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과 프리메이슨의 대결 .. [2]
'금원의 기사단', 이마에 산 뱀 얹고 선서해
'금원의 기사단'은 외과의사이자 작가였던 조지 비클리(George WL Bickley)에 의해 조직됐으며 신입단원은 이마 위에 산 뱀을 얹은 채 소름끼치는 선서를 해야만 하는 단체였다.
이 조직의 명칭은 쿠바를 중심으로 주변 3,900km에 이르는 거대한 원형 노예지 국가를 세우겠다는 비클리의 계획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국가가 미합중국의 남부, 멕시코, 중앙아메리카의 일부, 그리고 서인도제도를 아울러 전 세계의 담배, 설탕, 쌀, 커피의 공급을 장악한다는 내용이 그의 구상에 포함되었다. 1860 년에 이르러 이 기사단은 5만 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린 거대 단체가 되었다.
한편 샌안토니오에 본부를 차린 비클리는 "남부를 모략하는 월 스트리트의 은행가들을 처형하자"고 호소함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는 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노예제를 반대했던 링컨에 대해서도 "만일 그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면, 기사들이 달려갈 곳은 멕시코가 아니라 워싱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비클리는 "우리가 원하는 싸움을 어떻게 일으킬 것인가가 문제"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의 목표를 분명히 밝혔다. 이를 위해 기사단은 끊임없는 선전과 선전 활동을 벌여 북부와 남부 전역을 증오와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인 윌리엄 프릴링은 "1860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들은 최후의 도박을 하기로 모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의 전모를 링컨은 이미 1850년대 말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당시 링컨은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면서 표면적으로는 전쟁의 분위기로 몰고 가는 것이 노예문제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을 둘로 나누려는 공작임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는 단 한번도 미국의 독립 정신을 어기면서까지 정치적인 이득을 보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만일 그 독립 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나라를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저격당해 죽겠다."
1856년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에 입당한 링컨은 1858년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S. A. 더글러스와 7회에 걸친 공개토론을 하였는데, 그의 입장은 기존의 노예주(奴隸州)에는 간섭하지 않으나 준주(準州)에 대한 더 이상의 노예제 확대는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같은 해 주당대회(州黨大會)에서 노예제를 둘러싸고 분열하는 연방의 미래를 걱정하는 '분열한 집안은 설 수가 없다'는 연설을 했다.
링컨, 금원의 기사단 3만 명 투옥 조치
링컨은 이 선거에서 패배하기는 했어도 일약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고, 1860년 공화당은 그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여 북부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링컨의 당선을 남부 노예제에 대한 공격으로 본 남부 각주는 잇따라 연방으로부터 탈퇴하고, 1861년 2월 아메리카남부연합을 결성하였다.
링컨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타협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링컨은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구출하는 일이지 노예제를 구하는 것도 없애버리는 것도 아니다"라며 전쟁 초반의 경솔한 노예해방론을 엄금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1862년 9월 22일에 이르러 사령관의 권한으로 1863년 1월 1일을 기해 점령지역의 노예를 해방한다는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공포하였다.
이는 그의 지도력을 비판하기 시작한 북부를 결속시키는 동시에 영국이 아메리카남부연합을 승인하려는 움직임을 중지시킨 뛰어난 정치적 행동이었다.
그의 정치수완과 U. S. 그랜트*W. T. 셔먼*P. H. 셰리던 장군 등의 군사적 활약에 힘입어 1864년 링컨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865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링컨은 남북전쟁의 책임은 남북 양쪽에 있다고 말하고, "그 누구에 대해서도 악의를 품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는" 박애와 관용의 정신을 호소했다.
특히 연방 유지를 염원하는 그의 관심은 탈퇴한 남부 여러 주의 조기연방복귀를 위해 남부의 관대한 재건책을 준비하였고, 유권자의 과반수가 충성 서약을 하는 주에 대해서만 주정부 형성과 연방재가입을 받아들인다는 공화당 급진파의 엄격한 재건책인 '웨이드-데이비스법안'을 거부했다.
이와 함께 링컨은 남북전쟁기간 동안 중앙정부를 지극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금원의 기사단'의 단원 3만 명을 투옥시켰다.
'금원의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인 비클리는 1863년 인디아나 주에서 체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865년에 석방되었고, 1867년 볼티모어에서 사망했다.
역사학자인 그리핀(G. Edward Griffin)은 그의 저서인 'The Creature from Jekyll Island'에서 전쟁 후 '금원의 기사단'의 단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갔다가 나중에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으로 알려져 있는 KKK단으로 다시 등장했다고 말하고 있다.
링컨, 신앙심과 애국심으로 존경의 대상
한편 링컨은 1864년 재당선되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41일 만인 1865년 4월 14일 저녁 워싱턴 D. C.의 포드극장에서 관람 중 남부출신의 배우 부스(John Wilkes Booth)에게 저격당했다. 그리고 범인으로 체포된 8명 중 4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당초 이들의 계획은 링컨 대통령뿐만 아니라 존슨 부통령과 슈어드(William Seward)국무 장관까지도 포함된 것이었으나 이 두 사람에 대한 암살은 실패로 끝났다.
특히 링컨을 암살한 진범인 부스는 프리메이슨의 상층 조직인 유럽의 '일루미나티'(Illuminati Freemason)종단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던 인물이다.
실제로 그의 가방에서는 암호로 된 메시지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그 암호문에는 J. P. 벤자민(Judah P. Benjamin*1811~1884*유태인)이라는 이름이 씌어 있었다.
벤자민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미국에 보낸 요원으로,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전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했으며, 전쟁 중에는 남부 정부의 여러 요직을 맡기도 한 인물이었다.
현재 미국 내 프리메이슨 연구가들은 링컨의 암살은 남북전쟁을 통해 미국을 둘로 나눈 후 부(富)를 독점하려 했던 프리메이슨의 계획이 링컨 대통령에 의해 실패하자 이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한편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링컨은 암살로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그의 이름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이토록 오랫동안 링컨 대통령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태어났다"는 신실한 신앙심에 입각한 애국심과 바른 삶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늘 "열심히 배우고 부지런히 일해서 정직한 사랑을 나누어주는 것이 나의 인생철학"이라고 말했으며 이것을 행동으로 실천했던 믿음의 지도자였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