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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아의 엄마로 산다는 것

2013-01-25 2158
자폐아 엄마

'늦되는 아이'인 줄로만 알았던 내 아이가 자폐아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 부모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자기만의 동굴 속에 갇혀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증상, 세계적으로 자폐증을 앓는 이들이 1억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보건복지부 통계를 보면 국내에도 약 18만명이 장애 등록이 돼 있다고 하고요. 만혼과 환경오염 등의 영향으로 자폐증이 증가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잇따릅니다. 자폐에 대한 인식 변화와 사회적 지원이 절실합니다.




아들이 태어난 건 7년 전이다.

방황하던 젊은 시절,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뒤 바로 임신을 하고 나는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고단하게만 느껴졌던 내 삶에 드디어 내가 가꾸고 보호하고 사랑해야 할 가정이 생겼으니, 나는 행복했다. 결혼 초기 임신으로 신혼은 짧았지만 아쉽진 않았다. 그렇게 행복하게 열달을 보내고 태어난 내 아들. 잠 못 드는 날이 계속되고 유난히 엄마 품을 좋아하는 아이를 힘겹지만 행복하게 키우며 우리 부부는 1년을 보냈다.

하지만 역시나 내 삶이란 저주였던 걸까?

사랑스런 내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옹알이도 하지 않고 점점 이상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잘 걷고 웃었지만 사람을 똑바로 보지 않고 안기만 해도 발버둥을 쳤다. 나와 잠시라도 떨어지는 것도 몹시 괴로워했다. 처음엔 그저 어른들 말씀처럼 늦된다고, 조금 더 자라면 괜찮아질 테니 걱정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시댁이나 친정이나 첫 손주란 생각에 나쁜 생각은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또 1년이 흘렀다. 아이는 여전히 그대로, 아니, 갈수록 감당하기 힘든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이유 없이 울다가 또 이유 없이 웃다가 벽에 자기 머리를 박아대고 자기 살을 깨물고, 그래도 웃고….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대학병원으로 갔다.

그때의 불안했던 심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진료실에서 우리 가족을 맞이한 의사는 잠시 아이를 관찰하고 발달평가를 받자고 했다. 집안형편이 넉넉지 않은데 평가비는 뭐가 그리 비싼지…. 하지만 내 아이만 괜찮다면 상관없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의사는 말했다. "아직 아이가 어려서 정확한 진단은 어렵다. 하지만 자폐 같아 보인다. 빨리 치료를 시작하는 게 좋다."

그때 처음으로 하늘이 무너진다는 감정을 배웠다. 가족들 속만 썩이던 아빠가 객사하셨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남편과 나는 멍한 상태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며칠을 멍하니 아무것도 못하고 아이만 바라봤다. 남편 역시 기계적으로 일을 나갔다. 믿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누구든 원망하고 싶었다. 답답하고 절망스러웠지만 이상하게 눈물도 나지 않았다. 마냥 내 잘못인 것만 같아서 울 수도 없었다.

시선 피하고 옹알이를 안해도
조금 늦될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이 된 자폐 진단
내 탓, 원망조차 할 수 없었다
지친 일상과 동정의 눈빛 속에
오늘 또 오늘을 살면서 7년
아이는 아직도 기저귀를 차지만
'희망'이 내게 위안을 준다
좋아질거야, 내일 혹은 언젠가는…


서서히 가족들도 알게 되면서 전화기는 불이 났다. 친정엄마는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아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나를 원망하셨다.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이렇게 됐냐"고 하셨다. 시어머님도 내색은 안 하셨지만 "우리 집안에 장애인은 없다"며 알 수 없는 말만을 되풀이하셨다. '그래, 내 죄인가? 내가 잘못해서 내 귀한 아이가 이렇게 된 건가?' 나도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그런데 보이는 사람마다 날 탓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하늘만 탓했던 거 같다.

우선 무슨 짓이든 해야만 했다.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에 대기자 신청을 했다. 하지만 치료사는 부족했고 대기자는 넘쳤다. 운이 나쁘면 1년을 기다린단다.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동원해서 다른 아이의 치료가 취소될 때마다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3개월을 치료실 밖에서 아이 울음소리만 들었다. 그사이 둘째를 갖게 됐다. 만삭의 몸으로 큰애를 업고, 작은애가 태어난 뒤로는 앞뒤로 업고 안고 2년 동안 병원을 다녔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희망이 안 보여서일까? 우리 부부 사이는 갈수록 냉랭해져만 갔다. 서로 힘에 겨워 잦은 말다툼이 일상이 돼, 각방을 쓰게 됐다. 남편은 직장을 1년도 버티질 못하고 그만두기 일쑤였고, 가게를 한다며 지방으로 혼자 내려갔다가 자기 사촌형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시댁 식구들은 그것도 내 탓이라 원망하셨다. 사기를 친 환갑을 넘긴 시댁 형님보다 제대로 뒷바라지 못한 내 죄라고 하셨다.

정말 미웠다. 이혼까지 생각했다. 대화가 단절됐을 뿐만 아니라, 눈도 마주치지 않는 일상이 계속됐다. 시댁에 내려가면 아들을 외면하시는 시어머님의 모습에 점점 지쳐가기도 했다. 시어머님은 아이를 한번 안아주시지도 않고 아이가 사고를 치기라도 하면 머리를 때리시며 짜증을 부리셨다.

부족하다고 해도 친손주인데, 너무 모질게만 대하시는 모습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점점 시댁에 연락도 뜸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많이 긍정적으로 변하며 노력했지만, 시댁이 미워지니 남편도 덩달아 미워지기만 했다.
하지만 내 아이들…. 나만 바라보는 우리 아들을 보며 인내했다. 언젠가 "엄마"라고 불러주는 날이 올 거라 기다리며 계속 치료를 받았다. 정상인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좋다는 말에 어린이집들을 찾아다녔다.

다섯살이 될 때까지 제 발로 걸어다니길 거부하는 아들을 업고, 겨우 걷기 시작한 딸은 손을 잡고 걷게 했다. 짜증이 늘고 몸은 지쳐갔다.

내 탓을 하던 친정엄마와 여동생은 이젠 동정 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항상 내가 불쌍해서 어쩌냐고만 한다.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 "제발 하지 말라"고, "왜 날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냐"고 소리쳤다. "겨우 적응하기 시작한 나에게 그런 말은 이제 하지 말아달라"고,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이젠 지친다"고 울며 화를 냈다.

난 못된 딸이고, 못된 언니였고, 못된 아내였다. 그리고 내 작고 예쁘기만 한 딸아이에겐 못된 엄마였다. 내 모든 일상은 아들을 기준으로 돌고 어떤 일이든 아들이 우선이었다. 잘못됐다는 걸 알지만 하루라도 빨리 아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내 욕심이 날 자꾸만 못되게 만들었나 보다.

병원비는 자꾸 오르고 남편 빚은 는다. 들어오는 돈은 적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았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못 일어날까봐 이를 악물었다. 어린이집에서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직장은 꿈도 못 꿨다. 하루하루 부업을 하며 젖먹이 둘째를 키우며 '내일' 따위는 생각도 안 했다. '그저 오늘만 살자, 오늘만 넘겨보자' 그렇게 되뇌며 버텼다.

내일을 생각하면 절망스럽기만 했다. 벌써 7살인 내 아들은 아직도 기저귀를 찬다. 말도 못하고 마냥 돌쟁이처럼 군다. 5살인 내 딸은 오빠의 영향인지 지난해까지 말을 못하다가 올해 들어서야 말을 시작했다. '천만다행이라고, 너라도 어서 커서 자유롭게 네 갈 길을 가라'고, 엄마 품을 오빠에게 내주고도 떼 한번 부리지 않는 우리 딸의 잠든 얼굴을 보며 되뇌곤 한다.

큰아이가 잠 못 들고 울어댈 때 끌어안고 죽고만 싶었다. '그럼 적어도 남편과 딸만은 자유롭지 않을까?' 그렇지만 또 생각한다. '나도, 내 아들도 내일을 꿈꾸고 싶다고.'

7살 자폐아의 엄마

source : 13000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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