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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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까칠한데 이유 있었다···100년 전 한국 닮은 아픈 근대사

2020-01-22 1566
 이란 근대사, Iran

19세기부터 영·러 틈바구니에 끼어 강대국에 침탈 근대사 한국과 흡사
1차대전 중립선언에도 영·러·터 침공, 1919년 영국 보호령 야욕 미국이 막아
이란인들, 윌슨 대통령에 감사 집회까지 2차대전 땐 영·소 점령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과 페르시아만(최근 들어 아랍권은 아라비아만으로, 서구는 걸프로 각각 부른다) 독자 파병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는 이란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 아덴만에서 소말리아 해적으로부터 한국 선박을 지켜온 청해부대의 활동 범위를 넓혀 석유 수송로를 스스로 지키기로 한 이 결정은 한국의 주권 사안이다. 이란이 받아들여야 한국 군함을 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란을 잘 달래 반발을 줄이고, 미래의 파트너이자 친구로 계속 머물게 하는 것은 중요한 외교 과제다.

이란어 쓰는 시아파 이란, 중동서 외로운 나라

우리가 이란을 달래는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이란이 주변국가들과 문화적 배경이 사뭇 달라 사실 중동에서 외로운 나라라는 사실이다. 첫째, 이란은 온통 아랍어를 쓰는 이 지역에서 독자 언어인 이란어(현지에선 파르시로 부른다)를 쓴다. 이란은 터키어를 사용하는 터키와 더불어 아랍어를 쓰지 않는 드문 중동 국가다. 이란어는 셈어인 아랍어와 사뭇 다른 인도유럽계 언어다. 문자는 같은 아랍 문자를 쓰고(이란에서만 쓰는 알파벳에 몇 개 있다), 어휘는 서로 영향을 줬다. 아랍어는 거의 전 중동에서 사용하지만, 이란어를 쓰는 나라는 이란 외에는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서북부 정도다. 둘째, 이란은 이슬람 세계에서 소수파인 시아파의 종주국이다. CIA 팩트북에 따르면 이란은 이란어를 쓰는 이란계가 인구의 61%를 차지하는 다민족 국가지만 종교·종파에선 인구의 99.4%가 무슬림(이슬람신자)이며 시아파가 90~95%에 이를 정도로 시아파 중심 국가다. 하지만, 중동에서 시아파가 다수인 나라는 이란을 제외하고는 이라크와 바레인 정도다. 시리아는 알아사드 대통령과 추종자가 시아파의 분파인 알라위트파를 따르지만 인구에서 다수를 차지하진 못한다. 레바논과 예멘에도 시아파가 상당히 있지만 다수는 아니다. 이란이 외로운 이유다.
셋째, 이란 정치체제는 주변 국가와 사뭇 다르다.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군주를 몰아낸 역사부터 다르다. 그런 다음 국민이 직접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 민주체제를 이뤘다. 물론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뽑은 최고지도자가 세속 권력을 감독하는 독특한 신정 체제를 구성했지만, 세습 군주가 없다는 점에서 중동의 다른 군주제나 독재 국가로선 경계 대상이다.
이 때문에 이란은 사실 외롭다. 중동 세계에선 이란을 가까이하려는 나라보다 거리를 두려는 나라가 더 많은 실정이다. 그래서 주변 국가들과 마음을 터놓고 교류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한국이 소프트파워를 잘 활용하면 이란의 불안감과 소외감, 그리고 박탈감을 달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국주의 침탈의 이란 근대사, 한국과 판박이
여기에 더해 이란과 제국주의에 맞선 근대사 경험을 공유할 수도 있다. 이란은 거대 제국으로 보이지만 사실 19세기 이후 오랫동안 서구 세력에 침탈당하면서 국권을 유린당한 쓰라린 역사가 있다. 이란이 고대부터 중세까지 제국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이란의 아픔이자 역사적 트라우마다. 물론 이란은 19~20세기 중반까지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의 식민지나 보호령을 경험한 적이 없다. 계속 주권국가였다. 하지만 이란의 근대사는 강대국의 침탈로 국권이 유린당하고 군주가 바뀌는 아픔을 겪었다. 근대 들어 이란을 압박하고 위협한 첫 나라는 러시아였다. 이란은 남하하는 러시아에 맞서 1651년부터 1828년까지 다섯 차례 전쟁을 치렀다. 특히 투르크계 카자르 왕조(1794~1925년) 시절에 두 차례의 전쟁에 패하면서 1813년 굴리스탄 조약과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러시아와 맺고 지금의 그루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과 러시아령 다게스탄 등 카프카스 지역의 빼앗겼다.

이란 선지자, 헌법·의회 만들어 개혁 추진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 이란(1935년까지 페르시아)에선 개혁주의자들이 서구제도의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이 주목한 나라는 1776년 영국에서 독립을 선언한 미국이었다. 미국은 헌법을 바탕으로 하는 입헌 민주주의 국가로 자리 잡으면서 오랫동안 전 세계 개혁주의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과 독일·이탈리아 등의 자유주의 혁명도 그 연장선으로 파악된다.

카자르 왕조 시절 이란 개혁주의자들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입헌주의에 매료돼 모범국가로 존경하면서 그 제도를 도입하려 했다. 이는 헌법 제정과 이에 입각한 입헌군주제 통치를 요구하는 입헌혁명(1905~1911년)으로 이어졌다. 개혁주의자들의 치열한 요구에 카자르 왕조의 5대 군주인 모자파르 앗딘 샤(1853~1907년, 재위 1896~1907년)는 결국 1906년 8월 헌법을 받아들였다. 그해 10월에는 선거를 통해 최초의 의회(마줄레스)가 구성되고 페르시아는 입헌군주제 국가가 됐다.
하지만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군주제 옹호자들의 반동정치였다. 모자파르 앗딘 샤가 1907년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은 무함마드 알리 샤(1872~1925년, 재위 1907~1909년)는 1908년 헌법과 의회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그것도 모자라 페르시아 코자크 여단의 러시아인 지휘관 블라디미르 랸코프에게 의회 건물을 포격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입헌주의자들이 이듬해 테헤란으로 행진해 들어와 무함마드 알리 샤를 몰아냈다. 이들은 그의 어린 아들인 아흐마드 샤(1898~1930년, 1909~1925년 재위)에게 뒤를 잇게 했으며, 헌법과 의회도 복구했다.

영국·러시아, 이란판 38선 긋고 세력권 나눠

그러는 사이 이란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 세력이 이란에 들어왔다. 당시 글로벌 패권국가로 인도제국(현재의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스리랑카)을 지배하던 영국은 인도 주변으로 남하하려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세력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1871년 통일을 이룬 독일이 지금의 중국처럼 경제력과 군사력을 강화하자 영국과 러시아는 싸움을 멈추기로 했다. 그래서 1907년 8월 영러협상을 통해 이란과 티베트,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세력권을 서로 나누고 경쟁을 중지하기로 했다. 영러협상에서 양국은 티베트에서는 사실상 손을 떼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으며,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이 지배하기로 했다. 주권국가인 페르시아는 러시아가 북부를, 영국이 동남부를 세력권으로 삼고 서남부는 완충지대로 두기로 했다. 이 세 곳은 모두 인도와 접경한 지역이다. 이란은 주권국가였지만 러시아와 영국은 38도선을 긋듯이 이란 지도에 금을 긋고 서로 세력권을 나눴다. 이란은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이란서 중동 첫 대형유전 발견…영국 관심 커져

그런데 완충지대린 이란 서남부 쿠제스탄주에서 1908년 5월 영국인 지질학자들이 중동 최초로 원유 다량 매장지를 발견했다. 이렇게 석유가 쏟아지자 영국의 이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영국인 광산기업인 윌리엄 녹스 다크리(1849~1917년)는 이란 당국을 상대로 중동 지역 최초의 석유 채굴 허가를 얻어냈다. 다크리는 1909년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APOC)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현재 연매출 3037억 달러(2018년 기준)에 7만3000명을 고용하는 다국적 에너지 기업인 브리티시석유회사(BP)로 이어졌다. 석유가스 업체로는 6위, 세계 기업 순위 12위인 초대형 업체다. 영국의 거대 에너지 기업은 이처럼 이란에서 출발했다.

이란의회, 영·러 견제하려 재무장관에 미국인

다시 문을 연 페르시아 의회는 안하무인 격이었던 러시아와 영국을 견제할 방안을 강구했다. 그들은 당시 새롭게 강국으로 떠오르던 미국에 주목했다. 미국의 힘을 빌어 영국과 러시아에 견제구를 날리기로 했다. 그래서 1911년 5월 미국인 변호사인 모건 슈스터(1877~1960년)를 재무장관으로 초빙해 재정 개혁을 맡겼다. 영국과 러시아의 압박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미국인을 고위 관료로 기용하고 미국의 힘을 빌려보려고 했다. 수구파, 개화파, 친청파, 친러파, 친일파로 나뉘어 청나라, 러시아, 일본의 힘을 빌어보려고 했던 구한말 조선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하지만 의회의 초청으로 테헤란에 온 슈스터는 영국과 러시아의 압박을 받은 페르시아인 섭정의 압박으로 그해 12월 물러나 미국으로 귀국했다. 헌법도 만들고 의회도 열었지만 외세의 간섭 앞에 나라의 개혁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1차대전 터지자 영·러, 중립 이란 점령

심지어 석유 발견으로 이란의 경제적 가치가 커지자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중 같은 연합군(영국·프랑스·미국 등)인 러시아와 함께 이란의 일부를 점령했다. 이란을 점령한 영국군과 휘하 인도군(식민지 인도에서 데려옴)은 이란의 다른 지역에 진입한 오스만튀르크 구대와 전투를 치렀다. 동맹군(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등)에 속한 오스만튀르크는 연합군의 주축인 영국에 맞섰다. 당시 이란의 카자르 왕조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영국과 러시아는 물론 오스만튀르크로부터도 무시됐다. 강대국은 힘이 없는 나라를 끝없이 압박하고 유린했다. 이란은 연합군과 동맹군의 전쟁터가 됐다.

영, 이란 보호령 삼으려 시도…미 반대로 포기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러시아 군대가 먼저 이란을 떠났다. 1918년 1차대전도 끝나면서 이란은 주권을 회복하고 평화를 누릴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영국은 1919년 이란을 보호령으로 삼으려고 시도했다. 그해 초 개막한 파리 강화회담에서 교전국도 아닌 중립국 이란을 보호령으로 삼으려고 했다. 오스만튀르크의 영토였던 현재의 요르단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을 영국이, 시리아와 레바논을 프랑스가 각각 보호령으로 삼았지만 중립국이자 주권국가를 통째로 보호령으로 삼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하지만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1956~1924년, 재임 1913~1921년)이 반대하면서 이란은 보호국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해에 테헤란에서는 미국에 감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영국과 러시아의 압박 속에서 약소국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던 이란인들은 미국을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주의를 지켜주는 보호자로 여겼다. 반미를 국시처럼 여기는 지금의 이란과는 사뭇 다르다. 100년 전의 일이다.

쿠데타 일으킨 레자 칸, 샤로 등극하며 군주제

그러는 동안 이란에선 중앙정부를 지배하던 기득권층이 외세를 등에 업고 의회의 뜻을 무시하면서 양측의 긴장과 갈등은 갈수록 고조했다. 테헤란 서부 길란 주에서는 1915년 반란까지 발생해 1921년까지 계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1921년 헌법파 정치인 지아 올딘 타바타바이(1889~1969년)와 페르시아 코자크 여단의 장교인 레자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테헤란을 점령했다. 레자 칸은 1923~1925년 군 사령관과 총리를 지내다 1925년 파흘라비 왕조를 세우고 레자 샤(1878~1944년, 재위 1925~1941년)라는 이름으로 초대 샤가 됐다. 페르시아 의회는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샤인 아흐마드의 폐위를 결의하고 1906년 제헌 헌법을 수정해 레자 칸이 새 왕조를 열고 샤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레자 칸은 페르시아 헌법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샤에 즉위했다. 민주국가를 만들겠다고 벌인 제헌 운동이 어이없게 군사쿠데타와 새로운 왕조 개창으로 귀결된 셈이다.

레자 샤, 영·소 입김 벗어나려 나치 독일 접근

레자 샤는 법과 질서의 회복, 중앙집중, 그리고 정부와 사회의 개혁과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서구화와 세속화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부패와 무거운 세금 속에서 억압과 감시로 흘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겉핧기식 개혁 속에서 이란을 거대한 경찰 독재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판을 듣는다. 레자 샤의 서구화와 세속화는 특히 이슬람 세력의 저항에 직면했다.
레자 샤는 독특하게도 러시아의 뒤를 이은 소련과 영국의 입김에서 벗어나려고 나치 독일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영국은 레자 샤의 중립을 믿지 못했으며 그가 반영친독 성향이라고 판단했다.
레자 샤는 권력을 잡으면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일찌기 1921년 쿠데타에 성공하자 페르시아의 카자르 왕조가 1919년 영국과 맺은 조약을 폐기하고 영국인이 누리던 치외법권 특혜를 폐지했다. 이란에서 석유를 발견한 다크리의 앵글로페르시안 석유회사는 이익의 10%만 주고 이란산 석유를 독점 판매하는 특권을 갖고 있었는데 레쟈 샤는 1931년 이를 폐지했다. 1935년에는 유럽 국가들에게 국호를 고대 그리스어인 페르시아 대신 이란으로 바꾼다고 통보했다. 외세에 대해 뚜렷한 민족주의 성향을 보인 셈이다.

연합군, 석유와 수송로 노려 중립 이란 침공

그러면서 레자 샤는 영국과 소련에 맞설 세력으로서 꾸준히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독일 군인도 다수 이란에 들어왔다. 1000명이 넘었다. 영국과 소련이 1941년 이들을 출국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레자 샤는 듣지 않았다. 영국은 이란이 나치 독일에 협력한다고 비난했지만, 레자 샤는 사실 나치의 반유대주의에는 반대했다. 유럽의 이란 공관들은 유대인 1500여 명에게 이란 여권을 발급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란판 쉰들러 리스트 활동이 있었던 셈이다.

영국이 이란을 압박한 이유는 첫째 전시 이란산 석유 확보, 둘째 이란을 거쳐 소련에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이란 회랑’의 확보였다. 이란 서남부 아바단의 정유시설은 영국의 주요 석유 젖줄 중 하나였다.
당시 미국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1882~1945년, 재임 1933~1945년)이 서명한 1941년 3월 서명해 발효한 렌드리스법(무기대여법)에 따라 영국과 자유프랑스, 소련과 중화민국 등 연합국에 식량과 유류, 물자를 공급하고 있었다. 소련에 대한 보급로는 북대서양을 거쳐 북동부 아르한겔스크로 가거나 북태평양을 거쳐 극동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바닷길과 이란을 거치는 육로가 있었다. 만일 독일군이 카프카스를 거쳐 이란을 침공해 아바단 정유시설을 점령하면 영국은 전시 연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물론 이란회랑을 통한 대소련 물자공급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진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380만의 병력과 3300여 대의 전차, 4300여 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소련을 대대적으로 침공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하자 영국과 소련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영·소, 이란 점령해 강제로 군주 교체

영국과 소련의 선택은 1941년 8월 25일의 주권국가 이란을 침공하는 일이었다. 1차대전에 이어 2차대전에서도 중립국인 이란은 두 나라의 침략을 받았다. 두 나라는 9월 17일까지 신속하게 전투를 끝내고 이란을 점령했다. 이란군이 미처 한 달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레자 샤는 9월 16일 퇴위 당했으며 그의 아들인 모하마드 레자 파흘라비(1919~1980년, 재위 1941~1979년)가 뒤를 이었다. 모하마드 레자 샤는 이란의 마지막 군주다. 파흘라비 왕조의 마지막 군주일 뿐 아니라 이란 4000년 역사에서 최후의 샤다.

소련과 서방 각축으로 이란에서 냉전 발화

이란 서북부를 점령한 소련군은 1945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소련의 안보’를 이유로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버텼다. 소련은 이란 공산당인 투데흐 당 창당을 지원하고, 이 지역 소수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과 쿠르드족에게 이란에서 분리해 아제르바이잔 인민공화국과 쿠르디스탄 인민공화국을 세우도록 부추겼다. 이 때문에 영국군도 떠나지 않고 남아 소련군과 대치했다. ‘이란 위기’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는 냉전이 시작되면서 처음으로 서방과 소련이 맞붙은 사례로 기억된다. 냉전 대결은 이란에서 시작된 셈이다.
당시 이란은 신생 유엔에 소련군 철수를 압박하도록 요청했는데 이는 유엔이 처음으로 접수한 개입 요청으로 기록에 남았다. 결국 1945년 3월 영국군이 철수한 뒤인 그해 5월 소련군도 이란을 떠났다.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를 이은 소련은 한때는 제국주의 강대국, 그 뒤로는 냉전의 당사자로서 이란을 각축의 무대로 삼았다.

한국 빼박은 슬픈 이란 근대사, 소통에 활용

이란인들이 외세에 대해 몸서리를 치는 것은 이러한 슬프고 고통스러운 근대사가 바탕이 됐다. 단순히 이슬람혁명 뿐 아니라 19~20세기 제국주의 세력의 오랜 침탈이 쌓여 오늘날 까칠한 이란을 만든 셈이다. 비슷한 근대사를 겪었던 한국이 이란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근대사를 겪은 이란은 굴욕의 역사를 만회하려는 민족주의 심리가 강할 수밖에 없다. 강한 이란을 추구하며 지역문제에개입해운 배경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론 주변국과 언어, 종파 달라 외톨이 신세인 것이 이란의 현실이다. 이에 따라 이런 이란의 상실감을 달래며 미래 협력을 도모하는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 정부는 호르무즈 해협과 페르시아만에 군함을 보내 석유 수송로를 스스로 지키기로 결정했다. 이제 남은 일은 한국의 외교력과 소프트파워를 총동원해 이란을 달래는 일이다. 이란과 한국이 통하는 부분부터 먼저 찾아내 대화하고 소통하는 전략이 이란을 도닥거리는 데 주효할 것이다.

source : 157973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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