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Israel - 지리, 기후, 역사
이스라엘 (Israel)
종교, 정치, 갈등, 역사, 사회적 불평등, 군대.. 언뜻 느끼기에는 이런 이스라엘의 이미지가 '번잡스런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휴일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매력적일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것들이 매년 이스라엘로 수많은 관광객과 이민자를 끌어당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 있는 기독교인, 유대교인, 이슬람교인들이 한 번 쯤 와서 이 곳의 성스러움을 보고 싶어하는 동시에 또한 증오와 갈등으로 그들을 이끄는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순은, 신의 발자취를 따라 메시아의 기운을 느끼고자 왔던 사람들을 실망과 함께 돌아가게 만든다. 숙연한 침례의 순간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는, 북적거리고, 악취가 진동하고, 시끄러운 현대의 여느 나라와 다름없는 이스라엘이 충격적이다. 게다가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쥐어짜게 하는 것은 여느 미국의 성지마을과 다를 게 없다.
'이스라엘'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이 곳을 여행한다면 따분한 여행 끝에 무미건조하게 집으로 돌아 갈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대표적 이미지인 종교적인 역사가 여행의 주된 매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새로운, 세계적인 도시 텔아비브를 둘러보고, 에일랏(Eilat)의 홍해에 뛰어들어 보기도 하고, 무성한 국립공원에서 자연도 느껴보고, 사해의 소금물에서 몇 시간 떠 있어 보는 여유도 가져본다면, 성지순례 이외의 이스라엘여행의 매력에 흠뻑 빠질 것이다. 또 현재의 이스라엘을 이해하려면 과거의 전설적인 모습 너머를 지나 버스운전사나 호스텔주인과 얘기를 나눠보자.
미묘한 이 지역의 성격상, 이 곳을 어떻게 칭하던지간에 100% 모두를 만족할 수는 없다. 우리는'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지구'로 결정했지만, 때론 시간 절약상 그냥 '이스라엘'이라고 표기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웨스트 뱅크(West Bank), 골란고원(Golan Heights)과 가자지구(Gaza Strip)같은 논쟁지역은 물론 이스라엘 국토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통계 자료
국명: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구(Israel & the Palestinian Territories)
면적: 20,770 sp km
인구: 550만명
수도: 예루살렘(Jerusalem : 인구 592,000명)
인종: 유대인(80%), 이슬람인(14.4%), 기독교인(2.9%)과 드루즈인(1.7%)
언어: 히브리어, 아랍어, 영어
종교: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정체: 공화국
지리 및 기후
벨기에(Belgium)보다 작은 이스라엘은 서쪽으로 지중해, 북쪽으로 레바논(Lebanon)과 시리아(Syria), 동쪽으로 요르단(Jordan), 남쪽으로 이집트(Egypt)와 국경이 접해 있다. 두드러진 지리적 특성은 터키(Turkey)에서 연결되어 이스라엘을 지나 아프리카까지 뻗은 리프트밸리(Rift Valley)로, 요단강(the Jordan), 아라바(Arava)와 훌라(Hula)계곡, 갈릴리 호수 그리고 사해(Dead Sea)가 이 리프트 밸리에 속한다.
강이 많지 않아(요단강이 유일한 주요 강임) 습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북쪽지역에서만 농업을 한다. 나라의 주요 물공급원인 사해는 지구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엄청나게 짜다. 사해 왼편으로 유대사막(the Judean Desert)이 있고, 더 남쪽으로 가면 네게브사막(the Negev)이 있다. 지리적 특성상 이스라엘은 세 지역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로 인해 이곳에서 풍부한 야생동식물들을 접할 수 있다. 북부 이스라엘은 습한 산악지대로, 월계수림과 수달의 서식처이다.
남부는 사막지대이며 야생튤립, 붓꽃, 대추야자나무를 볼 수 있다. 또한 남,북반구가 교차하는 이 곳은 세계 각 처에서, 각종의 철새들이 날아드는 두 번째로 큰 이동로이다. 이스라엘의 5분의 1은 국립공원으로 -300여개 정도-, 이 곳에는 성서시대 이후 멸종된 많은 동식물종이 다시 서식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사람들은 사막이 이들의 생태계 공원으로 바뀐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 한다. 국립공원과 환경문제에 대한 정보는 이스라엘의 '자연보호협회(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Nature)'로 연락.
이스라엘의 기후를 꼭 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예루살렘에선 눈이 오는가 하면 사해근처는 섭씨 23도로 화창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은 온화하고 여름과 겨울, 2개의 계절로 구분된다. 11월에서 3월까지의 겨울은 상당히 춥고, 북부는 매우 습하다. 여름은 바다쪽은 상당히 뜨겁지만(에일랏은 섭씨 40도까지 올라간다.) 사막지대는 밤에 꽤 춥다. 봄에는 강풍이 불어 기온이 많이 올라간다.
역사
이스라엘은 역사상 부유한 나라는 아니다. 이멜다 마르코스와 같은 근거없는 부자라고나 할까. 다분히 문학적이고, 왕족의 이름이 가득히 장식된, 평화의 순간이 거의 없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현재까지 깊게 괸여하고 있다. 천년 전 갈등이 현재의 사건으로 연결되는 이 나라에서 역사는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은 아브라함이 유목민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 이끌고 와, 가나안(Canaan)산에 정착시킨 기원전 1800년부터 시작되었다.
기원전 1023년 사울(Saul)과 그 뒤를 이은 다윗이 왕국을 형성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해 수도로 정했다. 기원전950년 경,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인 예루살렘 제일사원(First Temple of judaism Jerusalem)을 세웠다. 사원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의 침략으로 파괴되었지만, 결국 재건되었다. 막강한 로마제국이 기원전 63년에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헤롯(Herod)과 성 빌라도를 포함한 총독의 지배 아래 놓였다. 이 때가 예수가 살아서 이스라엘에서 설교했다고 알려진 시기이다.
칼리굴라(Caligula)의 지배 하에, 제국의 광기가 날이 갈수록 더해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4년동안 계속됐지만 사원이 다시 파괴되었을 때 마침내 패배했다. 2차 반란 후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신도시 알리아 캐피톨리나(Aelia Capitolina)가 그 폐허에 건설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영토로 정해졌다. 이 패배는 유대 영토의 종말이자, 유대인들이 뿔뿔이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작으로 기록되었다.
331년 콘스탄티누스대제는 기독교인이 되어, 이전까지 불법이었던 종교를 승인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성지에 대해 알고 싶어했고, 성묘교회(Holy Sepulchre)와 탄생교회(Nativity)같이 많은 건물들이 종교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나타내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 세워졌다. 하지만 나라에 퍼졌던 기독교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638년 예루살렘이 칼리프 오마(Caliph Omar)에게 넘어가서, 마호멧(Prophet Mohammed)의 성전산(Temple Mount)승천을 근거로 이 곳을 이슬람의 성지로 선언했다.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이 신성모독에 격분하여, 1099년까지 군대를 합쳐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눈에 띄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거의 100년동안의 기독교 지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1187년까지 수십년동안의 기독교/이슬람교도의 난투 끝에 이슬람교도들은 다시 우위에 놓이고, 이슬람무사들이 1291년에 최후의 십자군 성채를 함락시켰다. 이 후 500년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조용했던 시기이다. 제국이 세워지고, 무너지고, 나라의 지배권이 단조롭게 변해가는 중 약간의 분쟁이 이스라엘 땅에서 있었지만 - 전쟁이 일상화된 이스라엘사람들에게는 아주 평화로운 시기였다.
유일한 변동이 16세기에 있었는데, 오토만제국이 지배하고 대술만이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한 것이다. 19세기 중반 오토만제국이 지배권을 잃고, 세계의 이목이 다시한번 이스라엘에 집중되었다. 영국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열고, 1839년 영국계 유대인 모세 몬테피오르(Moses Montefiore)경이 유대국가에 대한 개념을 정립해, 1878년 최초의 유대식민지가 세워졌다. 그 훨씬 이전에 최초의 앨리야(Aliyah)를 비롯한 이민자들의 물결이 시작되었고, 이와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민족주의적이고 반유럽적인 성향이 강화되었다. 1차세계대전 때 영국은, 아랍인들에게는 아랍 영토를 인정해 준다고 약속하고, 유대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 국가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이스라엘통치에 깊이 관여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은, 이 나라의 통치국으로 지정되어, 유럽이 2차대전으로 옮겨갈 때 영국은 이스라엘로의 모든 이민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필사적인 불법이민자들이 계속해서 도착했고, 아랍인들의 폭력행사도 계속 증가추세였다. 1947년 영국이 지쳐갈 무렵 그들은 나라를 아랍과 유대지구 둘로 나누는 것으로 결정하고 1948년 5월 14일 물러났다.
거의 곧바로 분쟁이 터져 1949년 휴전이 선언되었을 때 이스라엘군은 대부분의 팔레스타인을 손에 넣었다. 이주를 원하는 유대인은 누구에게나 시민권이 주어졌고, 이스라엘인들은 가장 황폐한 지역까지도 자리를 잡고 구석구석 개척하기 시작했다. 우호적이지 않은 아랍국가들에 둘러싸여, 새로운 이스라엘은 금방 공격을 당하게 됐다.
1967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그 뒤 요르단, 시리아와 전쟁을 치뤘다. 6일 후 이스라엘인들이 승리했고 영토를 골란고원, 웨스트뱅크, 가자지구와 시나이사막까지 확장했다. 이스라엘의 터프한 출발은 유대인 이민자들을 다시 불러들였고, 그 동안 500,0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땅을 나가게 만들었다.
계속 머물어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들의 고국을 되찾을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결성했다. 그러는 동안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수년의 PLO활동이 국제적 비난 정도였지만, 1987년 유명한 팔레스타인 폭동인 이니파다(Inifada)가 일어나, 상황은 역전되었다. 무력한 아랍어린이들을 쏘는 이스라엘군인들이 텔레비젼에 방영되 팔레스타인의 주장이 힘을 얻었고, 그들의 조국을 되찾는 것에 대한 세계의 호응이 커졌다.
1991년 이스라엘대표단은 팔레스타인쪽과 만났고, 결국 PLO 대표인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와 이스라엘 수상 라빈(Rabin)이 백악관 잔디밭에서 악수를 하고, 평화를 위한 협력에 동의했다. 그러나 당연히 이 협력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가자지구과 웨스트뱅크 일부가 팔레스타인 자치로 주어지고, 팔레스타인 선거가 열렸지만 1995년 라빈이 암살당했다.
그의 오른팔이었던 벤야민 네타냐후(Binyamin Netanyahu)는 평화에 대해 열성적이 아니었고, 그의 집권기 동안 증가하는 이스라엘인 정착과 테러리스트들의 보복이 이 나라를 벼랑으로 몰고갔다. 1999년 에후드 바락(Ehud Barak)의 선거에서 이스라엘은 한번 더 평화를 수용하는데 기회를 걸었다.
source : E0uLbeQlwj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