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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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India - 지리, 기후, 역사

2019-02-01 1992
About India

인도 (India)

문화적 선입견에서 벗어나려 열심히 노력하고 화장실에서 휴지를 쓰는 기쁨을 포기한다 해도, 인도는 여전히 그 규모와 떠들썩함, 다양함으로 우리를 스쳐 지나고 만다. 인도에서는 이쪽의 기대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기대하지 않은 일이 다양한 형태로 닥쳐와 항상 옆에 앉아있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인도 여행은 많은 여행자들에게 일종의 테스트 같은 것으로, 몇몇 여행자들은 비행기에 올라타 그 지긋지긋한 나라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한다.

그러나 복잡한 우주론을 탐구하는 것을 즐기고 지나치게 육욕적인 생활을 사는 보람으로 삼고 부조리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라면, 인도는 지구상에 전개되는 중 가장 복잡하고 체험해 볼만한 드라마를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통계 자료

국명 : 인디아 공화국(Republic of India)
면적 : 3,287,000 sq km (1,281,900 sq m) (분쟁이 잦은 국제 국경지역)
인구 : 9억 6,800 만명 (증가율 2.1%)
수도 : 뉴델리(New Delhi, 인구 1010만) 
인종 : 인도-아리안 족 72%, 드라비다 족 25%, 몽고족 3%
언어 : 힌두어 및 영어, 그 외 15가지의 주요 언어와 700가지 이상의 방언이 있음 
종교 : 힌두교 82%, 이슬람교 11%, 기독교 2% 시크교 0.7% 불교 0.7% 자이나교 0.7
정체 : 민주정 대통령 : Pratibha Patil

지리 및 기후

방글라데시는 벵갈만의 만곡부에 위치하며 인도에 둘러 쌓여 있고 남동쪽은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매우 평평한 평지로 갠지스-브라마푸트라-자무나(Ganges-Brahmaputra-Jamuna) 삼각주가 어울려 있다. 방글라데시의 경계선과 해양은 퇴적암 상승, 수류, 물줄기, 홍수지역, 실트 등의 애매한 지역이다. 90%이상이 충적토 평지로 해발 10m 이하이며 동북부와 남동부는 240-600m의 높지 않은 구릉이 존재한다. 대략 방글라데시의 2/3이 비옥한 경작지며 10% 정도가 삼림지역이다.

벵갈 호랑이, 표범, 아시안 코끼리(대부분 비하르에서 이주함), 소수의 흑곰, 다수의 원숭이, 아시아 남부 원숭이, 기본(아열대 지역의 꼬리 없는 원숭이), 수달, 몽구스가 서식하고 있다. 파충류는 바다 거북이, 진흙 거북이, 강 거북이, 비단뱀, 악어가 서식하며 다종의 독사가 살고 있다. 600종 이상의 조류도 분포하는데 찌르과의 새들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가장 환상적인 건 물총새다.

방글라데시의 기후는 아열대와 열대기후로 겨울은 낮 최저 평균기온이 21도, 여름은최고 평균기온이 35도다. 세 계절로 구분되는데 우기는 5월에서 10월초, 겨울은 10월 중순부터 2월말, 여름(방글라데시인은 적은 우기로 부름)은 3월 중순부터 5월 중순이다. 또한 싸이클론 계절은 5월-6월과 10월-11월이다. 방글라데시의 계절은 기온이 건조하고 신선한 겨울이 가장 좋은 시기이다. 4월은 습하고 너무 더워 피하는 게 좋다.

역사

인도 최초의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 인더스 강 계곡에서 1000년 가량 전성기를 누렸다. 대도시였던 모헨조다로(Mohenjodaro)와 하라파(Harappa)(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에 위치)에서는 사제를 지배계급으로 하는 복잡한 문명이 꽃피고 힌두교의 기본 원리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1500년에서 200년 사이에는 중앙 아시아에서 온 아리아족 전사들이 인도 남부를 휩쓸면서 현재의 마드야 프라데쉬(Madhya Pradesh) 지역에 있는 빈드야(Vindhya) 고지 지역까지의 남부 인도를 확실히 장악했다.

그들은 드라비다인(Dravidian) 원주민들을 남쪽으로 밀어내었다. 침입자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를 비롯해 소를 키우고 고기를 먹는 전통을 가지고 들어왔지만, 기원전 8세기가 되자 어느 정도는 동화되어 승려 계급은 다시 우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는 카스트 제도 속에서 강화되었고 이 계급질서는 브라만 승려들의 지위를 보장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엄격한 규칙에 의해 유지되었다. 기원전 500년경 불교가 일어났고 카스트 제도를 비난함으로써 브라만 힌두교에 강력하게 도전했다.

불교가 힌두교를 강력하게 밀어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황제에 의해 수용되면서였는데, 무굴 제국이 성립되기까지 이후의 그 어떤 지배자도 아소카 황제만큼 인도 전역을 통제하지 못했다. 마우리아 왕조의 멸망 이후 많은 제국이 일어나고 무너졌지만 그중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나라는 굽타(Gupta) 제국으로 기원후 4세기에서 606년까지 지속되었다. 굽타 제국 시기는 시, 문학, 예술의 황금기로 아잔타(Ajanta), 엘로라(Ellora), 산치(Sanchi),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예술 작품 중 많은 부분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힌두교는 다시 부흥했고 불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훈족(Huns)의 침입은 굽타 왕조의 종말을 알렸고 인도 북부는 많은 힌두교 왕국으로 분리되었다. 이 왕국들은 이슬람교도들이 들어올 때까지 다시 통일되지 못했다. 인도 최남부는 북쪽 왕국들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이 지역의 힌두교는 불교나 자이나교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

남부의 번영은 이집트, 로마, 남동 아시아와의 오랜 교역 유대에 기반한 것이었다. 남부에서 일어난 대제국으로는 판드라스(Pandyas), 체라스(Cheras), 차루카스(Chalukyas), 팔라바스(Pallavas), 촐라스(Cholas) 등이 있다. 힌두 왕국이 남부를 지배하고 북부에서 불교가 수그러드는 동안 중동의 이슬람 세력이 서서히 인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1192년 이슬람 세력은 영구적인 기반을 마련했고 이후 20년이 흐르는 동안 갠지즈 분지 전체가 이슬람 세력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델리의 이슬람 술탄 왕조는 내분이 심했고, 이슬람 세력은 남부를 손아귀에 넣는 데는 실패했다. 이 지역은 기원후 1000년에서 1300년까지 호이살라(Hoysala)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현재의 카르나타카(Karnataka) 지역에서 두 대제국이 발달했는데, 하나는 햄피(Hampi)에 아름다운 수도를 건설했던 강력한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라(Vijayanagar) 왕조였고 다른 하나는 각각 베라(Berar), 아흐메드나가르(Ahmednagar), 비자푸르(Bijapur), 골콘다(Golconda), 아흐메다바드(Ahmedabad)에 중심지를 둔 다섯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던 바흐마니(Bahmani) 이슬람 왕국이었다.

무굴 황제들은 인도 역사의 거인들이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펀잡(Punjab)으로 진군해 와 1525년 파니팻(Panipat)에서 델리 술탄들을 패배시키고 건축, 예술, 문학의 또다른 황금시대를 열었다. 무굴 제국은 빠른 속도로 권력을 잡았지만, 그 쇠퇴 역시 빨라서 사실상 여섯 명의 위대한 황제가 있었을 뿐이다.

낮은 카스트 출신이었던 시바지(Shivaji)의 영웅적인 업적 덕분에, 17세기 동안 마라타(Maratha) 제국이 성장했고 서서히 무굴 제국의 영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마라타 제국은 최후의 대 제국 세력이었던 영국에게 패배할 때까지 중앙 인도의 통제권을 굳게 쥐고 있었다. 인도에서의 영국 세력은 처음에는 동인도회사를 통해 행사되었는데 이 회사는 1612년 구자라트(Gujarat)의 수라트(Surat)에 무역 거점을 확보했다.

영국은 17세기에 인도에 손을 뻗쳤던 첫번째 유럽 국가도, 유일한 유럽 국가도 아니었다. (무굴 제국이 인도를 점령하기도 전인) 1510년 이후 포르투갈은 고아(Goa)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역시 무역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다. 영국의 세력은 클라이브(Clive)가 캘커타를 다시 확보했던 1757년에서 영국이 제 4차 마이소르(Mysore) 전투에서 승리한 1799년 사이 점차 확대되었다. 마라타 제국과 영국사이의 긴 싸움은 결국 1803년에 마무리지어졌고, 인도의 거의 모든 지역이 동인도회사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를 주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장소로 생각했고, 인도의 문화, 신앙, 종교는 손대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영국인들은 철광과 석탄 광산을 확장하고 차, 커피, 목화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발전시켰으며 인도의 광대한 철도 노선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은 부재지주 제도를 장려했는데, 부재지주제가 운영과 징세의 부담을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가난하고 소유 토지가 없는 농민들이 양산되었고 이 문제는 오늘날도 비하르(Bihar)와 서부 벵갈 지역에서 만성적인 골치거리가 되고 있다.

1857년 북인도에서 일어난 인도 폭동은 동인도 회사의 소멸이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인도의 관리는 뒤늦게 영국 정부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다음 50년은 소위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황금기였다. 영국 통치에 대한 저항은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인도에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해주기 위해 설립된 의회가 이제 진정한 자치를 위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의회 밖에서는 피끓는 개인들이 보다 폭력적인 수단으로 독립을 추구해나갔다.

결국 영국은 캐나다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위한 방침을 세워준 셈이 되었다. 1915년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은 간디가 돌아왔고 자신의 능력을 독립 문제에 집중시키면서 사티야그라하(satyagraha)라 불렸던, 영국의 지배에 대한 소극적 저항 정책을 채택했다. 2차대전은 식민주의와 유럽의 우월성 신화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인도의 독립은 필연적인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인도 내에서 그 수가 많았던 이슬람 소수민족들이 독립 인도는 힌두교 중심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지방 선거는 지방 자치주의가 위험하리만큼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가 이끄는 이슬람 연맹은 압도적 다수의 이슬람교도들을 대변하고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가 이끄는 의회 정당은 힌두교도 국민을 대변하는 상황이 되었다. 분리된 이슬람 국가를 이끄는 권력을 원했던 진나의 독선적인 시도는 영국이 독립을 허락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임이 분명해졌다. 정치적 냉전과 급증하는 긴장 속에서 총독 루이스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경은 어쩔 수 없이 인도를 분할하는 결정을 내리고 독립을 위한 신속한 예정표를 마련했다.

불행히도 이슬람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두 지역은 서로 동떨어진 반대지역에 있었다. 이는 새로운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이 적대적인 인도로 가로막힌 동부와 서부 양쪽으로 나뉘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경선이 발표되자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엑소더스가 일어나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인도로 자리를 옮겼다. 이러한 이주는 대부분 야만적인 폭력 행위를 수반했다. 이 혼란 속에서 1000만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지를 옮겼고 아무리 적게 잡아도 250,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독립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또 한 차례의 비극이 있었다. 1948년 1월 30일, 분리와 그에 뒤따른 유혈 사태로 인해 깊은 낙담에 빠져 있던 간디가 힌두교도 광신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분리의 상처에 뒤이어, 인도의 초대 수상이었던 자와할랄 네루는 비종교적 정치 체제, 사회주의 중심의 정치 계획, 엄격한 비동맹 정책을 옹호했다. 인도가 일반적으로 이전의 식민통치 모국과 충성 관계를 계속 유지했고 영연방에 참가하는 쪽에 투표하기는 했지만, 이는 사실상 구 소련쪽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중국과의 갈등 때문이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철천지원수인 파키스탄에 미국이 원조를 해 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는데, 파키스탄은 이슬람교도가 많은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요구로 인해 인도에 특히 적대적이었던 것이다. 1965년과 1971년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에는 무력 충돌이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카슈미르 문제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 때문이었다. 인도의 다음 수상은 네루의 딸이었던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로 1966년 선출되었다.

인디라 간디는 여전히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녀가 1975년 국가 계엄령을 선언함으로써 인도가 민주적 기반을 갖추는 것에 쓸데없이 개입했다고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간디 여사는 1984년 자신의 시크교도 보디가드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이는 암리차(Amritsar) 황금 사원에서 시크 과격파들을 몰아내기 위해 인도 군대를 동원하기로 한 그녀의 부적절한 결정에 대한 보복이었다. 간디 왕조의 인도 정치 장악은 인디라 간디의 아들로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인도 항공 조종사였던 라지브(Rajiv)가 권력을 향해 다가가면서 계속되었다. 라지브는 인도에 새롭고 실용적인 정책을 도입했다. 외국인 투자와 현대 기술의 이용이 장려되었고 수출 제한이 완화되었으며 많은 새로운 산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확실히 인도를 1990년대로 끌어올렸고, 부분적으로는 스스로 자처한 것이었던 고립주의로부터 인도를 깨어나게 했다. 그러나 이는 인도의 거대한 농촌 지역에는 거의 자극을 주지 못했다. 라지브는 타밀 나두(Tamil Nadu)로의 선거 여행 동안 스리랑카의 타밀 타이거즈(Tamil Tigers) 지지자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모친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라지브 간디 이후 인도에는 세 명의 지도자가 있었고 그들 모두가 인도를 계속 끌고 나가 세계 경제 속으로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인도에서의 지방 자치주의의 위험은 1992년 힌두교도 폭도들이 날뛰며 라마의 탄생지에 지어졌다고 그들이 믿었던 모스크를 파괴한 아요다(Ayodhya) 소요 동안 명백하게 드러났다. 힌두교도 민족주의자들 중심의 브하라티야 자나타 당(Bharatiya Janata Party, BJP)은 이러한 기회를 민첩하게 이용하고자 했다. 인도 국민의회파(Congress party)의 타락은 비종교적이고 관용적인 인도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믿을만한 정치적 대안을 내놓는 것에 장애가 되었다. BJP는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소규모 정당들의 제휴로 인해 권력에서 밀려났는데, 이 제휴는 연합 전선(United Front, 그러나 13인의 패배자들이라는 별명이 붙었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국민의회파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1997년 11월, 국민의회는 후원을 철회했고 로크 사바(Lok Sabha)는 해체되어 1998년 2월에는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에서는 BJP가 이끄는 제휴세력이 승리했고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Atal Bihari Vajpayee)는 두 번째로 수상이 되었다. 지방자치주의적인 정치 성향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BJP의 전통적인 힌두교 입장은 현대적인 외부 세계의 영향이 급속히 밀어닥치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투표자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 힌두어로 더빙되고 인공위성을 통해 인도로 송출되는 "119 해양구조대"를 보면 인도인들이 우려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BJP의 극단적인 정책은 다양한 위치의 정치적 동맹자들에 의해 완화될 것이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대가 잘못되었음이 증명된 것은 BJP가 인도는 선거이후 몇 주안에 핵무기를 가지게 될 것이라던 공약을 실제로 실천에 옮겼을 때였다. 국제적인 분노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는 핵무기 실험이 대규모의 축제와 함께 치러졌고 이는 BJP 지지자들이 늘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일주일도 긴 기간이라는 금언을 증명하듯 1999년 4월 바즈파이는 의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잃었고 불신임 투표에 회부되어 한 표 차이로 패배했다.

라지브 간디의 미망인인 소니아 간디(Sonia Ghandi)가 정치 변방에서 3년을 보낸 국민의회파를 승리로 이끌어 간디 정치 왕조를 재건할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그러나 인도 의회의 당파와 분열로 인해 소니아는 다수 의석을 차지할 만한 정치적 동맹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인도는 다른 때처럼 세 번째 선거를 치뤄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여당인 브하라티야 자나타 당(BJP)이 다시 정권을 쥐었지만 현격하게 지지도가 떨어졌고 BJP는 동맹자들에게 더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바즈파이와 BJP는 승리했다기보다는 반대당과 인도 정치라는 괴물에 대한 통제력 상실로 인해 패배한 것이었다. 인도의 선거가 끝나고 며칠만에 파키스탄에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세계는 바즈파이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과거 파키스탄에 대한 그의 강경정책이 대중의 지지를 얻는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았으므로 그는 아마도 자신의 지도력을 검증받기 위한 무력 행위를 취하고 싶었을 것이다.

source : NFczNHrbX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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