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t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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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Latvia - 지리, 기후, 역사

2019-02-02 1688
About Latvia

라트비아 (Latvia)

라트비아를 ‘발트의 스위스’라고 비유하려면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 국토의 10분의 1이 해수면 보다 낮으며, 50m까지 낮은 경우도 있다. 산악지대가 거의 없는 작고 평평한 땅으로 이루어진 라트비아는 발트 이웃국가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끼어 있는 습지가 많은 축축한 나라이다. 하지만 라트비아에서는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다. 수도 리가(Riga)는 매력적인 해안도시로 많은 여행자를 끌어들인다.

리가에서 유르말라(Jurmala), 시굴다(Sigulda)성, 전망이 훌륭한 가우야(Gauja)계곡, 룬달레(Rundale)에 있는 라스트렐리(Rastrelli), 등지의 해안 휴양지로 일일 여행을 가기 편리하다. 신생독립국가인 라트비아는 국가건설과 회생에 매우 열성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라트비아인의 30%는 러시아인이며 수도 리가는 라트비아민족이 러시아인 보다 수적으로 열세하다. 이러한 혼란스런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한 빠른 개혁을 막지는 못했고, 결과적으로 긴장된 상황을 가져왔다. 이것은 라트비아를 여행지로 택하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중 하나이다.

통계 자료

국명: 라트비아공화국
면적: 64,589평방km
인구: 262만
수도: 리가(인구874,100)
인종: 라트비아인 57%, 러시아인 30%, 벨라루스인 4%, 우크라이나인 3%, 폴란드인 3%
언어: 라트비아어, 러시아어, 소수민족언어들
종교: 루터교, 로만카톨릭, 러시아정교
정체: 공화국

지리 및 기후

라트비아의 지리적 위치와 면적은 발틱 국가들에서 중간에 해당한다. 북쪽의 에스토니아 보다 크고 남쪽의 리투아니아 보다는 작은데, 하여튼 발트 3국은 동쪽의 이웃나라인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비해 아주 작다. 서쪽과 북서쪽으로는 발트해와 접해 있고, 발트해 안쪽으로 엄지손가락 모양의 리가만이 라트비아 북부 해안 쪽으로 들어와 있다. 동부 라트비아의 비제메(Vidzeme)고지에는이 나라에서 제일 높은 지점인 가이지나 칼른스(Gaizina kalns)가 있으며, 그 높이는311m이다. 라트비아의 약 40%를 차지하는 산림지대에는 엘크, 사슴, 야생멧돼지, 여우, 스라소니, 불곰 등이 많이 살고 있다.

내륙 운하에는 비버와 수달피, 해안가에는 물개가 산다. 또한 라트비아는 흰 황새 6500쌍의 서식처이다(서유럽 전체의 흰 황새 숫자 보다 6배 많다). 리가의 서쪽 가우야강 계곡에 라트비아 유일의 국립공원이 있다. 수많은 자연보호지가 있고 그 중 3곳이 서부 라트비아의 쿠르제메(Kurzeme)에 있다. 11월 초부터 해동기인4월까지는 기온이 섭씨4도 이상 거의 오르지 않으며, 하루에 겨우 몇 시간 밖에 해가 나지 않는다. 6월에서 8월의 낮 시간에는 보통 14도에서 22도 정도까지 기온이 오른다. 7월과 8월은 가장 더운 시기이지만 소나기가 지속적으로 온다. 

역사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지는 적어도 BC 9000년이지만, 현재 라트비아주민의 첫 시조는 아마도 BC3000년에서 2000년 사이에 들어온 피노-우그리족 수렵인으로 추정된다. 현대 라트비아인의 조상들인 발트 족은 BC 2000경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기원후 몇 세기 동안 이 지역의 부족들은 게르만족 및 로마제국과 상거래를 했다. 그 후 그들은 바이킹과 러시아인들과 때로는 무역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을 하기도 했다.

12세기까지 피노-우그리족과 발트 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졌고 모두 자연숭배의 종교의식을 행했다. 로마교황의 북구 이교도에 대항한 십자군 소집령에 따라 게르만 선교단이 이 지역에 들어오지만, 13세기까지 성과는 별로 없었다. 리보니안 결사단(Livonian Order)이라 알려진 붉은 검과 십자가 문장이 그려진 흰 망토를 입은 십자군단이 1290년까지 이 지역을 강제로 개종시킨다. 라트비아는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발트 지역에서 개신교 스웨덴과 카톨릭인 폴란드-리투아니아간의 다툼은1592년 진정된다. 리가를 포함한 라트비아 동부 대부분은 스웨덴의 지배에 들어간다. 스웨덴의 통치기는 압제에 시달리던 라트비아의 긴 역사에서 문명화 기회를 갖게 한 호의적인 일로 회고되고 있다.

17세기 스웨덴 왕은 농노신분의 라트비아 농부들에게 보통교육을 시켰다. 라트비아인에게 교역, 전문직업, 상업, 지적인 영역 등에 참여를 허용함으로써, 농노해방은 라트비아의 민족적 회생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말 러시아화 정책의 비우호적이고 억압적인 과정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는 서서히 스스로 주권을 갖는 자주국가로 부상했다. 라트비아는 세계 2차대전시 독일에 점령되었으나,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바로 7일전인 1918년 11월 18일, 농부, 중산층, 사회주의자 그룹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농민당의 지도자 카를리스 울마니스(Karlis Ulmanis)가 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자와 볼셰비키 및 발틱 독일정당 사이의 분쟁은 러시아가 라트비아 공화국과 영속적인 독립을 보장한다는 평화조약을 맺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1930년대 초 라트비아는 권위주의로 빠지고 1939년 8월23일(나치독일과 소련이 불가침협정을 체결하였을 때) 소련의 영향권 밑에 들어간다.

1940년 8월까지 소련의 군사점령 하에 있었고, 공산당은 ‘선거’에 승리하며 라트비아는 소비에트연방에 속하는 하나의 공화국으로 ‘받아들여’진다. 전제국가화와 숙청이 시작되고 일 년 안에 3만5천의 라트비아인이 사형, 추방, 혹은 망명한다. 독일이 소련을 침입하였고 1941년 라트비아를 점령한다.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나치를 해방자로 생각하였고 독일군대에 지원하지만 라트비아의 유태인 9만 명은 거의 모두 처형되었다. 많은 라트비아인이 1944년과 1945년 붉은 군대의 재 점령을 피해 서방으로 망명하기도 하였지만, 2세계대전 당시 총45만에 가까운 라트비아인이 손실되었다.

그리고 1945년-1949년 스탈린 치하에서 17만5천이 사형 혹은 강제추방 당했다. 소련의 가혹한 라트비아지배가 다소 느슨해지는 최초의 조짐은 1980년 후반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재건)를 고무하기 시작했을 때이다. 수 십 년간의 쓰라린 울분이 자치를 요구하는 대중집회로 나타났다. 1988년 라트비아 정부요원들이 대중집회와 정치모임에 참가하였고, 한편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전면적인 압력은 대규모의 호응을 얻었다.

1990년 봄 민족주의자들은 라트비아국회에서 다수당이 되며,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헌법을 회복시키고 완전한 독립을 위한 과도기를 선포한다. 1991년 초 국민투표의 결과에서 다수가 소비에트연방에서 탈퇴하기를 원하였고,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항한 쿠테타가 일어난 이틀 뒤인 8월 21일 라트비아는 완전한 독립국가임을 선포한다. 이는 서방국가들의 지지를 받았고 1991년9월 6일 마침내 소련도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2주가 지나지 않아 라트비아는 UN에 가입한다.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지는 적어도 BC 9000년이지만, 현재 라트비아주민의 첫 시조는 아마도 BC3000년에서 2000년 사이에 들어온 피노-우그리족 수렵인으로 추정된다. 현대 라트비아인의 조상들인 발트 족은 BC 2000경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기원후 몇 세기 동안 이 지역의 부족들은 게르만족 및 로마제국과 상거래를 했다. 그 후 그들은 바이킹과 러시아인들과 때로는 무역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쟁을 하기도 했다. 12세기까지 피노-우그리족과 발트 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졌고 모두 자연숭배의 종교의식을 행했다.

로마교황의 북구 이교도에 대항한 십자군 소집령에 따라 게르만 선교단이 이 지역에 들어오지만, 13세기까지 성과는 별로 없었다. 리보니안 결사단(Livonian Order)이라 알려진 붉은 검과 십자가 문장이 그려진 흰 망토를 입은 십자군단이 1290년까지 이 지역을 강제로 개종시킨다. 라트비아는 13세기부터 20세기까지 끊임없이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발트 지역에서 개신교 스웨덴과 카톨릭인 폴란드-리투아니아간의 다툼은1592년 진정된다.

리가를 포함한 라트비아 동부 대부분은 스웨덴의 지배에 들어간다. 스웨덴의 통치기는 압제에 시달리던 라트비아의 긴 역사에서 문명화 기회를 갖게 한 호의적인 일로 회고되고 있다. 17세기 스웨덴 왕은 농노신분의 라트비아 농부들에게 보통교육을 시켰다.

라트비아인에게 교역, 전문직업, 상업, 지적인 영역 등에 참여를 허용함으로써, 농노해방은 라트비아의 민족적 회생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말 러시아화 정책의 비우호적이고 억압적인 과정에도 불구하고 라트비아는 서서히 스스로 주권을 갖는 자주국가로 부상했다.

라트비아는 세계 2차대전시 독일에 점령되었으나,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바로 7일전인 1918년 11월 18일, 농부, 중산층, 사회주의자 그룹이 독립을 선언하였고 농민당의 지도자 카를리스 울마니스(Karlis Ulmanis)가 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자와 볼셰비키 및 발틱 독일정당 사이의 분쟁은 러시아가 라트비아 공화국과 영속적인 독립을 보장한다는 평화조약을 맺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1930년대 초 라트비아는 권위주의로 빠지고 1939년 8월23일(나치독일과 소련이 불가침협정을 체결하였을 때) 소련의 영향권 밑에 들어간다. 1940년 8월까지 소련의 군사점령 하에 있었고, 공산당은 ‘선거’에 승리하며 라트비아는 소비에트연방에 속하는 하나의 공화국으로 ‘받아들여’진다. 전제국가화와 숙청이 시작되고 일 년 안에 3만5천의 라트비아인이 사형, 추방, 혹은 망명한다. 독일이 소련을 침입하였고 1941년 라트비아를 점령한다.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나치를 해방자로 생각하였고 독일군대에 지원하지만 라트비아의 유태인 9만 명은 거의 모두 처형되었다.

많은 라트비아인이 1944년과 1945년 붉은 군대의 재 점령을 피해 서방으로 망명하기도 하였지만, 2세계대전 당시 총45만에 가까운 라트비아인이 손실되었다. 그리고 1945년-1949년 스탈린 치하에서 17만5천이 사형 혹은 강제추방 당했다. 소련의 가혹한 라트비아지배가 다소 느슨해지는 최초의 조짐은 1980년 후반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재건)를 고무하기 시작했을 때이다.

수 십 년간의 쓰라린 울분이 자치를 요구하는 대중집회로 나타났다. 1988년 라트비아 정부요원들이 대중집회와 정치모임에 참가하였고, 한편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전면적인 압력은 대규모의 호응을 얻었다. 1990년 봄 민족주의자들은 라트비아국회에서 다수당이 되며,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헌법을 회복시키고 완전한 독립을 위한 과도기를 선포한다.

1991년 초 국민투표의 결과에서 다수가 소비에트연방에서 탈퇴하기를 원하였고,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항한 쿠테타가 일어난 이틀 뒤인 8월 21일 라트비아는 완전한 독립국가임을 선포한다. 이는 서방국가들의 지지를 받았고 1991년9월 6일 마침내 소련도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2주가 지나지 않아 라트비아는 UN에 가입한다.

source : c84x6ZZwH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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