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초의 여왕 블러드 메리(Bloody Mary), 메리 1세
메리 1세
Mary I, 1516.2.18 런던 근교 그리니치 生~1558.11.17세인트 제임스 궁전 서거
본명은 메리 튜더(Mary Tudor)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의 여왕(재위 1553. 7. 19. - 1558. 11. 17.)
부 : 헨리 8세(Henry VIII, 1491,6,28~런던 그리니치 프라센티라궁 生~1547.1.28)
모 : 캐서린1485.12.16~1536.1.7헌팅던 킴볼튼성에서 51세 사망, 피터버러 성당 묘.
(영어:Catherine of Aragon /에스파냐어:Catalina de Arago'n)
(스페인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카톨릭 공동왕으로 불리는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의 막내딸)
재위 경위
아라곤의 캐서린의 유일한 딸로 태어나서 튜더스에서 이미 두 번의 약혼을 한 것으로 처리된, 메리 공주 후의 메리 1세의 인생이 파란만장했다는 건 설명할 필요가 없는 문제일 것이다.
스페인 공주와 영국 왕 사이에서 태어난 혈통이 좋은 공주였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낳겠다는 이유로 자신을 한순간에 서자 취급을 하길 여러 차례. 부인들이 바뀔 때마다 왕위를 이유로 죽임을 당할 위협도 여러번(정식 후계 아들이 없으면 가장 큰 권리를 갖는 건 메리였다). 메리가 끝까지 자신이 헨리 8세의 정당한 왕비임을 주장하다 죽은 아라곤의 캐서린을 지켜보면서 점점 더 타협을 모르는 카톨릭 신자가 되어갔을 거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있는 부분이다.
앤블린을 옆에 들이기 위해 강화된 신교 세력이니.. 얼마나 미웠을까? 피의 메리는 그렇게 탄생되었을 듯하다.
서자로서 엘리자베스 1세의 세례식 시중을 들고 엘리자베스의 기저귀를 갈게할 정도로 시녀 취급을 했던 앤블린이나 그녀의 존재를 껄끄러워했던 아버지의 부인들이 있었다.
공주로서의 자격이 정지,왕위 계승권도 빼앗김 (앤 블린로 인하여..),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아에 의해 간신히 공주로서의 신분이 복권되었고. 한 때는 웨일스 여공의 지위에 머무른 적도 있었다.
이복 남동생 에드워드 6세(母 제인 시모어)가 1553년에 15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노섬벌랜드 공작 더들리가 자기 아들과 결혼시킨 제인 그레이를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지만, 이에 반발하여 귀족들과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켰으며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메리가 오게 되면서 실패하게 된다.
메리는 스스로 여왕으로의 즉위를 선언하였으며, 노섬벌랜드 공작은 9일 후에 구속되어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메리는 사실상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그녀의 카톨릭 예배를 금지시킨, 동생 에드워드 6세 또는 정치적으로 결혼했으나 애정이라곤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10살 아래의 펠리페 2세(그녀의 나이 38살에 27살의 펠리페와 혼인했다.
그의 아버지와 이루어지려던 혼인을 아들과 강행). 상상임신으로 오인된 그녀의 질병이 그러하듯이.. 카톨릭을 돌려놓듯 모든 걸 제자리에 돌려놓아도 그녀는 개인적으로 행복하지 못했다.
재위 기간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 1세는 부왕 이래의 종교 개혁을 뒤엎어 로마 가톨릭의 복귀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라고는 해도, 교회의 재산을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성공회의 지도자들을 차례대로 체포하여 처형시켰는데, 그 수가 3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그녀는 ‘피의 메리(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참고로, 칵테일의 일종인 블러디 메리라는 이름은 이 메리에 유래한다.
차기 여왕 엘리자베스가 성공회를 부활시켰음에도 중도주의(Via Media) 정책을 취해 로마 가톨릭을 탄압하지 않았던 것도, 메리의 과격한 인상을 남긴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를 이단자라고 부르며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싸우며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당시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메리는 그렇게 광신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에스파냐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메리는 자신의 결혼 상대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아스투리아스 공인 펠리페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국가인 에스파냐 왕자와의 결혼에 반대하는 신료들이 많았으며, 켄트에서 토마스 와이어트 등이 봉기를 일으킬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었지만, 반란은 실패하였고 토마스는 처형되었다.
이 때도, 또 이후 일어나는 반란에서도 모두들 엘리자베스를 왕위에 올릴 것을 요구하였다.
메리는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1554년 7월 20일에 펠리페와 결혼하였다. 이 때 메리의 나이는 38살, 펠리페의 나이는 27살이었다.
1556년에 펠리페는 본국으로 귀국하여 펠리페 2세로서 국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1년 반 후에 런던으로 돌아왔지만, 겨우 3개월만 머무르고 다시 에스파냐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간 전쟁에 휘말려 프랑스에 패하여 대륙에 가지고 있던 마지막 영토인 칼레를 영원히 상실하게 되었다.
펠리페 2세와 결혼한 후, 메리는 아이를 간곡히 바랬지만 모두 상상임신이었으며, 사실은 난소 종양이 발병하여 임신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 증상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메리는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을 궁정에서 쫓아버린 여자의 딸이라며 이복여동생 엘리자베스를 평생동안 미워했다.
여동생의 세례식에 서자로서 보좌할 것을 명령받은 굴욕을 맛보고 나서 시작된 원한은 뿌리가 깊었던 것이었다. 앤 볼린이 처형될 때까지 엘리자베스의 하녀로 봉사했던 것도 사실이다.
서거하기 전날에, 간신히 자신의 후계자로서 여동생을 지명할 정도였다.
메리 1세는 5년 남짓한 재위한 후, 난소 종양에 걸려 1558년 11월 17일에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서거하였다.
메리의 기일은 200년 동안, 압정에서 해방된 축제일로서 기념되었다.
제인 그레이 ( Lady Jane Grey, 1537년 - 1554년 2월 12일)
제인 그레이는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가의 네 번째 여왕이다(재위 1553년 7월 10일).
재위기간이 매우 짧기 때문에 군주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는 학자도 있지만, 영국 왕실에서는 제인을 정통 군주로 인정하고 있다.
아버지 헨리 그레이는 왕족이 아니었지만, 외가 쪽의 조모가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메리 튜더였기 때문에, 이 점이 그녀가 헨리 7세의 외증손녀로서 왕위 계승권을 갖을 수 있다는 근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