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으로 생명 지키려 산사 박차고 소신공양
4대강과 약자에 몸바친 문수 스님
‘진실’은커녕 ‘사실’조차 눈 감는 암울한 시대 -
태워도 태워도 태워지지 않은 인간정신 꼿꼿
조계종의 문수 스님이 21일 자신의 몸에 기름을 끼얹어 불살랐다. 세납 47살로 수행만 해온 선승이다. 세속에선 ‘분신자살’이라고 한다. 하지만 불교계에선 ‘소신공양’이라고 한다. 분신(焚身)이나 소신(燒身)이나 ‘몸을 불사른다’는 것으로 같은 뜻이다. 다만 자살(自殺 )과 공양(供養)이 다르다. 자살은 삶에 백기를 들고 자신을 죽이는 것이지만, 공양은 세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공양물로 바치는 것이다.
보수신문들엔 한 줄도 언급 없는 암울한 시대
노동의 새벽을 열었던 전태일과 독재시절 몸을 불살랐던 많은 젊은이들이 ‘전설’이 되고 있는 시대, 스님은 4대강의 생명과 약자들을 위한 삶을 외친 단말마를 끝으로 불 속에서 사그라졌다.
인간의 이성을 극한 이런 상황을 맞이하는 대중의 반응도 갖가지다. 가슴이 불에 데인 것처럼 먹먹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덤덤한 사람, 거기서 한발 나아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면서 분개하는 사람도 있다. 내 양심이 덧찔렸다 해서 그 가시를 뽑아 죽은 이의 심장을 다시 한번 가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두 번 죽을 수도 없는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건 ‘마지막 결단’에 대해 쉽사리 단죄할 자신이 내겐 없다.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누구라도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원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도 ‘성인’으로 시성할 때 자신의 생명을 던진 ‘순교’를 가장 중요시하는 것도 그가 원하는 바가 지고할지라도 이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인 때문이다.
돈과 권력을 위해선 사람 몇 죽는 것이야 눈 하나 깜짝 않는 세상에 문수 스님은 대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을까. 기득권의 선봉장이 되어 ‘진실’은커녕 ‘사실’조차 철저히 눈을 감아버리는 조중동 보수신문들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몸을 불사를 수밖에 없는 암울한 시대임을 말없이 말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선방 다니며 수행에만 전념…3년간 무문관 정진도
1990년에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한 문수 스님은 1998년 중앙승가대 학생회장을 지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지니기도 했지만, 그 이후 선방을 다니며 수행에만 전념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방이 막힌 무문관에서 3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처절히 정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선방에 다닌 이후 이른바 ‘불교계 운동권’이나 ‘시민운동’ 쪽에 얼굴을 내민 적도 전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오직 홀로 한 그의 ‘소신’은 ‘불교’와 ‘수행’을 도외시하고 해석하긴 어렵다.
교과서에도 실렸던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 ‘소신공양’ 얘기가 나온다. 따라서 소신공양이 대중들에게 전혀 못 들어본 말은 아니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 ‘소신공양’이 언급된다. 깨달은 구도자가 자신의 온몸을 태워 자신은 절대 삼매에 들고 부처님께 공양을 하고 그 빛으로 중생을 널리 구제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태고종 승정, 충담 스님이 1998년 6월27일 새벽 경기도 청평 감로사에서 이 나라 분단된 국토가 하나로 통일되고 사회가 안녕하며 헐벗음과 괴로움이 없어지며 종단이 화합해 불국토가 앞당겨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는 내용의 열반송을 남기고 소신 공양한 바 있다. 충담 스님은 소신 전날 대중들이 절을 비우도록 한 뒤 홀로 장작불 위에 올라 스스로 불을 질러 소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의 바비큐라니 재미있네” 라며 비아냥
세계적으로는 베트남 틱광득(釋廣德) 스님의 소신공양이 널리 알려져 있다. 1963년 베트남의 대로에서 소신공양을 감행해 거센 화염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가부좌자세를 유지했던 그의 모습은 물질문명과 현대무기로 얼마든지 힘없는 동양을 농단할 수 있다고 여겼던 서양 세계를 전율케 했다. 혹자들은 힘의 논리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미국 대 베트남’의 전쟁에서 미국의 패배는 이미 이 순간 결정되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분신하는 광득스님
최근 틱광득 스님의 삶을 추적해 우리나라에서 출간한 일본인 미야유치 가쓰스케씨가 쓴 <분신>(토향 펴냄)에서 조명된 틱광득 스님은 베트남을 유린한 프랑스와 미국 등 서양제국과 불교를 탄압한 부패한 독재 디엠정권에 항거하며 65살에 소신공양을 단행했다. 3년간 무문관에서 처절히 정진하기도 한 고승인 광득 스님은 베트남 불교를 위해 언제든 소신공양을 하겠다고 베트남 불교본부에 청원을 한 상태였다.
서양세계에 아시의 정신을 보여주자는 계획하에 연출됐던 그의 소신공양은 군과 경찰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 승려들이 광득 스님을 둘러싸고 십자대로에서 누워있고, 서양의 특파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행됐다. 당시 독신이던 응오 딘 디엠 대통령의 배후에서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동생 응오 딘 뉴의 처로 ‘베트남의 여왕’으로 불렸던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 마담 뉴는 광득 스님이 소신공양하자 “중의 바비큐라니 재미있네”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광득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포기로 디엠정권이 붕괴돼 독재자의 일족들이 오히려 세기의 비웃음 거리가 되고 말았다.
온몸 불타도 가부좌 풀지 않고 끝내 뒤로 넘어져
소신공양을 단행하는 순간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아 주위 사람들조차 놀라게 했던 광득 스님이 십자로에 연화좌 자세로 앉자 그의 제자인 창구 스님이 광득 스님의 주위를 돌며 미리 준비한 가솔린을 흠뻑 뿌렸다. 그러자 광득 스님이 미리 준비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지만 가솔린에 젖은 가사에 불이 붙지 않았다. 그러자 주위에서 건네준 성냥갑을 받아든 광득 스님이 성냥을 그어 스스로 불을 질렀다. 광득 스님의 몸이 불길이 휩싸이자 누워 있던 비구 스님들은 일어나 광득 스님을 향해 절을 올렸고, 곁에 있던 비구니 스님들은 울부짖었다. 데모 대열을 막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섰던 병사들도 ‘받들어 총’ 자세를 취했다.
불길이 거세지자 광득 스님의 상반신이 앞으로 쓰러질 듯이 기우뚱했다. 광득 스님은 소신공양 전 제자들에게 예언했다고 한다. 만약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다. 그때는 해외로 망명하라고 했다. 하지만 뒤로 쓰러진다면 우리들의 투쟁은 승리하고 결국 평화를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온몸이 훨훨 불타고 있던 광득 스님은 마지막 혼신을 다한 듯 다시 허리를 곧추세워 가부좌를 했고, 마지막엔 뒤로 넘어졌다. 어떤 화마도 평화에 대한 그의 의지를 꺾지 못한 것이다.
불에도 타지 않고 황산에도 녹지 않은 심장
그의 장례행렬엔 무려 10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그의 관에 다이너마이트가 설치돼 있다는 독재정권의 유언비어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을 따르는 사람들도 7킬로미터가 이어졌다. 소신공양 후 남은 그의 법체는 소각로에 옮겨져 디젤 연료를 사용한 4천도의 불로 6시간 동안 태워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심장은 타지 않고 남았다. 다시 연료를 보충해 두 시간을 더 태워도 심장은 타지 않았다. 그러자 등 서구 언론은 이를 ‘영원의 심장’이라고 불렀다. 응오 딘 디엠 정권은 광득 스님의 심장이 더욱 거센 활화산이 될 것을 염려해 비밀경찰청장인 쩐낌 때웬을 파견해 광득 스님의 심장에 황산을 뿌렸다. 그런데도 심장은 녹지 않았다. 비밀경찰들이 그 심장을 강제로 가져가려고 하자 스님들은 금속 용기에 담아 구리줄로 봉인하고 사이공 시내의 스웨덴 은행에 맡겼다. 전후 광득 스님의 심장은 하노이국립은행으로 옮겨져 보관돼 있다고 한다.
결코 사그라들지 않을 것처럼 거센 불길도 한순간일 뿐이다. 권력과 독처럼. 하지만 불길 속에서도 사그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심장이 아니다. 불길도 삼키지 못했던 ‘인간 정신’이다.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명을 죽이는 생명파괴와 전쟁놀음도 컴퓨터게임처럼 할 수 있는 게 인간이지만, 많은 생명을 위해 하나뿐인 자신의 생명을 불사를 수 있는 이 또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