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France - 지리, 기후, 역사
프랑스 (France)
장미 빛 인생과 까망 베르치즈, 보브와르와 드뷔시 그리고 에펠탑 등 몇 개만 대도 세계의 주목을 받는 프랑스이므로, 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나라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을 드러낸다 해서 누가 거기에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리바이스와 빅맥 햄버거집이 여기저기 눈에 띄어 문화순수주의를 비난하고 싶을지라도, 프로방스에서 1년을 지내던가 파리에서 1주일만 있어 보면 왜 대부분 외국여행자들이 시라노(Cyrano)거리들을 여유롭게 산책하거나 마네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잔디밭에서 피크닉 하기를 꿈꾸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쨌든 오랫동안 '낭만'의 상징인 되어 온 프랑스이므로, 파리에 있던지 피레네나 꼬뜨다쥐르를 여행하던지 혹은 유스호스텔에 있던지, 지나친 환상은 자제하고 기대치에 맞게, 삶의 기쁨을 찾아 여행하는 것을 염두에 두도록
통계 자료
국명 : 프랑스 공화국
면적 : 551,000 sq km (214,890 sq mi)
인구 : 5,830만 명
수도 : 파리(Paris-인구 1,300만 명)
인종 : 92% 프랑스인, 3% 북아프리카인, 2% 독일인, 1% 브르타뉴인, 2% 기타(프로방스, 카탈로니아, 바스크인 등)
언어 : 프랑스어 (플라망어, 알사스어, 브르타뉴어, 바스크어, 카탈로니아어, 프로망스어, 코르시카어 등)
종교 : 90% 로마카톨릭교, 2% 신교, 1% 이슬람교, 1% 유대교, 6% 사교
정체 : 민주주의
지리 및 기후
캘리포니아보다 약간 더 넓은 프랑스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유럽에서 넓은 나라이다. 영국해협이 북서쪽으로, 대서양은 서쪽으로 접해있으며, 남쪽으로는 피레네산맥을 건너 스페인이 있고, 코르시카를 포함한 지중해가 남동쪽으로, 동부알프스와 쥬라산맥이 스위스와 이탈리아에 뻗어있다.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평평한 프랑스의 북동쪽 국경은 독일과 룩셈부르크, 벨기에와 접하고 있다 .
1790년 프랑스는 약 6100sq km마다 데빠르뜨망(department)이라는 행정단위를 나누어 현재 96개의 데빠르뜨망이 있고 이 외 5개의 해외프랑스령이 있다. 해외 데빠르뜨망으로는, 카리브해의 과들루쁘(Guadeloupe)와 마르띠니끄(Martinique), 태평양 섬인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 타히티(Tahiti) 그리고 프렌치 폴리네시아(French Polynesia), 남미의 프렌치 기아나(French Guiana), 마다가스카르 동부 인도양에 있는 레위니옹(Reunion) 그리고 뉴펀들랜드(Newfoundland)남부 대서양에 있는 쌩 피에르(Saint Pierre)와 미클롱(Miquelon) 등이다. 프랑스 알프스지역인 4800m의 몽블랑은 유럽에서 최고봉이다.
프랑스 고대산맥 중 가장 장엄한 것은 마씨프 쌍트랄(Massif Central)로, 국토의 6분의 1을 차지할 정도의 방대한 프랑스 중부지역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으로는, 르와르강(Loire)으로 마씨프 쌍트랄에서 대서양까지 장장 1020km에 달한다. 이 외 수로역할을 하는 주요 강으로는, 쎄느강(Seine), 론강(Rhone), 갸론(Garonne)과 라인강(Rhine)이 있다. 3200km에 달하는 해안선이 노르망디의 백악절벽과 브르따뉴의 고지대에서부터 대서양을 따라 있는 해변가까지 뻗어 있다.
남동부 지중해연안은 자갈과 바위해변이 많으나, 랑그독(Languedoc)과 루시용(Roussillon)에 있는 해변에서는 낭만의 모래성도 쌓을 수 있다.여러 기후와 영토가 섞여 있어 프랑스에는 다양한 동식물종이 서식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농사기술과 도시계획화, 오염 등으로 종의 균형이 깨져, 피레네 아이벡스 염소, 코르시카 사슴, 갈색 곰, 늑대, 수달 등은 현재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일부 동물과 조류들- 샤무아 영양, 큰 아이벡스종, 비버, 황새, 독수리 종 - 은 국립공원의 소생프로그램에 힘입어 아직도 야생에서 살고 있다.
너도밤나무와 오크나무, 소나무가 빽빽한 숲은 국토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숲 지대는(방대한 습지대와 마찬가지로) 대다수 포유류와 조류의 생태를 유지하게 해준다. 프랑스는 온난기후가 주류를 이루며, 산악지대와 북동부를 제외하고는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은 날씨가 이어진다. 북서부는 대서양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아 습도가 높고, 때로 극심한 서풍이 불며 강수량도 많다.
북동부 지방은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여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로 뚜렷한 계절차이를 보인다. 앞의 두 지역 중간에 있는 파리는 프랑스에서 가장 낮은 강수량을 보이며 그나마 비도 불규칙적으로 온다. 파리의 연평균기온은 12도 정도이나 1월에는 영하로 내려갈 때도 있으며 8월에는30도 이상을 넘을 때도 있다. 남부연안 평지대는 쾌적한 지중해 기후가 주류를 이루는데, 서리는 거의 내리지 않으며, 봄과 가을에는 짧지만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지기도 한 반면 여름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남부는 북서풍 지역으로 1년에 100일 정도는 론(Rhone)계곡 저지대에서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바람을 맞아야 한다. 특히 봄에는 혹독하고 가차없이 불어와 심할 경우 사람도 날려버린다.
역사
선사시대
9만-4만년 전, 구석기시대 중반에 프랑스지역에 인간이 살았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BC 2만5천년 경 석기시대에 크로마뇽인들은 동굴벽화와 조각품들로 그들의 존재를 알렸다. 또한 프랑스에 신석기시대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BC4000-2500년으로 추정되는 거석과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가 도래하면서, 구리와 주석의 수요로 BC2000년 즈음에는 프랑스와 그 외 유럽국가들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고대와 중세
프랑스 원주민은 원래 리구리아인이었는데, 켈트족 고울인들이 기원전 1500년-500년에 이주해 와 그들을 정복하고 동화시켰다. 고울족은 로마시대에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로마인들을 맞아 수 세기에 걸쳐 싸워왔으나 결국 줄리어스 씨저에 의해 정복당하고, 그 후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로마문화를 흡수하고 2세기에는 기독교를 도입하게 되었다. 게르만인들이 로마영역 밖에서 침략을 일삼고 있을 때인 5세기까지도 프랑스는 로마통치하에 있었다.
게르만 중에서도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진출한 것은 동게르만인이었는데 이들이 로마제국을 멸망시키면서 라틴족과 혼합된다. 게르만의 이동과 로마인들과의 융합, 통화과정 후 프랑크족이 유럽에서 대통합의 왕국을 건설했는데 그것이 바로 프랑크왕국이다. 프랑크족은 5세기 경 전 유럽을 통합하여 프랑크왕국을 세워 약 400년동안 로마교황과 손을 잡고 서유럽을 통치했다. 프랑크왕국의 주요구성원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게르만족,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고울족(현재 프랑스적인 요소에 영향을 끼친), 그리고 로마문화를 계승한 이탈리아지역의 라틴족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인종, 문화, 전통이 달라 갈등을 겪다 결국 동프랑크(현재 독일과 동유럽국 지역), 서프랑크(현재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로 3분된다.새로운 질서 속에서 안정을 되찾은 유럽은 다시 한번 격동에 휘말리는데, 8-9세기에 사라센이 동남쪽에서 침입하고 마쟈르인(아시아계로 현재 헝가리인)이 동쪽에서 침입하고 게르만의 일파인 노르만인이 침입한 것이다.
노르만족에게 시달리던 서프랑크왕국(프랑스)은 융화책으로 현재의 세느강주변 땅을 그들에게 주는데 바로 노르망디 지역이다. 이들은 프랑스에 동화되었으나 후일 노르망디공국을 세우게 된다. 987년 귀족들이 위 까페(Hugh Capet)를 왕으로 선출하면서 까페왕조가 들어서는데, 프랑스 역대왕조는 이 까페가에서 비롯되었으므로 현재 프랑스의 국가적 기원이라 할 수 있다.한편 노르망디를 지배하고 있던 윌리암은 1066년 영국을 점령하고 영국에 프랑스제도를 이식한다.
12세기 중엽 헨리2세가 영국과 노르망디를 모두 지배하게 되었고 나아가 현재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을 지배하게 된다. 그 후 이 프랑스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프랑스와 영국 300년동안 계속 갈등을 겪다가 결국, 어머니가 까페왕조의 혈통인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 이르러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을 치루게 된다. 1348년 흑사병이 온 나라를 흽쓸었을 때에만 잠시 중단되었던 이 전쟁 중에 17세기 시골소녀 잔다르크가 등장한다. 그녀에 의해 역전된 전세는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고, 1453년 깔레를 제외한 프랑스의 모든 영토에서 영국인들은 추방당하게 된다.
르네상스
15세기 말경,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상과 미학이, 군사전략상 이태리에 머물렀던 프랑스귀족들에 의해 일부 소개되었다. 이 영향은 프랑소아1세 때 지대하게 미쳤고 퐁텐블로(Fontainbleau)와 슈농소(Chenonceau)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종교개혁
530년대 유럽을 휩쓸던 종교개혁의 바람은 랑스에서도 강하게 일었다. 프랑스에 종교개혁의 바람을 일으킨 사람은 제네바로 망명한 캘빈(John Calvin)이었다. 1562년 1월칙령이 발표되자 구교도(주로 귀족)들은 심하게 반발했다. 그들의 이런 반발은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측면도 다분히 있었다. 1562-1598년 사이의 종교전쟁은 세 집단이 관련되면서 더욱 복잡해진다. 프랑스 신교도인'위그노', 기즈당이 이끄는 구교도, 군주 중심의 구교도로 갈라진 전쟁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프랑스를 분열시켰다. 1572년 8월24일, '성 바톨로뮤 학살'이 일어났는데, 결혼축하를 위해 파리에 갔던 3000명의 위그노들을 구교도가 학살한 사건이었다.
이 학살은 지방에까지 확산되었는데, 이 후로 프랑스에서 신교도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구교도가 대부분이다. 그 후 실권을 잡은 구교도들의 내분으로 앙리 3세는 암살당하고, 위그노였던 나바르의 왕 앙리는 구교로 개종한 후 앙리4세가 된다. 그는 598년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와 시민권 보장의 내용을 담은 '낭트칙령'을 선포하는데, 100년도 채 안되 1685년 루이14세에 의해 폐지된다.
루이14세롸 구제도(Ancient Regime 앙시엥 레짐)
태양왕 루이14세는 1643년 5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1715년까지 통치했는데, 긴 통치기간 동안 프랑스 군주의 권력을 옹호하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다. 그는 국제적으로 프랑스의 권위를 높이고 프랑스의 문화예술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도록 만들지만 영토를 확장하기위해 전쟁을 많이 일으켰으며 베르사이유궁전같은 사치스러운 건물을 짓느라 엄청난 국고를 낭비해(지금은 관광수익을 높이는데 일조하고 있지만) 그의 후계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줬다. 그 뒤를 이은 루이15세와 16세는 매우 무능했다. 루이15세는 오스트리아와 연합해 영국, 프러시아에 대해 7년 전쟁을 벌였는데, 전쟁에 패해 서인도제도의 식민지와 인도를 영국에게 빼았겼다. 그러나 이 패배는 미국혁명이 몰고 온 급진적 민주사상을 프랑스에 유포한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1780년대까지도 무능하고 결단력없는 루이16세와 그의 아내 마리앙뜨와네뜨는 개화파에서 보수파에 이르는 사회 모든 계층을 멀리한 채 지냈다. 1789년 루이16세가 삼부회에서 개혁파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보려했으나 거리에는 파리의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시위를 하였고 드디어 그 해 7월14일 구제도 붕괴의 상징인 바스띠유 감옥이 붕괴되고 말았다. 1793년 1월 루이16세는 지금의 파리 콩코드광장 단두대 위에서 급진파와 시민들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1794년 중반까지 참수형으로 무려1만 7000명이 처형되었다. 말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베스삐에르를 포함한 초기혁명 지도자들이 단두대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나폴레옹
나라는 더욱 혼란해졌고 이를 틈타, 프랑스군인 지도자들이 사회에 불만을 품기 시작하는데, 이 때 나폴레옹이 역사에 등장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불가능은 없다'며 알프스를 건너 오스트리아를 격파하면서 국민적 인기를 얻게 되고 그는 이 힘을 몰아 독립적 정치세력을 키우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나폴레옹이 제1제정을 맡았으나 1802년 국민투표로 종신제정을 선포하고 그의 생일은 국경일이 되었다.
1804년 황제로 즉위한 그는 더 많은 지지와 세력확보를 위해 많은 전쟁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유럽 대부분을 정복하고 1812년 대륙의 마지막 라이벌인 짜르를 정복하러 러시아로 향한다. 그러나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에 물러서고 말았고 이 틈을 타 나폴레옹의 적들이 파리로 쳐들어오면서 나폴레옹은 엘바로 유배되고 만다. 1915년 그는 엘바를 탈출해 군을 모아 다시 파리를 탈환하나 원털루전에서 패하고 결국 남태평양의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에서 1821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쨌든 전쟁의 영웅인 그가 이룩한 '나폴레옹 법전'은 오늘날까지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국가 법체계의 근간이 되고 있다.
19세기
19세기 프랑스는, 어리석은 정부와 쓸모 없는 전쟁이 난무한 혼돈의 시기였고, 공화국으로서 나라가 설립되는 제3공화정이 1870년 출범된 의미 깊은 때이기도 하다. 제3공화정에 도덕적,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힌 것은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유태인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 첩보원으로 누명을 써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으면서 이 사건이 시작되었는데, 군 통치부, 우익정치가들, 구교도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다시 심의되어 결국 그의 결백이 증명되었다. 이 사건은 군대와 교회의 불신감을 더욱 강화시켰고 결과적으로 시민에 대한 군의 통제는 더 심해졌으며 1905년 교회와 정부는 법적으로 분리되었다.이 시기에, 아프리카 식민지를 두고 경 관계에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 간에 앙땅뜨 꼬르디알(Entente Cordiale)이라는 협약이 체결되어 이 후 둘은 협조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세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프랑스는 230만의 사상자와 폐허가 된 많은 영토, 산업의 붕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에게 장악되는 등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비굴한 비쉬정권이 나타났다. 한편 프랑스가 전쟁에서 항복하자 당시 부차관이었던 샤를르 드골(General Charles de Gaulle)은 런던으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세웠고 독일과의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지하 레지스땅스를 만들었다. 1944년 중반,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의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치면서 프랑스는 해방되었다. 드골은 전쟁이 끝나자 파리로 돌아와 임시정부를 세웠고, 1846년 1월 대통령직을 사임하지만 그의 복귀를 원하는 대중들의 요구로 제4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적극적인 미국의 우너조로 프랑스 경제는 서서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식민통치의 재시도는 실패했고, 백만 프랑스인이 거주하는 알제리아에서는 아랍민족주의자들이 그들의 독립을 얻기 위해 폭동을 일으켰다. 제 4공화국은 1958년 끝났으나 알제리아 폭동에 대한 패배에 분노한 극우파들의 쿠데타 음모와 시민폭등을 저지하기 위해 드골은 권좌에 다시 복귀했다. 1962년 제리협상으로 알제리전쟁은 끝났으나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75만의 '삐에 느와르(검은 발이라는 뜻으로 알제리태생의 프랑스사람) 가 프랑스로 들어와야 했다. 이 시기 아프리카에 있는 다른 프랑스 식민지와 보호국들도 독립을 찾기 시작했다.정부와 온 나라에 전면적인 변혁을 가져온 것은 1968년 '5월 혁명' 이었다.
시작은 데모하는 대학생들과 경찰의 충돌 정도 였으나 이것은 점점 확산되어 9백만 파리시민들이 파업에 동참하는 등 전국을 거의 마비상태로 몰아넣었다. 드골은 무정부상태의 위험성을 국민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위기를 넘겼고, 안정이 되어 갈 즈음 교육제도개혁을 포함한 중요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1969년 드골은 드골파인 죠르쥬 뽕삐두에게 자리를 넘긴다. 1974년 발레리 쥐스까르 데스뗑이, 198년 에는 사회당인 프랑소와 미테랑(Francois Mitterand)이 자리에 오른다.
미테랑은 1988년 재선에 당선되나 1986년 의회선거에서 쟈끄쉬락이 이끄는 우파가 다수당이 된다. 임기 마지막 2년 동안 미테랑 대통령은 반대당 내각과 전례 없는 보혁 공존(cohabitation꼬아비따씨옹)을 하게 되며 결국, 1995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주의당을 앞서며 국무총리였던 쉬락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놀라운 것은 쟝 마리 르뺑(Jean-Marie Le Pen)이 이끄는 반 이민 국민전선(FN)은 20%도 득표하지 못하였다. 1995년 7월 빠리와 리용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정부의 알제리 지원에 반대하는 테러집단에 의한 것으로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초기에 쉬락은 EU에서의 확고한 입지와 유고슬라비아 전에 대한 대처로 국민의 신임을 얻었으나, Mururoa의 폴리네시아섬에서 핵실험을 시행한다는 결정을 하면서 프랑스와 외국으로부터 많은 반발을 샀다.
마지막이라고 표방한 이 실험으로 쉬락정부의 프랑스와 태평양주변국과의 외교관계는 악화되었고, 타히티를 포함한 태평양과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의 식민지들에서는 독립의 원성이 높아졌다. 한편 국내에서는 복지비를 제한한다는 쉬락의 정책발표로, 1968년이래 최대의 시위가 일어났다. 1995년 말 3주 동안 빠리의 공공 써비스는 마비되었고, 이로 인해 경제가 악화되면서 유럽경제와 화폐통합에 대한 프랑스의 가능성이 불투명해지게 되었다.
쉬락은 화폐통합에 대한 국민투표라는 명목하에 1997년 임시투표를 하게 되지만, 변덕스러운 프랑스인들은 쉬락의 RPR당을 저버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녹색당의 연합을 지지하게 된다. 아직도 대통령의 권좌에 있는 쉬락이 넘어가야할 두 단계는, 현 사회주의당 국무총리인 리오넬 죠스뺑(Lionel Jospin)과 평균치에 걸려있는 화폐통합이다.
source : 2N7l6SSKe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