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는 영국, 아! 옛날이여
세계 호령 초강대국서 빚 많은 '작은 섬나라'로
군사·문화적 영향력 잃고 런던 금융허브도 흔들려 선진국 중 불황 가장 길듯
영국 하원 외교 특별위원회는 2009년 8월 2일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영국군의 실패는 너무 과중한 임무 탓"이란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BBC 방송에 따르면, 이 보고서의 요지는 지난달에만 22명이 전사하는 등 영국군 피해가 급증한 까닭은 영국군이 탈레반(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과의 전투 말고도, 마약거래 단속 등 영국군의 역량을 넘어서는 과다(過多)한 임무를 수행 중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영국의 국력이 예전 같지 않다. 단지 군사력뿐 아니다.
영국은 대영제국의 해체 이후에도 강력한 경제력과 문화적 영향력, 핵 억지력, 미국과의 돈독한 관계를 기반으로 당당히 선진국 지위를 누려왔지만, 현재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최신호(2009년 8월 17일자)는 "이 작은 섬나라가 (그동안은) 자기 '체급' 이상으로 주먹질을 잘했지만, 작년 금융위기와 함께 모든 게 바뀌었다"며 "대영제국 위로 지지 않던 해가 돌연 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됐다"고 보도했다.
국제사회에서의 역할도 '위대한 영국(Great Britain)'에서 '왜소한 영국(Little Britain)'으로 재고할 때란 것이다.
그동안 영국의 선진국 지위를 받쳐준 것은 런던의 금융허브 '시티'를 중심으로 한 막강한 경제력,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의 탁월한 리더십이었다.
냉전 시절 마거릿 대처(Thatcher) 총리는 영국을 미국 다음가는 민주주의·자본주의의 수호자로 각인시켰다.
탈(脫)냉전 시대 영국을 이끈 토니 블레어(Blair) 총리는 '미국의 51번째 주(州) 되기' 전략으로 조국의 추락을 지연시켰다. 코소보·아프가니스탄·이라크전 등 미국의 이해에 부합하는 전쟁에 적극 뛰어들며 영국의 운명을 미국에 연계시켰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 위기로 번영의 원동력이던 금융 분야는 성장의 걸림돌로 바뀌었고, 믿고 의지했던 미국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월가를 능가하는 규제 완화로 번영을 구가하던 헤지펀드와 파생상품 거래가 직격탄을 맞으며 '시티'의 금융허브 지위는 싱가포르와 홍콩이 넘보는 상황이다.
실업 수당을 받는 영국인은 10년 전 130만명이던 것이 현재 200만명을 넘어섰고 곧 300만명까지 늘 전망이다. 국가 빚은 위기 전에 비해 2배 수준으로 급증하며 장차 5년간 GDP(국내총생산) 대비 100%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제 영국이 '템스강의 아이슬란드(작년 10월 국가부도 사태를 맞음)'가 됐다는 자조의 목소리마저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선진국 중에서 영국의 불황이 가장 깊고 길 것으로 내다본다.
영국은 또 2007년까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군비를 지출하며 막강한 국방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 순위가 작년 4위(653억달러)까지 밀린 데 이어, 앞으로 11~25% 정도의 추가 삭감이 불가피하다.
영국의 핵무기 유지 능력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현재 운용 중인 잠수함 발사 핵미사일인 트라이던트(Trident) 미사일 체계는 앞으로 10년 내 교체해야 하는데 200억파운드(약 40조원)에 달하는 비용 조달이 어렵다.
최근 일간지 가디언의 여론조사에선 영국의 핵 억지력 포기를 원하는 국민이 54%였다.
영국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는 일은 없겠지만, 예산 문제 등으로 핵 억지력이 약화할 경우 국제사회에서의 대접도 달라질 전망이다.
전통적으로 핵 억지력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보장하는 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또 영국 외무부는 2004년 이후 해외 공관과 인력을 대폭 축소해, 대영제국 시절 절정에 달했던 외교력도 급히 쇠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