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Uruguay - 지리, 역사, 문화
우루과이 (URUGUAY)
우루과이는 작은 나라이지만 여행을 다니다 보면 확실히 친절함을 지닌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나라는 남미에서 가장 재미있는 수도 중 한곳을 가지고 있으며 매력적인 식민지 풍 마을과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해변 휴양지들이 모여있다.
통계 자료
국명 : 우루과이 공화국(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
면적 : 187,000 sq km
인구 : 320만명
수도 : 몬테비데오(Montevideo, 인구 1,400,000)
인종 : 88% 유럽인 후손, 8% 메스티조, 4% 흑인
언어 : 스페인어
종교 : 66% 카톨릭, 2% 개신교, 2% 유태교
정체 : 공화국
지리 및 기후
우루과이는 북쪽으로 브라질, 서쪽으로 아르헨티나로 둘러싸여 대륙의 동쪽 연안에 위치한 남미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남쪽으로는 리오 데 라 쁠라따(Río de la Plata)의 넓은 강어귀가 나오고 동쪽 해안은 대서양에 면해 있다. 국토의 대부분은 남쪽의 브라질에서부터 물결치듯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지형이 이어져 있으며 두 개의 낮은 산맥을 포함하고 있다- 쿠치이야 데 아에도(Cuchilla de Haedo)와 쿠치이야 그란데(Cuchilla Grande)가 그것이다.
몬테비데오 서쪽으로는 지형이 고르며 동쪽으로는 인상적인 해변과 해안의 모래언덕, 곶 등이 있다. 그리고 다섯 개의 강이 국토를 지나 서쪽으로 흐르며 우루과이 강으로 빠진다. 우루과이의 식물군은 강이나 냇물의 둑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약간의 숲을 포함하여 초원으로 구성된다. 브라질 국경에 접한 남동부는 야자수 사바나의 흔적이 남아있다. 야생동물은 드물지만 새 비슷하게 생긴 타조인 레아는 주요한 지류 근처 지역에서 아직도 볼 수 있다. 기후는 겨울까지도 온화하며 서리조차 거의 내리지 않는다. 겨울(6월에서 9월까지) 기온은 10도에서 16도 사이를 오가며 여름은(12월에서 3월) 21도에서 28도 정도이다. 강우량은 연중 골고루 내리는데 전국적으로 평균 1m 정도이다.
역사
우루과이의 원주민들은 챠루아 인디언으로서 수렵 채집을 하며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내왔다. 1516년 스페인인들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들은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Juan Diaz de Solís)와 그의 일당 대부분을 죽였다. 17세기에 이르러 챠루아 인디언은 번성하였고 이후 적대적인 관계를 버리고 스페인인들과 교역을 시작했다. 1680년 포르투갈은 쁠라따 강어귀에 콜로니아(Colonia)를 세웠는데 이는 반대쪽 어귀에 스페인인들이 세운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 대적하기 위해서였다.
스페인은 몬테비데오에 성을 건설하여 응수했다. 우루과이인의 영웅인 호세 아르티가스(José Artigas)는 스페인인과 싸웠지만 브라질인들이 반다(쁠라따 강 동쪽 연안의 원래 이름)를 차지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파라과이로 망명해 그는 '33인의 오리엔딸레스(Orientales)'를 고무하였고 이들은 아르헨티나의 지지 하에 1828년 이 지역을 해방시키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에 독립된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우루과이의 불안정한 독립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의해 군사적으로, 또는 영국에 의해 경제적으로 19세기 내내 계속해서 위협받았다.
아르헨티나와 결탁한 연방주의 세력은 1838년부터 51년까지 몬테비데오를 장악하여 블랑코파와 콜로라도파로 불리는 두 적대적인 정치 세력을 낳게 되었다. 동시대에 영국은 새로운 모직, 육류, 철도 산업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들은 떠돌아다니는 토종의 가축 대신에 자신들이 들여온 가축을 대체하여 우루과이의 몇 안 되는 풍부한 자원 중 하나로 상업화시켰다. 19세기의 나머지 시기에는 블랑코파와 콜로라도파의 경쟁이 계속되어 내전이나 독재, 정치적인 음모에 휩쓸리게 되었다.
20세기 초반, 앞날에 대해 꿈을 가지고 있던 대통령인 호세 바트이예 이 오르도네스(José Batlle y Ordóñez) 는 상당부분 성공한 개혁을 달성하여 우루과이를 남미에서 유일한 복지국가로 만들었다. 그의 두 번의 재임기간 중 - 1903-07년, 1911-15년 - 그는 다양한 무료 사회 서비스를 실시하고 사형제도를 폐지하였으며 폭력에 의한 지배의 전통을 청산하려고 노력했다. 우루과이는 곧 농업의 가축 부문 덕으로 번성하였지만 부족한 자연자원과 결부되어 성장이 실패함으로써 이러한 복지 상태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갔다. 우루과이의 예전 영화는 1960년대에 정부가 지지하던 사업들이 부정과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조사되면서 쇠퇴하였다.
이어 독재권력이 태어나고 1967년에 공공연하게 등장한 도시 게릴라 운동인 뚜빠마로스에 의해 혼란이 가중되었다. 1971년 군부가 정부에 참여하게 되고 의회는 해산되었으며 뚜빠마로스는 사실상 모두 쓸려나갔다. 많은 반대를 받던 군부는 1984년 훌리오 마리아 산귀네띠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될 때까지 국가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정부는 민주주의적 전통으로의 복귀를 내세우며 대대적인 정치 사면을 통해 국가적인 화해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혁신적인 경제 정책은 내놓지 못했다. 1990년 자유 시장 개혁론자인 루이스 알베르또 라카이예(Luis Alberto Lacalle)가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994년 임금 억제, 지출 삭감, 공공기관의 매각 등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비대해지면서 다시 산귀네띠가 집권하는 길을 여는 셈이 되었다.
경제
국내 총생산 GDP: US$ 321 억
1인당 국민 총생산 GNP : US$ 7,172
연 성장률: -2.3%
인플레이션: 15%
주요 산업: 모직, 짐승가죽, 소고기, 설탕, 낚시, 직물, 신발, 타이어, 시멘트, 여행산업
주요 교역국 : 브라질, 아르헨티나, 미국, 독일
문화
우루과이는 작은 나라이지만 매우 인상적인 예술과 문학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국제적으로 환호를 받는 예술가로는 전원적인 풍경을 잘 그리는 화가인 페드로 피가리(Pedro Figari)나 우루과이의 최고 작가임에 거의 틀림없는 호세 엔리께 로도(José Enrique Rodó)등을 들 수 있다. 연극도 인기 있으며 예전 뚜빠마로스의 창설자로 1970년대 군사정권에 의해 고문을 당했던 마우리씨오 로센코프(Mauricio Rosencof)는 문화계에서 저명한 극작가이다. 우루과이의 음악과 춤의 전통(민요, 폴카, 왈츠 등등)중 대부분은 유럽에서 건너왔지만 현지의 혼혈인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스포츠로는 축구가 국민을 열광시키는 운동이다.
우루과이인들은 거의 대부분 카톨릭임을 공언하지만 교회와 국가는 공식적으로 분리되어있다. 다른 종교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 몬테비데오에 조그만 유태인 사회가 있으며 몇몇 복음주의 개신교나 문선명의 통일교도 들어와 있다. 우루과이인들은 대단한 육식주의자들로 빠리이야다(커다란 접시에 담겨져 나오는 쇠고기 요리)가 대표적인 음식이다. 다른 음식으로 치비또는 온갖 것을 같이 내오는 상당한 양의 맛있는 스테이크 샌드위치이다. 일반적인 간단한 요리로는 올림삐코스(일종의 클럽샌드위치)와 웅가로스(핫도그 빵에 매운 맛의 소시지를 끼워 넣은 음식)가 있다. 차와 마테차도 상당히 많이 마시는 편이다. 클레리코는 백포도주와 과일 주스를 섞은 것이고 메디오 이 메디오는 샴페인과 백포도주를 섞은 것으로 매우 인기 있으며 맥주도 또한 맛있다.
source : TSNffBWEp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