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 채우면 100년 가는 빌 게이츠의 고속증식로… 美·中 주도권 경쟁
안전성 획기적으로 향상된 꿈의 원자로 개발 경쟁
한 번 가동하면 최대 100년간 연료를 추가 공급하지 않아도 알아서 전기를 생산하는 획기적인 원자로가 개발되고 있다. 사람 손을 타지 않으니 안전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진다. 원전에서 나온 폐연료까지 연료로 쓰는 고속증식로(高速增殖爐)로이다. 세계 각국이 개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중국이 미국 기업과 시험용 원자로를 세우려 하자 미국 정부가 기술이전을 반대하는 등 개발 주도권을 두고 국가 간 신경전도 벌어지고 있다.
황일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면 태양광이나 풍력 등 재생에너지만으로는 부족하고 원전으로 화력발전을 상당 기간 대체해야 한다"며 "안전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고속증식로가 그 주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천연우라늄과 폐연료 태워 경제성 높아
지난 1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중국 무역 전쟁 여파로 빌 게이츠의 차세대 원자로 개발이 차질을 빚고 있다"고 보도했다. 빌 게이츠가 세운 에너지 기업 '테라파워'는 2015년부터 중국 국영 원전 기업인 핵공업집단(CNNC)과 진행파 원자로(TWR·Traveling Wave Reactor) 개발을 진행했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원전 기술이 중국에서 군사 목적에 사용되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증을 요구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가 차세대 원전 기술의 주도권이 중국으로 가는 것을 막으려 한다고 본다.
두 회사는 올해 중국 창저우에 1조원 이상을 투자해 시험용 TWR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TWR은 액체 나트륨(소듐)을 냉각재로 쓰는 고속증식로이다. 시가 담배가 천천히 타듯 원자로에서 연료 다발을 따라 핵분열 반응이 천천히 진행돼 '진행파 원자로'라고도 한다. 테라파워는 "핵무기 원료를 만들지도 않고 후쿠시마 원전처럼 원자로가 녹아내릴 염려도 없는 차세대 원자로"라고 밝혔다.
국내외에서 많이 쓰이는 원자로는 경수로(輕水爐)다. 핵분열이 지나치지 않도록 물(냉각재)로 중성자 속도를 줄인다. 이런 저속 중성자는 우라늄 235만 핵분열시킬 수 있다. 우라늄 235는 천연 우라늄의 0.7%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비율을 높이는 농축이 필수적이다. 반면 고속증식로는 불쏘시개 역할을 할 일부 우라늄 235를 빼면 대부분 그동안 쓰지 않던 우라늄 238을 연료로 쓴다.
고속증식로는 물 대신 액체 금속을 냉각재로 쓴다. 중성자는 액체 금속에서는 속도가 줄지 않는다. 이런 '고속' 중성자가 우라늄 238을 때리면 핵분열이 가능한 플루토늄 239가 나온다. 바로 '증식' 과정이다. 원전의 폐연료에도 우라늄 238과 플루토늄 239가 있다. 이것도 태울 수 있다. 특히 플루토늄 239는 순수 분리하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데 이걸 다 태워버리니 핵무기 확산 방지 효과도 있다. 폐연료를 태워버리니 방사성 폐기물도 그만큼 줄어든다.
◇액체 금속 냉각재로 안전성 높여
고속증식로는 안전성이 가장 큰 장점이다. 나트륨은 물보다 열전도(熱傳導) 효율이 130배나 된다. 덕분에 원자로가 멈추면 금방 식는다. 후쿠시마 사고처럼 원자로에 남은 열 때문에 원자로가 녹아내릴 우려가 없다. 또 기존 원자로는 물의 열전달 효율을 높이려고 150기압에서 작동하지만 고속증식로는 1기압에서 작동한다. 압력에 무리가 없으니 더 안전해진다.
테라파워의 TWR은 연료 굵기가 5~6㎜다. 국내 원전은 1㎝ 정도다. 그래서 연료봉이라 하지 않고 연료핀이라고 한다. 얇아서 냉각이 쉬울 뿐 아니라 원자로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면 핀이 팽창해 연료 밀도가 낮아진다. 자연 중성자와 충돌할 가능성도 급감해 스스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고속증식로는 1958년 구소련 과학자가 핵무기 확산을 막기 위해 원자로의 폐연료를 다시 태울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했다. 당시에는 우라늄이 풍부하고 아직 폐연료 처리 문제도 심각하지 않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전의 발전 효율과 함께 안전성과 폐기물 처리, 핵무기 전용 차단 등이 갈수록 중요해지면서 2001년부터 미국·프랑스·한국 등 세계 13개국이 나트륨 냉각 고속증식로 중심의 4세대 원자로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상용화 속도는 2006년 설립된 테라파워가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脫원전에 막힌 국내 고속증식로… 연료 쓰는 연구 단계서 제자리걸음
빌 게이츠의 테라파워는 한국과도 고속증식로 공동개발을 추진했다. 빌 게이츠는 2012년 8월 당시 장순흥 한국원자력학회장(KAIST 교수) 등 국내 원자력계 대표단을 미국 시애틀 본사에서 만나 나트륨 냉각 고속증식로(SFR) 개발 협력에 합의했다. 이듬해엔 방한해 박근혜 대통령과 면담했다.
테라파워와의 협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순흥 교수는 "게이츠 회장은 고속증식로 건설까지 같이하자고 제안했다"며 "우리는 일단 설계하면서 실험을 통해 효과를 입증한 뒤 고려하겠다고 해 2013년 말 협력이 무산됐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독자적으로 고속증식로를 개발해왔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폐연료 재활용 기술인 파이로프로세싱과 연계해 SFR 개발 계획을 20년 동안 추진했다. 파이로프로세싱은 원전 폐연료에서 아직 핵분열이 가능한 물질을 분리하는 기술이다. 고속로는 이를 연료로 쓴다.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 추진으로 이 연구도 위기에 처했지만, 지난해 전문가 재검토 과정을 통과해 당초 계획대로 2020년까지 미국 정부연구소, 대학과의 공동 연구·개발이 계속될 전망이다.
나트륨 대신 납·비스무트 합금을 냉각재로 쓰는 고속증식로도 있는데, 이 방식은 소형 원자로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에서 이를 연구하는 황일순 교수는 "개념 설계를 마치고 이제 실제 연료를 쓰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발이 묶였다"며 "러시아·중국 등 해외에서 공동 연구를 제안해 고민 중"이라고 했다.
☞고속증식로(高速增殖爐)
속도가 줄지 않은 '고속' 중성자를 이용해 천연 우라늄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핵분열을 일으키지 못하는 우라늄238을 핵분열 물질인 플루토늄으로 바꿔 핵연료를 '증식'하는 원자로. 원전 폐연료에 포함된 우라늄238과 플루토늄도 연료로 쓸 수 있다. 중성자를 고속으로 유지하기 위해 물보다 감속 효과가 작은 액체 금속을 냉각재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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