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xico - 지리, 역사
멕시코 (Mexico)
멕시코는 극단적인 다양성을 가진 나라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휴양지의 겉모습뿐인 화려함과 동시에 경외심을 자아내는 고대 도시가 있고, 눈 덮인 화산을 따라 내려가면 소나무 숲과 사막 그리고 시원한 해안까지 그 모든 것이 이 나라 안에 모여 있다. 폭발적인 거대 산업도시인 멕시코시티는 인디안 반군들이 지배 세력의 준 군부대와 빈번하게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풍부한 자원을 지니고 있는 남부 치아파스 주에서 비행기로 한시 간 거리이다. 북쪽 국경을 따라 멕시코의 혼란스런 흥분의 전통은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뉴멕시코 그리고 텍사스 등의 시원한 미국 에어컨 문화와 동화되고 있다.
통계 자료
국명 : 멕시코 합중국 (Estados Unidos Mexicanos)
면적 : 1,972,000 sq km (769,080 sq mi)
인구 : 9천6백만 명 (인구 성장율 2%)
수도 : 멕시코시티 (2천만 명)
인종 : 대략 80%가 메스티조 (인디안 후손과 유럽인들의 혼혈)이고 10%가 토착원주민(아메리카 선주민이나 인디안 ? 나우아 (Nahua), 마야 (Maya), 사포떽 (Zapotecs), 믹스떽 (Mixtecs), 또또낙 (Totonacs), 따라스코 (Tarascos), 뿌레뻬차 (Purépecha) 등을 포함)
언어 : 스페인어와 50여 종의 토착 주민들의 언어
종교 : 90% 가 로마 카톨릭이며 6% 는 개신교
정체 : 전국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일당(PRI)에 의한 민주주의
지리 및 기후
거의 200만 평방 킬로미터(800,000 sq mi)에 이르는 광대한 국토의 멕시코는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휘어진 모양을 하고 있으며 떼완떼뻭 지협(Isthmus of Tehuantepec)으로 점점 좁아져서 유카탄 반도까지 이어진다. 멕시코 서부와 남부는 태평양과 캘리포니아 만(바하캘리포니아 반도와 대륙 사이)에 접해 있다. 동쪽 해안은 멕시코 만에 접해 있고 유카탄 반도의 동쪽 해안은 카리브 해에 면해 있다. 육지에서의 멕시코는 미국(북쪽으로)과 과테말라, 벨리세(남동쪽)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멕시코는 알띠쁠라노 센뜨랄(Altiplano Central)로 알려진 광대한 중앙 고원 그룹을 형성하는 두 산맥이 남북으로 이어진 산지 지형 국가이다. 남쪽에 있는 시에라 마드레 델 수르(Sierra Madre del Sur)는 게레로(Guerrro)와 와하카(Oaxaca) 주를 가로 질러 떼완떼뻭 지협까지 이어진다. 이 지협에서 좁은 저지대가 태평양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과테말라까지 펼쳐져 있다. 이들 저지대의 등줄인 치아파스 고지대는 북부 과테말라까지 죽 이어진 무더운 열대 우림 지역과 합쳐진다.
편평하고 낮은 유카탄 반도는 열대 사바나가 뻗어 가다가 반도 끝에서 건조한 사막 같은 지역으로 변한다. 온대 지역과 열대 지역 사이를 잇는 멕시코는 세계적으로 사막이 몰려 있는 위도에 놓여 있으며 변화 무쌍한 자연환경과 여러 식생 지대를 포함하고 있다. 울퉁불퉁하고 산이 많은 지형은 곧 수없이 많은 미세한 기후들을 만들어 낸다. 엄청난 생태학적 다양성이 잠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끼친 영향 역시 막대하다.
스페인 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국토의 2/3가 숲으로 덮여 있었으나 오늘날은 남부와 동부에 겨우 1/5만이 녹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동물들을 가축화하여 방목하기 시작한 이후 커다란 동물들, 예를 들어 푸마, 사슴, 코요테 등은 고립된 지역으로 밀려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르마딜로, 토끼, 뱀 등은 흔히 볼 수 있으며 점점 사라져 가고는 있지만 아직도 남부와 동부의 열대 숲에는 거미원숭이나 짖는 원숭이, 재규어, 오셀롯(스라소니의 일종), 맥(tapir), 개미핱기, 페카리(남북미산 멧돼지), 사슴, 마코앵무새, 투칸(큰부리새), 앵무새, 브라질 보아 같은 열대 파충류 등이 살고 있다. 멕시코는 지형에 따라 기후가 크게 변한다.
양쪽 해안 평원을 따라서는 무덥지만 과달라하라(Guadalajara)나 멕시코시티처럼 내륙 고지대는 훨씬 건조하고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덥고 습기 찬 계절은 5월부터 10월까지로 멕시코 대부분에서 7,8,9월은 가장 덥고 다습한 달이 된다. 그리고 해발 고도가 높은 내륙 지역보다 해안 저지대에서 더 많은 강우량을 기록한다. 12월에서 2월 사이는 일반적으로 선선한 달이지만 북풍이 불어오는 북부 멕시코는 확실히 쌀쌀하며 온도도 때때로 급격히 내려간다.
역사
식민지 이전 역사
처음 이곳에 정착한 주민들은 콜룸부스보다 대략 20,000년 정도 전에 살기 시작했다. 그들의 후손들은 BC1200년 경부터 AD 1521년까지 번창하던 뛰어나고 고도로 발전된 문명을 건설하였다. 이들 중에는 마야와 아즈텍 문명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에르난 코르테스 (Hernán Cortés)는 현재의 베라크루스에 1519년 4월 21일 11척의 배와 550명의 병사 그리고 16필의 말을 이끌고 이곳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인디안들은 호의적이었으며 곧 아즈텍의 수도인 떼노치띠뜰란 (Tenochtitlán) 으로 ‘물위를 떠가는 탑’을 타고 온 하얀 피부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당시의 아즈텍 왕이던 목테주마 2세 (Moctezuma II)에게 전해졌다.
아즈텍의 달력에 따르면 1519년은 케찰코아뜰(Quetzalcóatl)신이 동쪽에서 돌아오기로 되어 있는 해였다. 스페인 인들은 당시의 아즈텍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마을로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게 되었고 이 인디안들과 첫번째로 동맹을 맺었다. 6,000명의 인디안들과 코테스는 당시 스페인의 그 어느 도시보다 커다랗던 아즈텍의 수도 섬으로 다가갔다. 목테주마는 그들을 자신의 왕궁으로 초대했고, 그러자 스페인인들은 곧바로 그를 인질로 잡아들였다.
마침내 1521년 8월 13일 아즈텍의 저항이 끝을 맺고 말았다. 스페인의 침략을 받은 인디안들의 처지는 비참하게 악화되었는데 이는 식민 통치자들의 거친 지배 때문만이 아니라 스페인 인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인한 전염병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인디안 인구는 침략 당시 2,500만으로 추산되는데 1605년에 접어들면 겨우 1백만 명 조금 넘는 사람만이 살아 남았을 뿐이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멕시코에서는 일종의 인종 차별 정책이 있어서 이 시기 동안 멕시코 내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도록 부채질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식민지 개척자들은 뻬닌술라레스(peninsulares) 또는 조롱하는 의미에서 가츄삐네스(gachupines) 등으로 불리었으며 인구의 극소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스페인에서의 원래 신분이야 어쨌든 간에 뉴스페인(당시의 멕시코를 부르던 이름)의 귀족으로 대우받았다.
18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인 부모를 둔 뉴스페인의 크리오요스(criollos)들은 광산, 상업, 목장, 농업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게 되자, 당연히 자신들의 부에 걸맞는 정치적 권력을 찾기 시작했다. 크리오요스 보다 아래에는 스페인인과 인디안 또는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들 사이에서 태어난 메스티조가 있었고 가장 밑바닥에 인디안이나 아프리카 인들이 놓여졌다.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되자 뉴스페인에 대한 스페인의 직접 통치가 어렵게 되고 뻬닌술라레스와 크리오요스 사이의 견제가 강화되었는데 이것이 촉매가 되어 반란이 일어났다. 1810년 9월 16일 교구 사제인 미구엘 이달고 이 코스띠야 (Miguel Hidalgo y Costilla)는 성당의 신도들에게 설교하며 유명한 돌로레스의 외침(Grito de Dolores) 을 통해 반란을 촉구했다.
산발적인 전투가 1821년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스페인은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독립 후에 22년간 만성적인 국가 불안이 이어졌는데 이 시기에 국가 원수가 36번이나 바뀌었고 멕시코 영역이었던 많은 땅들이 미국에 빼앗겨지게 되었다. 1845년 미국 의회는 투표를 통해 텍사스를 병합하도록 결정했는데 이것이 멕시코-미국 전쟁을 이끌었으며 결국 미국이 멕시코시티를 포위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전쟁이 끝날 무렵 과달루뻬 이달고(Guadalupe Hidalgo, 1848) 조약으로 멕시코는 현재의 텍사스, 캘리포니아, 유타, 콜로라도 그리고 대부분의 뉴멕시코와 아리조나 등을 미국에 할양했다.
1862년까지 멕시코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에 거대한 빚을 지고 있었고 세 나라는 연합군을 편성해 이 빚을 돌려 받으러 쳐들어 왔다. 잔인한 나폴레온 3세 시대의 프랑스는 더 나가 멕시코를 식민지화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또 다른 전쟁이 벌어졌다. 1864년, 나폴레온은 오스트리아 대공인 함부르크의 막시밀리안을 초대해 멕시코의 황제로 만들었지만 이 지배는 금새 끝나고 말았다. 1911년까지 33년간 멕시코를 지배했던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의 시대는 비교적 안정을 되찾았다. ‘질서와 전진’이라는 슬로건 아래 그는 멕시코를 산업시대로 이끌었고 60년간이나 멕시코인들을 괴롭혔던 지긋지긋한 전쟁을 종식시켰지만 반면에 평화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정치적 반대나 선거, 언론의 자유 등이 금지 되었고 잔혹한 군대에 의해 지배가 계속되었다. 디아스의 통치에 대한 불만이 퍼져 가면서 파업이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멕시코 혁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혁명은 억압과 자유 사이의 분명한 투쟁이 아니라, 10년 동안 계속해서 안정적인 정부와 평화를 창출해 내려는 시도가 새로운 투쟁의 발발로 무너지는 가운데 난립한 여러 지도자에 대한 충성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자유 개혁론자들과 대농장의 토지를 농부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싸운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같은 급진적인 지도자들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차이는 혁명의 성공을 어렵게 만들었다.
10년에 걸친 과격한 내전으로 150만에서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는 당시 멕시코 인구의 1/8에 이르는 수치이다. 혁명이후 정치적 목표는 시골 학교나 도로, 수력전기 발전소와 관개시설 등의 국가의 하부구조를 다지고 발전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PRI(The Party of the Institutionalized Revolution)는 1934년 정권을 인수해 아직까지 집권하고 있으며 개혁과 토지 재분배 등의 여러 정책을 도입했다. 1966년에는 보수적인 디아스 오르다스(Díaz Ordaz) 정부에 대해 멕시코시 대학생들의 분노가 표출되면서 다시 사회불안이 가중되었다. 1당 독재 체제, 제한된 언론의 자유, 과다한 정부의 권력 등에 대한 불만이 머리를 들며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거대한 데모로 번졌고 시위자들이 무장군에 의해 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70년대의 석유 붐은 멕시코의 석유 수익을 증대시키고 산업과 농업 투자를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1980년대의 석유 과다 공급으로 유가가 하락하자 멕시코는 몇 십 년 만에 최악의 불경기를 맞았다. 당연한 결과로 경제 위기는 좌, 우익 양쪽의 정치적 반대 세력이 증가되는 결과를 이끌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5년 9월 19일의 지진은 리히터 지진계로 진도 8을 기록하였으며 40억 US$의 손실을 입혔다. 이 지진으로 멕시코시티의 수백 채의 빌딩이 파괴되었고 수 천명의 주민이 집을 잃었으며 8,000여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Carlos Salinas de Gortari)는 1988년 그가 다수 표를 얻지 못했다고 믿어지는 논쟁꺼리가 많은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멕시코의 경제를 마비시키는 국채를 재타협하고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성공한 듯이 보이자 대중적 지지기반을 획득하게 되었다. 대대적인 사유화 정책과 국제 금융시장의 유입으로 멕시코는 자유 시장 경제의 모범으로 국제 여론에 선전되었다.
살리나스가 추진한 경제 개혁의 절정은 나프타(NAFTA, 북미 자유무역 협정)로 1994년 1월 1일부터 발효되었다. 나프타가 인디안 농부들의 빈곤을 증대시킬 것이라는 의구심은 곧 사파티스타들에 의한 남부 치아파스주의 폭동으로 이어졌다. 나프타가 발효된 날, 2,000명의 농부들이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San Cristóbal de Las Casas)와 다른 지방 도시들을 점령하고 멕시코의 억압받는 인디안들을 위한 사회 정의를 요구하여 멕시코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반란군과 멕시코 군대가 정전을 하기 전까지 최소한 145명이 죽었다. 수브코만단떼 마르코스(Subcomandante Marcos)로만 알려진 털모자를 쓴 모습의 반란군의 지도자는 전국적인 농민들의 영웅이 되었다.
1994년 3월, 살리나스가 고른 후계자,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Luis Donaldo Colósio)가 암살당하였다. 그를 대신해서 출마한 43세의 에르네스토 세디요(Ernesto Zedillo)가 선거에서 겨우 49%의 지지만으로 당선되었다. 멕시코의 정치 체제와 젊은 경제에 대한 확신이 모험적으로 낮은 상태에서 경제 위기가 가중되었다. 세디요가 취임 선서를 한지 몇주일만에 페소는 극적으로 곤두박칠쳤고 물가도 상승하기 시작해 멕시코는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으며 비상상황으로 미국과 국제 금융 기구에 의한 500억 US$의 신용 원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멕시코는 이 원조에 대한 담보로 멕시코 자급 의존의 중요 상징인 석유 수지를 바쳐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디요는 순수하게 민주주의에 흥미를 가진 듯 보여 집권 기간 중 지방 선거에서 마침내 야당이 승리하였고 선거 감시 문화도 발전되었다. 사파티스타들도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운영되어 스스로의 내부 조직 역시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하였다.
그러나 반군과 멕시코의 호전적인 경찰병력 양쪽에 의해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학살이나 게릴라 스타일의 활동은 이러한 이상적인 성공을 부지불식간에 약화시키고 있다. 경제와 정치 양쪽에 있어서의 개혁이 멕시코의 국가 의제임은 의심할 나위 없는 것이다. 세디요의 어려운 과제는 정치적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는 멕시코를 혼란으로 몰고 가지 않으면서 집권 여당인 PRI가 휘두르는 철권 통치를 서서히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새롭게 자리잡은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며 모든 평판에서 볼 때 멕시코 의회는 최근 기억 중 가장 훌륭한 의회이다.
source : J2vfi_xQpI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