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Paraguay - 지리, 역사, 문화
파라과이 (Paraguay)
파라과이는 심지어 이웃 나라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남미의 '빈 구역'이다. 파라과이의 역사 대부분은 중남미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으며 20세기의 오랜 기간 동안 이 나라는 남미에서 가장 악명 높고 오래 지속된 경찰 국가였다. PJ 오르케(O'Rourke)는 '파라과이는 어디에도 없으며 아무것으로도 유명하지 않다'라고 씀으로써 무뚝뚝하게 이를 요약했지만 잠시 선거를 떠맡기 위해 이곳을 들르고는 곧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파라과이가 지난날의 정치적, 경제적, 지리적 고립을 딛고 새롭게 방문을 환영하는 것을 보면 아마 다른 여행자들도 같은 생각을 가질 것이다. 파라과이는 포근한 강변에 자리잡은 수도와 감동적인 예수회 선교지역, 몇몇 국립 공원과 남미에서 가장 훌륭한 야생 생태계 구역 중 하나인 광대하고 건조한 챠코(Chaco)가 있는 나라이다.
통계 자료
국명: 파라과이 공화국(Républica del Paraguay)
면적: 407,000 sq km
인구: 480만명
수도: 아순시온 (Asunción, 인구 500,000)
인종: 95% 메스티조
언어: 공식어는 스페인어이지만 과란 어도 널리 쓰인다
종교: 97% 카톨릭, 3% 메노파를 비롯한 개신교
정체: 공화국
지리 및 기후
파라과이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 둘러싸인 내륙국가이다. 국토는 서반구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인 파라과이 강에 의해 불균형하게 둘로 나뉘어 있다. 강의 서쪽에 있는 챠코는 대체로 메마르고 인구도 드문 땅덩이로 전국토의 6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대부분의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데 높은 초원 고지대에다 물도 잘 대어져 있으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경에는 빠라나(Paraná)강을 따라 죽 아열대 산림이 뻗어있다.
야생 생물들은 다양하여 많은 수의 앵무새나 잉꼬, 황새, 히아신스 마코 앵무, 한때 멸종되었다고 생각되었던 챠코 멧돼지, 거기다 커다란 악어, 아나콘다, 보아 뱀 같은 파충류들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동부 파라과이의 도시 지역에 밀집한 인구로 인해 커다란 개미핥기나 갈기 달린 늑대, 브라질 맥, 재규어 등이 빠르게 사라져가고있다. 동부 파라과이의 기후는 습도가 높으며 강우량은 연중 고르다. 기온은 여름(1월에서 3월)에 평균 35도로 거의 보편적으로 덥고 겨울(7월에서 9월)에는 5도까지 떨어진다. 이 시기에 서리를 보는 것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눈은 거의 내리지 않는다. 챠코는 기온이 좀더 높으며 강우량은 더 변덕스럽다.
역사
파라과이 동부에 원래 살던 주민들은 반 유목민인 과라니였다. 과이쿠루로 알려진 몇몇 수렵 채집 부족들은 챠코에 살았다. 1524년 알레호 가르시아(Alejo García)는 과라니의 안내로 파라과이를 건넌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3년 뒤 세바스티안 카보트(Sebastián Cabot)가 파라과이 강을 항해했으나 정착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로써 정착지의 발견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벗아나 아순시온에 정착한 뻬드로 데 멘도사(Pedro de Mendoza)의 원정대의 몫이 되었다.
식민지는 번성하여 남미의 남동부에 있는 스페인 개척지의 중추가 되었으며 흥미로운 사회화가 진행되는 시대를 열었다. 토착 원주민 집단은 점점 스페인인들을 흡수하였으며 반대로 스페인인들은 과라니의 음식과 언어, 관습을 받아들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페인-과라니 사회가 형성되어스페인인들이 정치적으로 지배세력이 되고 메스티조들은 스페인의 문화적인 가치를 채택하였다. 식민지화는 또한 토착민에게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예수회가 파견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민첩하고 능숙하게 포교활동을 벌였다. 토착민들은 그들의 땅을 떠나 레둑시온(신정 공동체)에 정착하도록 유도되었으며 이곳에서 성당을 짓도록 돕거나 석공, 조각, 회화 등의 솜씨를 익히고 때로는 전통적인 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767년 예수회가 축출되면서 개척지는 점점 시들어가고 토착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다른 고용주에게 고용되었다. 파라과이는 1811년에 독립을 선언했고 스페인은 반대하지 않았으며 몇 년 뒤에 외국을 싫어하며 'El Supremo'로 알려지기도 한 호세 가스빠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José Gaspar Rodríguez de Francia)의 손아귀에 쥐여지게 되었다.
그는 국경을 폐쇄하고 자급자족(스페인 상류 계급까지도 메스티조와 결혼하도록 시키는 등의) 정책을 권장하였으며 지주와 상인, 성당의 소유지를 몰수하였다. 그는 1840년에 죽었고 그의 유체는 무덤에 빼내어 강에 버려졌다. 프란시아의 후계자인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Carlos Antonio López)는 파라과이의 고립을 끝내고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불행히도 그 또한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과 싸운 파멸적인 삼국 연합의 전쟁(1864-70)을 시작하여 나라를 만신창이로 이끌었다. 포화가 가시자 파라과이는 150,000 sq km의 영토와 인구의 1/4을 잃었으며 로페스의 아들 역시 죽었다. 전쟁이 끝난 후 파라과이의 농업 지역은 새로운 유럽과 아르헨티나의 이민자들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지만 정치적인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세기가 바뀔 무렵 볼리비아가 분쟁지역이던 챠코의 일부분을 점령하면서 국경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 지역에 있으리라 추정되던 광대한 석유 자원(결국 없음이 드러났지만)으로 두 나라는 결국 1932년 전쟁을 시작하였다. 볼리비아 군대는 대부분의 챠코 지역에서 쫓겨났으며 이어진 조약으로 파라과이는 이 지역의 3/4을 획득하였다.파라과이의 정치는 챠코 전쟁이후 더 혼란스러워져 잠시동안의 내전 이후 콜로라도 당이 1949년 정권을 잡게 되었다. 1954년에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Alfredo Stroessner)가 대통령이 되었다. 허영심이 강한 불같은 성격인 스트로에스네는 고문과 살인, 정치적인 숙청을 거듭하였고 이후 35년간 권좌에 머무르기 위해 부정 선거를 일삼았다.
이 적대적인 독재자는 1989년 물러나고 다른 고관인 안드레스 로드리게스(Andrés Rodríguez) 장군이 대신해 권력을 차지했다. 로드리게스의 의도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의견도 있지만(로드리게스는 스트로에스네르의 예전 오른팔이었다) 그는 오랜 기간 계속된 비상령을 해제하고 검열을 없앴으며 야당을 합법화하였으며 정치범을 석방하였다. 파라과이는 1993년 선거까지 정치적인 안정이 계속되었으나, 열광적인 자유 시장주의자이며 예전 스트로에스네르의 당파에 있었던 후안 카를로스 와스모시(Juan Carlos Wasmosy)가 대통령에 오르자 전국적으로 수많은 파업이 일어났다. 와스모시는 자신도 이 나라의 거대한 수력발전 계획과 관련한 암거래 의혹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1998년 5월, 콜로라도 당은 원래 후보자였던 리노 오비에도(Lino Oviedo) 장군을 와스모시에게 반역하였다는 혐의로 1996년 선거기간 중 투옥시킨 이후 새로 선출한 후보자인 전기 공학자 출신의 라울 쿠바스(Raul Cubas)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집권을 재확인하였다.
모든 것이 장밋빛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 쿠바스는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권을 남용하여 오비에도를 감옥에서 빼내었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부통령인 루이스 아르가냐(Luis Agaña)가 1999년 3월 총탄에 암살 당하자 대중적인 의견은 쿠바스와 오비에도를 살인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쿠바스는 사임하도록 촉구받게 되었다. 상원 의원장이던 루이스 곤살레스 마치(Luis Gonzalez Macchi)가 뒤이어 취임하였으며 쿠바스와 오비에도는 이웃 나라로 망명하였다.
경제
국내 총생산 GDP: US$ 159 억
1인당 국민 총생산 GNP : US$ 1,802
연 성장률 : 2%
인플레이션 : 20% 주요 산업 : 콩, 면, 목재, 동물 가죽, 정육, 사탕수수 (그리고 밀매업) 주요 교역국: 브라질, 네덜란드, 아르헨티나
문화
연극은 일반적인 공연물이며 스페인어뿐 아니라 과라니어로도 종종 공연된다. 고정 관념을 깬 놀라운 시각 예술도 많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파라과이의 저명한 문학가로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아우구스또 로아 바스또스(Augusto Roa Bastos)를 들 수 있다.
파라과이의 음악은 매우 흥미로운 면을 가지고 있다 - 언어에서는 인구의 대부분이 토착 언어를 아직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음악에서는 다른 흑인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유럽의 원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기타와 하프가 대중적인 악기이며 노래는 보통 느리고 슬프다.
그러나 폴카와 병을 머리에 이고 추는 것 같은 여러 춤은 훨씬 더 활기 넘친다. 아구스틴 바리오스(Agustín Barrios, 1885-1944)는 남미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타 작곡가이로 가끔 파라과이의 정글이 배출한 기타의 '파가니니'로 선전되며 완전히 과라니 의상을 입은 연주가에 의해 그의 음악이 공연되기도 한다. 카톨릭은 공식적으로 이 나라의 국교이지만 다른 여러 남미 국가에 비해서는 성당의 영향이 크지 않다. 다른 종교 단체들로는 원리주의 메노파 개신교도나 스트로에스네르의 독재권력과 결부해 운영되어 논란거리가 되어온 복음주의 단체인 New Tribes Mission 등이 있다. 고기 요리는 열대나 아열대 음식 재료와 더불어 파라과이 음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곡물, 특히 옥수수와 카사바 녹말은 거의 모든 음식에 다 들어간다. 시도해 볼만한 음식으로 로크로(옥수수 스튜), 마사모라(옥수수 죽), 므바이피 소오(고깃 덩어리를 얹은 뜨거운 옥수수 푸딩), 소오요 소피(갈은 고기로 만든 걸죽한 수프에 쌀이나 면을 같이 내오는 요리) 등이 있다. 디저트에는 므바이피 에에(옥수수, 우유, 당밀 등을 맛있게 섞은 것) 가 있다. 차나 마테차도 많은 양을 소비하며 모스토(사탕수수 주스)와 카냐(수수 알코올)도 역시 자주 마시는 음료이다.
source : zo81axOOs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