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Germany - 기후, 지리, 역사
독일 (Germany)
독일의 부유함은 겉모습에도 잘 드러나 보인다. 잘 치장된 큰 도시, 화려한 추수행사들, 풍부한 예술과 문화, 방대한 숲만큼이나 다양한 생물 등. 하지만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독일의 역사는 아직도 무겁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 곳 여행자들에게도 이 나라의 복잡한 과거와 오늘날 그 역사의 영향력을 집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통계 자료
정식명칭: 독일연방 공화국(Federal Republic of Germany)
면적 : 357,000 sq km
인구: 8,100만명
수도 : 베를린( Berlin (인구: 350 만명)
) 인종: 다수 백인과 소수 터키인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난민의 대부분이 독일에 흡수되었다.
언어 : 독일어
종교 : 90% 기독교인이며, 200만 여명의 이슬람교인과 30,000여명의 유대교인(유태인 학살 이전에는 50만명에 이르렀다)이 있다.
정체 : 연방 공화국
지리 및 기후
독일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특징적인 몇 개의 지형에 의해 나뉘어진다. 네덜란드에서 폴란드로 이어지는 평평한 북부 저지대는 북쪽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북부독일과 남부를 가르는 중앙고지대는 하르쯔산맥과 바바리아 삼림에 깊은 틈을 만들어 놓은 라인 단층괴로부터 뻗어나와 독일의 심장지대를 이룬다. 라인강과 마인강은 이 지역 남서부를 지나는데, 내륙으로 이어주는 수상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석탄도 풍부했기에 이 지역은 독일에서 최초로 산업화되었다.
독일의 알프스는 바이에른 지역에 위치하며, 오스트리아 접경지대를 따라 빙하시대에 형성된 콘수탄체호수로부터 독일의 남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베르흐테스가덴까지 이어져 있다. 이곳의 산은 남쪽지방보다는 낮지만 그래도 2000m가 넘는다. 알프스 산허리에서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2966m)까지 환상적인 경치를 보여주고 있다.독일은 인구밀도가 높고 산업화된 나라로 자연주의자들을 위한 파라다이스는 분명 아니다.
국토의 3분의 1은 경작지이며, 조금 멀리 여행할 때는 도시를 거치지 않고 여행할 수는 없을 정도로 구석구석 개발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야생생물을 위한 터전은 별로 없다(조류관찰은 물론). 대부분 숲도 독일방식대로 잘 정리 되어있다. 동남쪽 지대의 바바리아 숲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산악 숲 지대이며, 블랙 포리스트는 그래도 야생의 기운이 남아 있는 곳이다. 숲에 사는 동물로는 야생돼지와 사슴, 여우 등이 있으나 우루루 떼를 지어 다닐 정도는 아니다.
독일의 기후는 지역적인 차이는 보이지만 극단적인 변화는 없는 편이다. 가장 쾌적한 때는 5월에서 10월 사이로, 여름철은 북부지방에서도 반팔과 반바지 차림을 할 수 있다. 가을은 독일 여행에 가장 좋은 시기로, 숲 지대는 온통 황금빛으로 물드는 때이고, 관광인파와 숨막히는 더위로부터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참 돌아다니다 보면 아직은 갈증을 느낄 시기이므로 이 때는 독일의 맥주 한잔이 어느 때보다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겨울은 고원지대를 제외하고는 습한 편이다. 특히 눈이 내려 금방 녹아버리는 남쪽지대는 더하다.
역사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전 유럽의 역사를 좌지우지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독일은 국내 분쟁과 외국 정복자의 힘에 눌려 불완전한 독립공국과 도시 국가형태의 혼합 상태로 존재해 왔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브란덴부르크 통치자가 이룩한 프러시아가 들어섰고 1871년에야 비로소 독일은 하나의 통일국가가 되었다. 그 이후에 일어난 많은 중요한 사건들은 독일인들이 자국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도록 하였다.
고대&중세 시대
라인강 서쪽지방과 마인강 남쪽지방은 로마제국의 영토였지만, 그 너머에 있던 야심만만한 용병부족들은 로마도 결코 진압할 수 없었다. 로마제국이 쇠잔해지면서 이 부족들은 작은 왕국들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유럽지방으로 뻗어 나갔다. 아헨국 왕족출신 프랑크족 정복자, 촬르마네가 대부분의 기독교권 유럽을 포함해 거대한 제국을 이룩했다. 그러나 814년 그가 죽음으로써 제국은 분열되었다.AD962년 오토1세(오토대제)가 촬르마네 제국 동쪽지방에 <신성 로마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베네룩스를 포함하는 영토였다. <신성 로마>란 용어는 남아있던 로마 제국의 위엄을 계승하고자 붙여진 것이다.비엔나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가는 13세기 신성 로마제국을 통치하게 되는데, 이때쯤에 이르러 제국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제국은 합스부르크 황제에게는 말로만 충성을 다짐하며 지방 군주들이 실세를 잡았던 도시국가들의 집합체 정도였다. 뤼벡을 중심으로 독일과 발틱 도시국가들이 연합한 한자 동맹이 1358년에 만들어지자 북부독일에 통합의 기운이 깃들었다(570).
종교 개혁
에르푸르트의 수도원출신 학자 마틴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그에 있는 한 교회 문에 95개의 정정사항을 붙인 후, 유럽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루터는 소위 죄를 저지른 자에게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면서 처벌을 면해주는 교회의 돈벌이 사업을 반대하였다. 1521년 교회는 그를 비난하였고 그는 아이젠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그성으로 숨었다. 그곳에서, 그는 희랍어로 쓰여있던 성경을 일상 생활에 사용되는 독일어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구텐베르그가 발명한 인쇄기술로 인쇄되어 대중에게 읽히게 된 것이다.교회를 개혁하려는 루터의 노력은 상인들, 부유한 도시인들, 그리고 무었보다도 야심만만한 독일 왕자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런 기존교회에 대한 반항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운동과 개혁이 일어났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협정으로 도시의 종교는 그 통치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선포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로 불려지기 시작한 기존의 교회는 개혁 반박론으로 알려진 프로테스탄트교회 반대 캠페인을 폈다.
30년 전쟁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국가 사이의 긴장은 유럽 전역으로 발전되어 급기야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은 30년 전쟁(1618-48)으로 이어졌다. 독일은 유럽 권력 싸움의 전장이 되면서 인구의 3분의 1과 수많은 도시, 마을을 잃게 되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모든 지역은 황폐화 되었고, 이것을 복구시키는데는 수세기가 걸렸다.1648년 베스트팔리아(Westphalia) 평화협정으로 독일은 두 종교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였고, 정치분쟁은 종식되었다. 독일어권 국가들은 신성 로마제국의 느슨한 토대 위에 독립적인 공국으로 남게되지만, 주요 영토들을 다른 국가에게 뺏기면서 계속 힘을 잃었다.
프러시아의 독일 통합
18세기는 베를린에 수도를 둔 프러시아 왕국이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로 발전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군인왕)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제)의 뛰어난 조직력으로 프러시아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를 넘어 동쪽으로 팽창했다.19세기 분열되어 있던 독일은 나폴레옹의 정복 대상이 된다. 1806년 아우스텔리츠(Austelitz)에서 패한 후 오스트리아 출신 황제 프란시스 2세는 신성 로마 황제직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강인한 독일 저항의 주무대인 프러시아는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무참히 패배한 후, 독일은 나폴레옹의 독일 침략 야망을 1813년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산산히 부수며 승리했다. 1815년 비엔나의회가 유럽의 국경선을 재정리하였을 때, 35개주로 구성된 독일연합이 신성 로마제국을 대체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총독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의회를 이끌게 되었다.
독일 연합은 1830년과 1848년 유럽에서 일어난 자유혁명으로 분열되지만 오스트리아 궁정은 분열된 독일을 계속 지배했다. 프러시아의 잘 다듬어진 군사력과 시민정신이 마침내 이런 상태를 깨뜨려, 1866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철의 재상)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단숨에 북부독일을 합병시켜 나갔다. 1871년 프러시아가 프랑스에 승리를 거둔 후 남부독일의 카톨릭세력과 반프러시아 국가들은 비스마르크와 협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프러시아의 왕 빌헬름 1세는 독일 황제(카이저)가 된다.
제 1차 세계대전과 히틀러 등장
빌헬름 1세의 아들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1890년 추방시켜 버리지만, 이후 급속히 성장하는 독일의 정치적 이슈를 카이저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국, 러시아, 프랑스와의 긴장상태는 점점 심해지고, 마침내 1914년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 당시 독일의 유일한 동맹국은 힘이 약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뿐이었다. 전쟁으로 독일의 힘은 더 빨리 약화되었고 1918년 독일은 평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저는 폐위되어 네덜란드로 도망치고, 전쟁과 상실감이 증가하면서 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쯤 나라에 대한 분노가 터져 버리고 만다.
베를린에 기지를 둔 스파르타쿠스 동맹이 주축이 되어 전면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이 봉기하지만, 그 지도자 칼 리베크네흐트(Karl Liebknacht)와 로자 룩셈부르그(Rosa Luxemburg)가 처형되면서 진압된다. 이어 바이마르공화국이 들어선다.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은 거대한 독일 영토를 잘라 버리고 엄청난 액수의 전쟁보상금을 부가한다. 프랑스와 벨기에가 계속적으로 보상을 요구하면서 라인강 지역을 점령했지만, 사실상 이를 지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계속된 물가인상과 비참한 경제환경 때문에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이 출연하게 되었다. 이들 중 한 명이 오스트리아출신의 독일 군인 아돌프 히틀러로, 그가 세운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 당(Nazi)은 1923년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나 실패로 돌아간다. 이로 인해 히틀러는 9달간 감옥에 갇히고 그곳에서 그의 저서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쓴다. 1929년 세계 경제공황은 특히 독일에 큰 영향을 미쳐 무수한 실업자, 파업과 거리의 시위를 야기시켰다.
에른스트 탤만이 이끌던 공산주의자당이 지지를 얻기도 하지만 부유한 자본가들은 나찌당을 지원하기 시작하고 경찰은 나찌당의 거리 시위대를 눈감아주게 되었다.나찌당은 일반 선거에서 힘을 더해가며 1933년 선거에서는 사회 민주주의당을 이기고 국회에 다수당으로 입성한다. 히틀러가 총독으로 임명되고, 다음해 그는 제3공화국이라고 부른(제3공화국이란 앞선 신성 로마제국과 빌헬름 1세의 독일제국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국가 최고 통치자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 분단
1935년부터 독일은 고속도로 건설 같은 전략적인 공공사업을 벌이며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히틀러는 1936년 라인강 지역을 재점령하고, 1938년에 체코슬로바키아 일부와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드디어 1939년 9월 스탈린과 '양국이 동유럽에서 자유롭다'는 협정에 서명한 후, 히틀러는 폴란드를 공격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독일은 재빨리 유럽의 많은 영토를 침략하지만 1943년부터 늘어만 가는 막대한 손해를 보기 시작한다.
무차별적인 폭탄공격으로 독일의 중심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고, 인구의 10%가 줄어들게 되었다. 독일은 1945년 5월 히틀러의 자살 이후 무조건 항복을 했다. 2차 세계대전에 일어난 최대의 비극은, 수백만의 유태인, 집시들이 역사상 최초로 집단 살해된 것이었다. 인종주의자 나찌당의 원리에 입각하여,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분류된 이 사람들을 유럽에서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수용소들이 세워졌다.얄타와 포츠담회의에서 연합군은, 독일을 26전 베르사이유조약에서 결정했던 것보다 4분의 1이나 축소해 국경을 재조정하였다.
동독에 살던 약 650만 독일 민족들이 이주 당하거나, 수 세기동안 살아온 동유럽에 있는 자신의 집을 빼았긴 채 독일로 쫓겨났다. 독일은 네 개의 점령지로 분할되었고 베를린에는 승리한 4개국이 연합하여 주둔하였다.소비에트 점령지에서는 사회주의연합당(SED)이 1946년 선거에 승리하며 빠르게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1948년 6월 구소련은 독일의 서방 점령지와 베를린 사이의 모든 육로교통을 차단하였다. 이 때문에 서방연합군은 유명한 베를린 공중보급(Berlin Airlift)이란 군사작전을 펴면서 구소련이 1949년 5월, 봉쇄를 풀 때까지 서베를린 지역에 비행기로 물자를 공급해야했다. 1949년 9월 독일연합공화국(BRD-구서독)이 서방지역에 들어섰고, 이에 대응해 다음달에는 구소련 주둔지에 독일민주공화국(DDR-구동독)이 베를린에 수도를 두며 형성되었다.
분단에서 통합까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서방의 보호를 받으며 서독은 전후 미국으로부터 거대한 양의 자본을 받으면서 콘라트 아덴라우어의 지휘아래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동시에 동독은 구소련에 전쟁보상금으로 천억달러를 지불하며 거의 빈손으로 재건을 시작했다.서독의 경제적 우위는 비참한 동독의 숙련된 노동자들을 유혹하여 도망치게 했다. 동독은 이 사람들을 잃으면서 큰 타격을 받고 급기야 1961년에는 서베를린 둘레에 장벽을 쌓아 서독과의 국경을 봉쇄하기에 이른다.
냉전이 심화되면서 양 독일 진영의 TV와 라디오방송은 서로의 체재를 비난하는 방송을 부지런히 내보냈다.동독의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의 융통성있는 지도와 어울려, 서독의 오스트폴리티크(동독문제전담부)의 총독, 빌리 브란트는 두 독일 사이의 편안한 정치관계를 만들어 냈다. 1971년 구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독일에 주둔하던 4개국은 공식적으로 베를린의 분할을 인정하며 동의했다. 그러나 정작 서독은 많은 다른 서방국들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동독을 승인하지 않았다.
비록 서독이 누리는 번영의 반도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호네커의 정책은 동독에 높은 생활 수준을 창출했다. 1985년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구소련의 정권을 잡은 후로 동독 공산주의당은 구소련의 지지를 점차 잃게 되었다. 1989년 헝가리는 국경선 부근의 통제를 느슨히 하며 동독인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허락했다. 다른 동유럽국들과 마찬가지로 개혁을 요구하는 군중시위가 라이프찌히에서 일어났고, 곧 동독의 다른 도시로 퍼져 나갔다.
동독 정부는 헝가리로 여행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망명을 결심한 사람들은 프라하의 서독대사관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고르바초프는 동독에 개혁을 종용했지만 호네커는 거절하였다. 사임한 호네커를 그의 보안 책임자였던 에곤 크랜쯔(Egon Krenz)가 대신했으나 동독을 구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크랜쯔는 자유선거를 약속했으나, 교활하게 11월 9일(나찌의 유태인 박해 수정일)을 선택하여 베를린 장벽을 열어야했다. 이 때문에 그날은 독일 공휴일로 축하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 지도권내의 부정부패가 밝혀지면서 크렌쯔와 그의 정치국은 한스 모드로우(Hans Modrow)가 이끄는 라이벌 개혁당 SED를 지지하며 권력을 내 주어야했다.평화와 인권보호 활동주의자들은 자유스런 사회주의적 동정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동독내에서 오랫동안 반대세력의 주축이었다. 개혁을 선호하던 대중의 분위기는 갑자기 바뀌어 서독과의 완전한 통일을 원했다. 헬무트 콜이 이끄는 기독민주연합당(CDU)은 동독 통화를 1대 1로 바꾸어주는 후한 환율을 적용하며 통일의 빠른 진전을 도모한다. 만약 1대 1 환율이 아니었다면 동독화폐는 환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신의 몰락을 직접 체험하게되는 시민층 반대세력과 아울러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의 끝으로 몰리며 소외감을 느낀다.경제 전문가들은 근본적으로 경제구조가 다른 양 체재를 급속히 통합한다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동독기업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나 동독의 신임 CPU수상 로트아르 드 마지에르 (Lothar de Mazi re)는 1990년 7월 1일 통화통합을 결정한다. 콜 수상도 서독국민들에게 통일을 한다해도 세금을 올리는 일은 없을 거라며 안심시킨다. 그해 9월 동.서독과 연합군은 2 플러스 4 조약(Two-Plus-four Treaty)에 사인하고 전후 점령지 체재를 마감한다. 독일은 1945년 이후로 폴란드와 구소련에 합병된 영토를 받아들이고 동쪽 국경선을 승인한다. 1990년 10월 3일 독일민주공화국이 독일연방공화국(Federal Republic of Germany)으로 합쳐진다. 콜수상이 이끄는 CPU 연합당이 1990년 12월 2일 전독일 선거에서 야당 사회당을 물리친다.
중간에 선 나라 독일
많은 염세주의자들조차 통일에 드는 엄청난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예측하지 못했다. 동독과 서독은 곧 서로서로를 베시스와 오시스(Wesis, Ossis-서쪽 사람, 동쪽 사람이라는 뜻)라 부르며 자신들이 생각했던 차이보다 실제로는 더 큰 차이가 존재함을 깨닫는다.낮은 경제성, 다량의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많은 동독기업들은 수백만을 실직자로 만들며 문을 닫아야 했다. 정부는 1992년 후반세계적인 불경기가 독일로 밀어닥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통일 붐"을 유도하며 막대한 공공비를 지출한다.
스타치(Stasi), 동독 비밀경찰에 협조한 자료의 발표는 '신'민주주의자들의 사희 불신을 심화시킨다. 수 백명의 전직 SED관료와 판사들이 동독시절에 저지른 인권 침해으로 고발된다. 에리히 호네커는 쇠약해진 건강 때문에 살해죄는 면하나 칠레로 쫓겨가 그곳에서 1994년 5월 생을 마감한다. 문제는 계속 일어나고 있지만 동독의 장기적 전망은 밝다. 동독은 서독의 많은 지역도 갖추지 못한 최신장비와 기술을 받아들이고 있다. 1994년은 일대 전환기로 사회, 경제상황은 눈에띌 만큼 향상되었다.
한때 독일에 주둔했던 5천명의 러시아군인, 연합군과 그 가족들은 1994년 후반 철수하게 된다. 신나찌당은 동독전역에 불어 닥친 불경기와 동독지방의 혼란을 이용하려 하지만 약한 지지기반으로 의회에서 대여섯 좌석만 확보한다. 극우 동정주의자들이 이민자를 공격하고, 보호소 운영을 지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힘든 통일과정을 맛보며 동시에 유럽통합이라는 벅찬 과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독일은 '중심에 선 나라'라는 역사적 역할을 되찾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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