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은 왜 서로를 싫어하게 됐을까
석유와 종교로 시작된 악연... 수십년간 이어져온 갈등, 다시 고조
"미국에 죽음을."
미국이 이란의 군부 실세이자 국가적 영웅인 거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폭격해 사살하자 분노한 이란 국민들이 반미 시위를 벌이며 외친 구호다.
미국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 5월 로이터통신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51%가 '앞으로 몇 년 안에 이란과의 전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만큼 이란을 '급박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이란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이 비우호적으로 여기는 국가로 북한·러시아 등과 함께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석유와 종교로 얼룩진 악연
미국과 이란의 악연은 한국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5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란 남부 지역을 간접 지배하던 영국은 이란의 부패한 귀족·관리들과 결탁해 석유를 비롯한 지하자원은 물론 철도와 담배 등 각종 이권 사업을 독점했다. 중동 전체 석유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고도 영국에 고스란히 이익을 넘겨주던 이란에서는 외세에 대한 반감이 거세졌다. 그러자 이란의 민족주의 정치가 모함마드 모사데크는 새 총리로 취임하자 1951년 석유 국유화를 선언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은 이를 막기 위해 군사력까지 투입하겠다면서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란 북부 지역을 간접 지배하던 소련과의 전면전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 거부했다. 하지만 이란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고, 석유 국유화로 시작된 '자원 민족주의'가 중동의 다른 나라들로 확대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대책 마련에 고심하던 미국과 영국의 선택은 '봉쇄와 공작'이었다. 이란의 석유 수출 항로를 봉쇄하고, 자국 기업들의 이란산 석유 구매를 금지하는 등 제재를 퍼부었다. 궁지에 몰린 모사데크 총리는 유엔 연설을 통해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소용 없었다.
나아가 미국과 영국은 이른바 '아약스 작전'으로 불리는 비밀공작으로 1953년 이란 군부의 쿠데타를 부추겨 모사데크 총리를 축출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편을 들었다가 '미운털'이 박혔던 팔레비 왕조를 복원시켰고, 이란의 석유는 다시 미국과 영국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이란 쿠데타 개입을 끈질기게 부인하다가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공개된 기밀문서를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다시 권력을 잡은 팔레비 왕조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 아래 본격적인 친서방 정책을 펼치며 토지 개혁, 문맹 퇴치, 여성 참정권 부여 등 '백색 혁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슬람 민족주의 세력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팔레비 왕조가 미국의 꼭두각시가 돼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개혁을 밀어붙인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몇 차례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팔레비 왕조는 시위대를 가혹하게 유혈 진압했고, 서방 언론은 침묵했다. 급기야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국외로 추방했다. 이는 독재와 부정부패에 신음하던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됐다.
마침내 강력한 원리주의를 내세운 이슬람 혁명이 대규모로 일어나자 미국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팔레비 왕조의 모함마드 레자 샤 팔레비 국왕은 1979년 이탈리아로 도주했다. 반면 외국을 떠돌며 망명 생활을 하던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고국 땅으로 돌아왔고, 지금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미국에 '트라우마' 안긴 대사관 인질 사건
그럼에도 이란 국민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당시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는 암 투병을 하던 팔레비 국왕의 치료를 명목으로 입국을 허가했으나, 심각한 실수가 됐다. 그해 11월 수백 명의 이란 강경파 대학생들이 국왕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며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에 난입해 외교관과 직원 등 52명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벌어졌다.
인질들은 무려 444일이나 억류됐다. 당시 시위대는 인질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잠을 잘 때도 인질들끼리 다리를 끈으로 묶었다.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 사건으로 미국과 이란은 단교했다. 당시 미국은 인질 구출 작전을 시도했다가 처참히 실패하고 특수대원 8명의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81년 1월 미국이 팔레비 왕조의 미국 내 자산을 이란에 반환하는 조건으로 인질 전원이 풀려났다. 이렇게 막을 내린 인질극은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며 이란을 혐오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일부 인질의 극적인 탈출기를 할리우드 스타 벤 에플렉이 영화 <아르고>로 만들어 2013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CNN은 "미국과 이란의 전쟁은 이 사건으로 시작돼 40년간 계속되고 있다"라며 "솔레이마니 사령관 사살은 과거부터 이어진 여러 충돌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인질극에 가담했던 이란 대학생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는 훗날 정치가가 돼 2005년 이란 대통령에 당선해 강력한 반미 정책을 펼쳤다. 또한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이란을 '악의 축'으로 부르며 악연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불신의 증폭은 양국 지도자들이 서로에 대한 반감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게다가 이란이 핵 개발에 나서면서 관계는 더욱 더 냉각됐다. 2009년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가 변화를 모색하고 나섰다. 미국의 오랜 경제 제재에 지친 이란도 온건파인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2013년 양국 정상이 30년 만에 처음으로 전화 통화를 하고, 본격적인 핵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5년 7월 이란 핵 개발 동결을 내세운 '이란 핵 협정'(JCPOA)이 타결되면서 미국은 이란에 대한 제재를 일부 해제했고, 화해 분위기가 급물살을 탔다.
어렵게 만든 화해 분위기... 트럼프가 '와르르'
하지만 2016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완전히 뒤집었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가 주도한 이란 핵협정이 불공정한 조건이라며 파기를 선언했고, 이란에 대한 제재를 전면 복원했다. 그러자 이란도 핵 개발을 다시 추진하겠다며 반발했다.
영국 더럼대학의 아누쉬 에티샤미 국제관계학 교수는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핵협정 파기를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설명했다. 첫째로 트럼프 행정부 내에 이란에 대해 근본적인 적대심을 가진 인물이 많고, 둘째는 트럼프 대통령도 오바마 행정부의 최대 외교 성과로 여겨지는 이란 핵협정을 무너뜨리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대표되는 이란에 적대적인 중동 내 미국 동맹국들의 압력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의 생명줄로 여겨지는 석유 수출을 봉쇄하고, 이란의 정예부대인 혁명수비대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했다. 또한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던 유조선 피격과 사우디 원유시설 공격, 이라크 내 미군 사망 사건 등의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고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사살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 정국을 돌파하고, 오는 11월 치러질 대선을 위해 일부러 이란과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CNN은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이란 혁명수비대의 최고 엘리트 부대를 20년 이상 이끌어온 인물"이라며 "그는 미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평생을 보냈고, 많은 미국인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것은 틀림 없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 정부는 그의 존재감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트럼프 대통령이 사살을 명령한 이유"라며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죽음이 이란의 전략적 야망을 멈출 수는 없더라도 느리게 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공은 이란에 넘어갔다. 최고지도자와 대통령이 직접 '가혹한 보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전면전에 나설 경우 정권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는 데다가 이슬람 혁명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는 실업난과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다고 '위대한 장군'을 잃은 국민들의 분노를 무시할 수도 없는 이란 지도부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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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1579719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