나폴레옹은 영국에 빼앗기느니 차라리 미국에 선심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그것도 모르고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기반으로 미국을 침략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다. 미국은 프랑스를 달래고, 당시 교역의 중심이던 뉴올리언스 일대를 매입하려는 의도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사절단 대표는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1831)였다. 훗날 5대 대통령이 되어 중남미를 미국의 영향권에 편입시킨 '먼로 독트린'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먼로는 먼저 프랑스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아예 루이지애나 전체를 사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먼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절단은 나폴레옹의 마음이 바뀔까 노심초사하며 서둘러 협상을 했다. 1803년 정식 매매계약이 체결됐다. 가격은 단돈 1500만 달러. 에이커당 2.8센트밖에 안 되는 헐값이었다. 제퍼슨 대통령은 한 달 반 뒤에야 루이지애나 매입 소식을 들었다. 제퍼슨은 영토 변경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였지만 굴러들어온 떡이 행여 잘못될까봐 의회의 비준 절차도 생략하고 매매계약서 승인부터 했다. 물론 의회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당연히.
미국은 하루 아침에 두 배나 영토가 늘었다. 막대한 국가적 부의 원천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강대국 도약의 기반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훗날 역사가들은 루이지애나 매입을 미국사에서 헌법 제정 다음으로 중요하게 꼽기도 한다.
#. 1812년 영국과의 전쟁
1800년대 미국은 안으로는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고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위신과 존재감을 높여가던 시기였다. 전쟁은 내부 갈등 봉합과 애국심 고양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다. 미국은 1861년 남북전쟁 말고도 외국과 3번의 큰 전쟁을 치렀다. 운도 따랐다. 결과적으로 내부 단합은 강화됐고 영토 또한 더욱 넓혀갈 수 있었다.
첫째는 영국 상대의 1812년 전쟁(War of 1812)이다. 그 무렵 영국은 유럽에서 프랑스와 교전 중이었다. 이를 위해 미국 상선 선원들을 강제로 징발했다. 그것 말고도 미국 땅에서 여전히 종주국 행세를 했다. 당시 제4대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26) 대통령은 이를 주권 침해로 간주하고 대영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아직도 국가 체제가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미국으로선 다시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한다는 것이 커다란 모험이자 시련이었다. 워싱턴 정가에선 각 주의 권한 강화를 주장하는 반연방파 때문에 대통령의 입지도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영국군은 총력으로 미국을 압박했다. 수도 워싱턴이 쑥대밭이 되고 국회의사당과 백악관도 불탔다. 미국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의미있는 승전고도 울렸다. 전쟁은 교착상태가 되었다. 협상이 시작되고 양국은 전쟁 전 상태로 원상복귀하기로 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미국도 영국도 별 소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미국은 아니었다. 사실상 '제2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자부심이 전국에 퍼져갔다. 민족주의, 애국주의도 크게 고양됐다. 전쟁을 수행한 대통령 매디슨의 인기도 덩달아 높아졌다. 맨해튼의 매디슨 스퀘어가든 같은 지명은 그의 이름을 기린 것이다.
영국과의 전쟁은 'The Star Spangled Banner'라는 미국 국가(國歌)도 유산으로 남겼다. 1814년, 메릴랜드의 맥헨리(McHenry) 요새는 영국군의 공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그런데 폐허의 포연 속에서도 미국 국기 하나가 아침 햇살에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우연히 그 광경을 본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라는 사람이 급히 수첩을 꺼내 시 한 편을 적어 내려갔다. Oh! Say can you see by the dawn's early light…로 시작하는 시였다. 지금 미국인들이 행사나 이벤트 때마다 부르는 국가의 가사다.
#. 탐험과 개척의 시대
루이지애나가 미국 땅으로 편입되고 영국과의 전쟁도 이겨내자 서부개척은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 됐다. 동시에 진취적 기상의 프런티어 정신은 미국의 정신이자 미국인이면 누구나 흠모하는 숭고한 가치가 됐다. 신호탄은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 1774~1809)와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1770~1838)가 이끄는 원정대였다.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제퍼슨 대통령은 일찍부터 미국의 미래상을 서부와 연관지어 생각하며 이들이 떠나기 전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등을 직접 가르치기까지 하며 탐험 성공을 독려했다.
1804년 5월, 40명의 대원들은 미주리강을 거슬러 오르며 서쪽으로 출발했다.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마침내 태평양까지 닿았다. 그리고 1806년 9월, 2년 4개월에 걸쳐 8000마일에 달하는 대장정을 끝내고 탐험대는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왔다.
그들은 미시시피 강 너머 알려지지 않았던 서부 세계에 대한 지형과 지도, 기후와 생태, 인디언 부족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가져왔다. 300여종의 새로운 동식물과 50여 인디언 부족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탐험대가 가져온 정보와 지식은 서부 개척 물결에 박차를 가했다. 뿐만 아니라 훗날 미국이 로키 산맥 너머 오리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유력한 근거가 됐다.
서부는 기회의 땅이었다. 동부의 미국인들은 낯설고 황량한, 그렇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서부로, 서부로 나아갔다. 모르몬교도와 유럽 각국에서 새로 들어온 이민자들, 골드러시를 좇아 일확천금의 꿈을 찾아 나선 사람들 각양각색이었다. 정부도 적극 지원했다. 약간의 돈만 내면 농장을 꾸릴 만한 훌륭한 땅을 충분히 구입할 수 있었다. 원하면 무료로 주기도 했다. 미국의 주도 순식간에 늘어났다. 일정수의 인구만 확보되면 어떤 지역이든 새로운 주로 승격시켜 연방에 편입시켰다.
#. 캘리포니아 병합
19세기 초만 해도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텍사스 등 서남부 대부분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 땅에 미국인들이 몰려들었다. 1820년대 이미 텍사스의 미국인은 2만을 넘고 있었다. 멕시코의 지배력은 먹히질 않았다.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1836년 멕시코 토벌대가 왔다. 텍사스 민병대는 알라모(Alamo)에서 맞서 싸웠지만 187명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텍사스인들은 "알라모를 잊지말자"며 더 맹렬히 싸웠다. 결국 샘 휴스턴 장군이 이끄는 민병대가 샌 하신토 전투에서 멕시코 군대를 물리쳤다. 텍사스는 독립을 선언하고 공화국(1836~1845)이 되었다. 텍사스 주민들은 독립 국가보다는 미국 연방이 되기를 더 원했다. 1845년, 텍사스는 28번째 주로 미국 연방이 됐다.
미국의 다음 목표는 캘리포니아였다. 1846년,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 유역의 작은 충돌을 빌미로 멕시코에 선전포고를 했다. 멕시코-미국전쟁(Mexican-American War)이 시작됐다. 미국은 개전과 동시에 눈독 들여왔던 캘리포니아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어 뉴멕시코 주도 샌타페를 점령하고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해갔다. 다급해진 멕시코는 평화협상을 요청했다. 사실상 항복이었다.
결국 1848년 과달루페이달고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제 리오그란데강 이북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는 미국 땅이 됐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다. 미국은 멕시코에게 전쟁 배상금 형식으로 1500만 달러를 지급했다. 멕시코가 미국에 진 빚 325만 달러도 탕감해주었다. 캘리포니아 병합은 형식상 매입이었지만 명백한 침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멕시코로선 땅을 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힘이 없었다. 그후로도 쭉 힘이 부쳤다. 자유의 땅이라지만 여전히 피해갈 수 없는 약육강식의 역사였다.
영토 확장 주요 연표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1500만 달러)
▶1818년: 영국과 캐나다 인접 국경 조정
▶1819년: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포함해 현재의 루이지애나와 미시시피, 콜로라도, 앨라배마주 일부 매입 (500만 달러)
▶1845년: 텍사스공화국 합병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Oregon Treaty). 영국에게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넘겨주는 대신 아이다호, 오리건, 워싱턴주 전 지역과 와이오밍과 몬태나 일부지역을 미국 영토로 확정.
▶1848년: 멕시코 전쟁 승리 후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 와이오밍 등을 넘겨받음.(1825만달러)
▶1853년: 남부 대륙횡단 철도 건설을 위해 리오그란데 부근 멕시코 땅 개즈던 지역 매입.(1000만 달러)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 매입(720만 달러)
▶1898년: 하와이 왕국 병합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의 지배권 넘겨받음.
source : 1300003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