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zil

In Search of Knowledge, Wisdom and Truth

About Brazil - 지리, 역사

2019-02-03 1809
About Brazil

브라질 (Brazil)

몇 백 년 동안 브라질은 남미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많은 서구인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원시림과 열대 낙원으로의 도피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열정적인 축제에서 광대한 미지의 아마존까지 브라질은 신비로운 부분을 가진 나라이다

통계 자료

국명 : 브라질 연방 공화국 (Federative Republic of Brazil)
면적 : 8,511,965 sq km
인구 : 1억 5870만명
수도 : 브라질리아
인종 : 55 % 유럽인 후손, 38% 뮬라토, 6% 아프리카인 후손(1980년 인구조사 의거). 사실 이 수치는 브라질 내에서 사회적 지위가 균등해진 백인들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언어 : 포르투갈어 
종교 : 90%가 카톨릭교
정체 : 연방 공화제

지리 및 기후

브라질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나라로 남미 대륙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칠레와 에콰도르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과 모두 국경을 접하고 있다. 비록 아마존 같이 예전에는 인구 밀도가 희박한 지역들에 급속도로 거주지가 확산되고, 산림을 벌채하거나 자연이 고갈되고는 있지만 국토의 대부분은 아직도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다. 브라질은 지리학적으로 크게 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길고 좁은 대서양 해안 지역은 리오 그란데 도 술(Rio Grande do Sul)과 바이아(Bahia)사이의 연안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바이아 북쪽은 더 편평하다. 아마존 유역 남쪽내륙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넓은 고원지대- 플라날토 브라질레이로(Planalto Brasileiro)나 중앙 고원으로 불린다 -에는 몇몇 작은 산맥들이 툭툭 던져놓은 듯 위치해 있고 커다란 몇몇 강들이 이 지역을 갈라놓고 있다. 탁 트인 숲과 낮은 나무들 그리고 잡목 지역이 특징적인 파라과이 유역과 울창한 밀림의 아마존 유역은 남동부에 놓여있는 대표적인 두 저지대이다. 6275km에 달하는 아마존 강은 세계에서 가장 큰 강이며 아마존의 밀림은 세계에 남아 있는 숲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브라질의 동물군이 보여주는 풍부함과 다양성은 놀라운 것으로 영장류, 양서류, 식물에 있어서는 그 종의 수에 있어서 세계에서 첫 번째이며 조류에서는 세 번째, 나비와 파충류에서는 네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종들이 열대 우림의 감소와 북동부 지역의 사막화, 판타날(Pantanal)지역에서 벌어지는 밀렵, 그리고 연안지역의 오염 등으로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브라질은 계절에 따라 강우량, 기온, 습도 등이 눈에 뜨게 변화하지만 극단적으로 계절적 변화가 감지되는 곳은 브라질 남부뿐이다.

브라질의 겨울은 6월에서 8월로 가장 추운 남부 주들은 겨울 평균 기온이 13도에서 18도 사이를 오간다. 여름에(12월에서 2월) 리우(Rio)는 덥고 다습해서 기온이 30도까지 올라가며 다른 시기에는 25정도를 맴돈다. 북동부 연안 지역도 리우처럼 덥지만 습도가 덜하고 덜 답답하다. 일반적으로 고원은 덜 덥고 축축하며 여름에 강우량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아마존 유역은 브라질에서 가장 비가 많은 곳으로 다습하지만 기온은 평균 27도 정도로 적당하다.

역사

브라질 인디안은 잉카나 마야인들처럼 중앙 집권화 된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하여서 고고학자들이 연구할 만한 많은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 - 남은 것들이라고는 도기 몇 점과 패총, 해골들뿐이다. 인디안들은 상당히 다양하며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현재의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 대략 2백만에서 5백만 명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200,000명이 채 안 되는 인디안들이 대부분 브라질 내륙의 정글 오지에서 살고 있다. 1500년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은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표면상으로는 인디아를 향해 항해했으나 '우연히' 브라질 연안에 도착하게 되었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그가 의도한 목적지는 처음부터 브라질이었다고 말하는데 그의 '발견'이 굉장히 사무적으로 왕에게 보고된 것으로 보아 사실 벌써 브라질의 존재는 항해 선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1531년 포르투갈의 조앙(João) 3세는 브라질에 첫 정착민을 보냈고 1534년에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야심을 두려워하며 해안 지역을 열둘로 나누어 세습제의 통치직위를 왕실에 협력하는 자들에게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곧 이 땅이 사탕수수를 재배하는데 이상적인 토양과 기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인디안들을 노예화하여 필요한 막대한 노동력을 해결하였다. 노예의 포획과 매매는 브라질에서 가장 짭짤한 사업이 되었으며 인디안 여자와 포르투갈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사웅 파울루(São Paulo) 출신 사람들이 이 사업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내륙으로 인디안을 잡으러 들어가 16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페루의 안데스산맥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이러한 개척은 그 어떠한 조약보다도 남미 내륙의 광대한 영토를 포르투갈령 브라질의 영토로 확실히 보증하는 결과를 나았다. 17세기 동안에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인디안을 대신해 농장에서 일하였다. 이들 노예들은 유럽인이 가져온 질병에 더 잘 버텼지만 완강하게 노예 상태를 거부하였다. 도망친 노예들 집단인 낄롬보스는 식민지 시대에 일반적으로 퍼져있었다. 이들 집단은 숲에 숨어사는 작은 집단인 모깜보스에서 17세기 대부분을 통해 존재했던 팔마레스 공화국까지 다양하게 생겨났다. 1690년대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에서 금이 발견되어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브라질인과 포르투갈인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자 광산 채굴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없이 많은 노예들이 끌려와 죽음을 당했다. 1807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리스본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침공 이틀 전 포르투갈 왕자 헤젠트(Prince Regent)는 브라질로 항해를 떠났다.

도착하자 그는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를 포르투갈 왕국과 브라질, 그리고 알가르베(Algarve)의 수도로 정하였다. 이로써 브라질은 유일하게 신세계에서 유럽의 전제 군주가 거주하는 식민지가 되었다. 1822년 헤젠트 왕자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포르투갈로 돌아간 뒤 식민지를 지배하도록 남겨지자 칼을 뽑아 들고 '독립이 아니면 죽음(Independência ou morte!)'을 외치며 일어났다. 포르투갈왕은 너무 약해서 친애하는 아들과 싸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브라질은 피 한방을 흘리지 않고 독립 제국이 되었다. 19세기동안 브라질의 주요 수출품으로 커피가 설탕을 대신하였다. 처음에는 커피 통장에서 노예 인력을 이용했지만 1888년에 노예제도를 폐지하자 수천 명의 유럽 이민자들, 특히 파젠다스(fazendas)라고 불린 이탈리아인들이 커피 농장으로 유입되었다.

1889년 커피농장의 지주들에 의해 지원을 받은 군사혁명은 브라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후 40년 동안 브라질은 계속해서 군사정권이나 실제로는 군부에 의해 조정 당하는 문민 대통령에 의해 통치되었다. 1929년 전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커피 농장주들의 정부 영향력이 약화되자 국수주의 군부 장교들의 지원을 얻고 야당 자유연합이 형성되었다. 자유연합이 1930년 선거에서 패배하자 군부가 대신해서 정권을 장악하고 자유연합 지도자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를 대통령 자리에 앉혔다. 무솔리니와 살라자르(Salazar)의 파시스트 정부에 영향을 받은 바르가스 정권은 그가 1954년 축출당할 때까지 이후 30년간 정치무대를 주도하였다. 그의 후임인 주스셀리누 쿠비츠쉑(Juscelino Kubitschek)은 브라질의 엄청난 낭비가 중 첫 번째였다. 그는 의도대로라면 내륙 개발을 촉진시켰어야할 새로운 수도 브라질리아(Brasília) 건설에 착수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브라질 경제는 인플레이션에 허덕이게 되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새로운 수도의 건설에 대한 막대한 지출과 쿠바에서의 카스트로의 성공으로 공산주의에 침식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브라질의 충실하지 못한 민주주의는 다시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80년대 중반에 주로 국제 은행의 차관에 의해 지탱되던 브라질의 경제 기적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해 군부는 문민 정부에 정치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1989년 11월 브라질은 거의 30년만에 처음으로 국민 투표를 통해 대통령 선거를 치를 기회를 얻게 되었고 전 카라테 챔피언인 페르난도 콜로르 드 멜로(Fernando Collor de Mello)가 사회주의자 루이스 다 실바(Luiz da Silva)를 근소하지만 확실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콜로르는 부패를 척결하고 인플레이션을 감소시키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승리했지만 1992년 말, 한때 조지 부시로 하여금 인디아나 존스가 생각나게 한다고 말해지던 그 스스로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부 혐의로 기소되었다 - 그의 혐의는 브라질 경제에서 10억 달러가 넘는 금액을 뇌물로 착복하거나 부당 취득한 갱을 주도한 것이다. 부통령 이타마르 프랑코(Itamar Franco)가 콜로르의 사임에 의해 1992년 12월 대통령이 되었고 1994년 11월 페르난도 카르도소가 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취임했다카르도소는정권을 장악한 이후 상당히 인플레이션율을 줄였지만 이러한 업적도 1989-96년 사이에 200만개가 넘는 일자리가 줄어들고 농업개혁에 따른 문제들 -현재는 국가 안정에 관한 의제로 다뤄질 정도의 - 이 발생하면서 상쇄되었다. 1996년 UN 보고에 따르면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나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1998년 카르도소가 손쉽게 재선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source : aBWA1udhv1E

바로가기

세계탐험 오버랜드 새포스팅 사진영상 여행정보 세계역사 종교탐구 미국야기 기술생활 트 렌 드 음식조리 영어공부 에 세 이 친구이웃 자료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