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돈 버는 프랜차이즈 빵집? '진짜'를 이야기해주마
나는 현재 대전에서 7년째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자영업자다. 프랜차이즈 빵집을 하기로 결심한 때는 2007년이었다. 당시 제2금융권에 재직 중이던 나는 이사장님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빵집이 돈을 많이 버는 것처럼 보였다. 꼭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게다가 그 무렵, 다른 업체에서 일하는 후배가 같은 프랜차이즈 빵집을 운영했는데 돈벌이가 잘되는데 피곤해서 돈을 셀 수 없다는 농담 섞인 말을 곧잘 하곤 했다. 솔깃했다.
후배가 언니와 함께 다른 지점을 열게 됐고, 기존에 운영하던 매장을 넘기고 싶어 했다. 자영업에 뛰어드려면 들어가는 돈 모두를 대출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장사가 잘된다는 말에 '열심히 벌어서 갚으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인수받으려 했었다. 마침 남편이 동업으로 운영하던 수입가전대리점을 접고 나온 터라 일자리가 급했다. 나도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 해보겠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부푼 마음에 앞뒤 재지 않고 뛰어들었다. 남편은 지점 업주 자격으로 1주일 정도 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자영업자의 꿈을 싹 틔우기 시작했다. 즐겁게 교육을 받는 와중에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지점 인수인계를 못하게 했었는데, 인수인계를 몰래 진행했다가 들통나 도저히 넘기기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3억5000만원을 쏟아부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하루아침에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돼버린 상황이었다. 그때부터 빵집 창업에 관해 정보를 수집하고 프랜차이즈 빵집 본사 개설담당자를 만나보고 장소를 물색했다. 그러던 중 안양의 한 지점을 운영하게 됐다. 유동인구가 많고 버스정거장 뒤에는 대학교가 있는 곳. 옆 동네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오는 곳이라 권리금 1억 원이 아깝지 않았다.
거기에 보증금 1억 원, 매장 투자금 1억5000만 원, 총 3억5000만 원을 겁도 없이 집 담보로 대출을 받아 쏟아부었다. 매출이 200만 원은 나올 거라던 개설담당자의 말과는 다르게 100만 원도 안 되는 매출을 기록했다.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470만 원, 부가세 47만 원을 내고 몇백만 원에 이르는 전기요금·인건비 등을 제하고 나면 마이너스였다.
아이들은 시가와 친정에 맡겨졌고, 15년째 잘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둬야 했다. 알바를 줄이고 점주가 직접 빵을 만들었다. 가게 운영을 위해 쉬는 날도 없이 매달리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인건비 감축은커녕 마이너스 대출을 받아 돈을 메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매출을 끌어올리기 위해 쿠폰 행사를 벌이고, 매장 앞에서 도넛을 튀겨 행사상품으로 파는 일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하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불행히도 재직 중이던 금융권에서 퇴사하고 나니 대출 이율도 올라가 7.5%가 됐다.
심리적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돈벌이도 안 되고 집 담보 대출로 '올인'한 상황. 우리 부부는 지쳐갔다. 남편과 싸우는 날도 점점 많아졌다. 잘해보자고 스스로를 채찍질해도 힘들기만 했다. 고된 삶이 이어지니 정말 살 수가 없었다. 빵을 하나라도 더 팔 요량으로 아침 7시 문을 열고 새벽 1시에 마감했다. 힘든 시간이 반복됐지만, 돈벌이는 안 됐다. 아이들마저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눈물만 났다. 가게에서는 일하느라 남편과 대화를 하지 않았지만, 집에 오면 싸움의 연속이었다.
2년이 지나자 건물주가 재계약 때문에 만나자고 했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보증금을 까먹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폐점을 결정했다. 가구와 집기 등을 철거하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면서 잘살아보겠다고 전재산을 투자한 자영업이 이렇게 허무하게 망하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멀쩡하던 가구는 죄다 버려야 했고, 집기는 본사에서 보관해줬지만, 보관료를 내야 한다고 했다. 에어컨, 포스(POS), 소모품 등은 집에 가져와 쌓아뒀다. 남편도 나도 서로 힘든 상황이니 예민해졌고, 부부싸움도 더 심해졌다.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일했다
그래도 가슴 한켠에 '언젠가 좋은 자리에서 다시 오픈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를 악물었다. 집기들을 처분하면 몇만 원밖에 안 되기 때문에 재오픈이라는, 감히 꿈꿀 수 없는 꿈을 꿨다. 지긋지긋했지만. 이후 거의 6개월 동안 서울·경기권과 지방까지, 양도하겠다는 빵집은 다 보러 다녔다. 매출이 안 나오거나, 리뉴얼을 앞둔 매장이거나, 권리금을 더 얹어줘야 한다는 매장들이었다. 직접 각 지역 개설담당자에 전화해 어디든 가겠다고, 가능한 자리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번호를 남겼다. 그러던 중 지금 운영 중인, 대전의 한 매장을 소개받았다.
"사장님, 여기 1만 세대인데 보실래요?" "네…, 볼게요."
우리 부부는 바로 대전으로 갔다. 대전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지만, 15년간 벌어서 장만한 집을 날리게 되니 뭐든 못할 게 없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또 가봤다. 우리 부부는 그 매장이 너무 마음에 들었고, 바로 계약을 해버렸다. 보관료를 내면서 보관하고 있던 집기와 집에 있는 물건들을 빨리 가져와 우선 다시 시작부터 해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재오픈시 들어갈 자금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이전 가게에 투자했던 돈은 3억5000만 원. 그중 3000만 원 정도가 남은 상태였다. 집 담보 대출금을 갚지 못해서 집은 처분해버렸다. 새로운 가게 오픈에 2억5000만 원이 들어가야 했는데, 내겐 대출받을 집도 신용도 없었다. 카드 대출, 본사 대출, 약관 대출, 친정 식구들에게 자금을 융통받는 등 빚으로 무작정 가게를 열었다.
초기에는 나 혼자서 가게를 운영하게 됐다. 돈이 없어서 보증금 200만 원에 월세 23만 원짜리 원룸에서 지냈지만, 매출은 괜찮았다. 바빠도 힘든 줄 모르게 시간이 잘 지나갔다. 잠도 거의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나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그건 남편에게 자영업을 해보자고 제안했던 책임감 때문이었으리라. 남편과 아이들을 향한 그 책임감은 마음을 무겁게 했고, 그 책임감은 먹지 않아도 자지 않아도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됐다. 그렇게 나는 견뎌냈다.
빚으로 문 연 빵집,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대전으로 온 지 6개월 만에 가족들이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됐다. 작은 아파트를 대출받아 살 수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모여 살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뻤다. 대출은 높은 금리에서 낮은 금리로 바꿨다. 친정 식구들에게 빌린 돈도 조금씩 갚기 시작했고, 약관 대출도 줄여나갈 수 있었다.
정말 열심히 일만 했던 것 같다. 첫 자영업이 망해서 일그러졌던 관계들이 조금씩 회복됐다. 싸움닭처럼 강한 척 견뎌온 모습도 조금씩 바뀌었다.
첫 가게가 망해서 3억2000만 원이라는 큰돈을 날렸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세상은 잃는 만큼 얻는 게 있었다. 두 번째 자영업을 시작할 때는 가게를 보는 안목이 생겼다. 3억2000만 원짜리 교육비를 지불하고 배우게 된 셈이다. 자의든 타의든 비워진만큼 다시 채워지는 것 같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카드수수료가 대기업 마트보다 비싼 게 부당하다고 생각되고, 성실하지 않은 알바생들을 보면 머리가 아플 때도 있다. 매출이 줄고, 수익률이 떨어져 걱정할 때도 있다. 하지만 3억2000만 원을 날리고, 가족관계가 해체될 뻔하고, 살 집이 없어졌던 그때보다는 힘들지 않으니 괜찮다.
나는 전재산을 잃고 쫄딱 망했다가 다시 일어선 자영업자다. 새벽 6시면 일어나고 새벽 1시에 잠드는 나는, '사장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자영업자다.
머릿속은 늘 가게 월세, 대출금, 인건비, 세금, 빵, 알바생, 빵기사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늘 피곤하다. 직장 생활을 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노력한 만큼 돈벌이가 되지 않고, 잠 못드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건강도 상하고 있지만, 청년실업이 심각한 요금 그래도 일을 할 수 있는 행복한 자영업자다. 생계를 위해 처절하게 살고 있지만 건강하게 자라주는 세 아이를 보면 감사하다. 가족이 함께 산다는 것,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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