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udi Ara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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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Saudi Arabia - 지리, 기후, 역사

2019-02-01 1714
About Saudi Arabia

사우디아라비아 (Saudi)

아라비아는 몇 세기 동안이나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어왔다. 광대하게 펼쳐진 사막은 이슬람교를 탄생시켰으며 아랍 인종의 고향이고 이슬람교도들에게 신성시되는 아랍 언어가 태어난 곳이다. 또한 이곳은 이슬람의 두 신성한 도시인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가 자리하고 있으며 현대적이고 석유로 부를 쌓은 번창한 거대 도시들이 있다.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는 관광이 엄청나게 어렵다는 점에서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 이 나라에는 관광비자 같은 것이 없다. 그러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여행이 가능하게 된다면 사막과 산의 풍경 그리고 중동에서 가장 뛰어난 고고학적 유적 중 몇 곳을 방문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보수적인 종교와 오일 붐을 타고 이룩된 현대화의 물결을 요지경처럼 다루는 이 사회의 매혹적인 모습도 빼놓을 수 없

통계 자료

국명 : 사우디아라비아 왕국(Kingdom of Saudi Arabia)
면적 : 2,200,000 sq km 
인구 : 1500만 명 
수도 : 리야드(Riyadh, 인구 1,500,000)
인종 : 아랍인, 베두인인, 나지디스인,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의 국외 추방자들
언어 : 아랍어, 영어
종교 : 이슬람
정체 : 왕정체제
수장 : 파드(Fahd) 왕

지리 및 기후

대략 2,200,000 sq km 넓이의 사우디 아라비아는 거의 사막으로 이루어져있다. 남동쪽은 오만과 예멘, 아랍에미레이트(UAE), 북쪽은 이라크와 쿠웨이트, 그리고 서쪽은 요르단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서부는 이 나라 전체에 뻗어있는 산맥으로 덮여 있으며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높고 넓어진다.

국토의 반정도(프랑스 크기)가 루발칼리(Rub' al-Khali, 비어있는 영토)로 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 사막이다. 두 번째로 큰 모래 사막인 나푸드(Nafud)는 국토의 북서쪽으로 뻗어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앙과 북부는 거의 자갈 평원이다. 동부는 편평하며 낮게 위치해 있는 사브카스(sabkhas, 소금 평원) 지역이다. 주요 지리학적인 특징으로는 거대한 알 하사(Al-Hasa) 오아시스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막이 이렇게 많은 까닭에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많은 동식물들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몇몇 사막에서 자라는 타마린드와 아시르(Asir)의 산림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상록수를 비롯해 관목들이 다수 자란다. 보고 싶은 것이 동물이라면 낙타를 좋아하는 편이 낫다. 이 동물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동물이며 야행성 고슴도치나 몇몇 지역의 모래 고양이, 그리고 아시르의 망토비비 등도 눈에 띤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은 극단적인 기후를 가지고 있다. 4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는 낮 동안 45도나 그 이상 올라간다.

겨울(12월에서 1월)은 도시에서 모든 것이 시원해진다. 이때는 낮 동안 15도 정도까지만 올라가며 중앙 사막에서는 밤 동안 더 쌀쌀해진다. 연안 지역에서는 정기적으로 비가 내려 여름에는 습도가 높아지지만 수도인 리야드에서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역사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동부는 BC 4,5천년 전에 이라크 남부에서 사람들이 처음 이주해와 살기 시작했다. 나바티인들은 초기에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BC 1세기 경에는 다마스쿠스까지 뻗어 내려갔다. 18세기 초기에 현재의 사우디 아리비아 수장 가문인 알사우드(Al-S명)는 리야드 근처에 있는 디라이야(Dir'aiyah) 오아시스 마을의 수장가문이었다.

그들이 18세기 중엽에 모하메드 빈 압둘 와합(Mohammed bin Abdul Wahhab)과 함께 연합하여 와하비즘으로 알려진 원리주의 종교 운동을 벌였으며 이는 아직도 사우디아라비아 이슬람교의 공식적 형태이다. 1806년에 와하비즘의 개종 군대는 대부분의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지역과 남부 이라크의 상당부분을 정복하였다. 서부 아라비아는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오토만 제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마음에 들리 없었다.

1812년 제국은 서부 아라비아를 다시 점령하였고 19세기 말까지 알사우드는 쿠웨이트로 퇴각해 피난처를 찾았다. 여기에서 알사우드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인 이븐 사우드(Ibn Saud)가 저항하기 어려운 애국심, 전술, 외교 전략을 내세우면서 들고일어나 리야드를 재점령하고 1925년에는 제다(Jeddah)까지 되찾았다. 1938년 세브론사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상업화가 가능한 막대한 양의 석유를 발견하였고 2차대전이 발발하자 오일 생산이 실현되었다.

1950년대까지 왕족들은 일주일에 백만 불을 운용하였고 1960년까지 정부생산의 80% 수익은 석유에서 나왔다. 1973-74년의 아랍 석유 금수 조치는 유가를 네 배나 뛰어오르게 만들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정부가 돈더미를 긁어모으는 동안 건축 붐이 일어나면서 사우디아라비아는 거대한 공사장으로 변했다.

그러나 오일 붐은 나라 밖으로부터 많은 이해관계를 발생시켰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주변국들간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다. 1987년 400명의 이란인 순례자를 학살한 사건으로 이란은 몇 년 동안 순례를 거부했다.이라크가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사우디는 걱정거리를 안게 되었고 미국에 왕국을 보호할 군대를 보내주길 요청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침공을 당하지 않았지만 이 위기는 정치적인 변화를 불러 1993년 왕은 자문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 위원회 구성원들은 왕이 임명하며 법안 제정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민주주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우디아라비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임에 틀림없다.

source : QcR3yeyBJ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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