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Ireland - 지리, 기후, 역사
아일랜드 (IRELAND)
아일랜드 공화국과 북아일랜드가 있는 아일랜드는 서유럽 국가 가운데 인구 밀도가 가장 희박하고 산업화도 덜 되어, 한마디로 가장 오염이 덜 된 국가라 할 수 있다. 푸르고 유쾌한 한가로운 분위기의 나라 아일랜드. 그러나 이곳 사람들의 웃음 진 얼굴과 술집마다 넘쳐나는 즐거운 소음들 뒤로는 유럽에서도 가장 길고 험난하고 비극적인 역사가 숨어있다.
이 나라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은 석기 시대의 무덤, 링 포츠 (Ringforts- 흙, 목재 혹은 돌로 지어진 원형 요새), 옛 사원과 성, 그리고 19세기 거대한 조지언 건축물 등을 둘러보면 쉽게 알게 된다. 한편, 이웃 나라 영국과의 오래고도 긴 불편한 관계를 일깨워주는 많은 흔적들을 통해 이 나라의 비극을 어렵지 않게 느끼게 된다. 아일랜드의 가장 큰 매력은 다양하고 아름다운 자연(드넓은 푸른 초원, 무시무시하게 대서양으로 질주하는 거대한 절벽, 서쪽의 바위 많고 황폐한 지역 등)이며, 박물관, 성, 교회 유적들이 여기에 더해 아일랜드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통계 자료
정식국명 : 아일랜드 공화국과 북 아일랜드(영국의 일부)
면적 : 84,421 평방 km/52,341 평방 mi (아일랜드공화국: 70,282 평방 km/43,575 평방 mi 북아일랜드 : 14,139 평방 km/8,766 평방 mi )
인구 : 520만 명 (공화국에 360만 명, 북아일랜드에 160만 명)
수도 : 더블린(Dublin :인구150만 명)
인종 : 아일랜드인
언어 : 영어, 아일랜드어
종교 : 공화국 - 95% 로마카톨릭, 3.4% 신교, 북아일랜드 - 60% 신교, 40% 로마카톨릭
정체 : 민주주의
지리 및 기후
아일랜드는 32개의 주(county)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 26개가 아일랜드(아일랜드 공화국)에, 6개가 북아일랜드에 속한다. '남쪽'이라 불리고는 있어도 공화국의 최북단은 '북쪽'의 어느 지역보다도 북쪽에 있다. 섬의 크기는 84,404평방km로, 남북으로 500km, 동서로 300km 뻗어 있다.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가자면 둘레는 5630km. 아일랜드 중부 지방은 대개 평평하고 기름진 농작지 이다. 서쪽으로 갈 수록 땅은 척박해지지만 볼거리는 더욱 많아진다. 해안으로 가면 기암절벽과 절묘한 산이 웅장함을 과시한다(남서부의 카란추오힐 Carrantuohill은 1041m 높이). 샤넌만 Shannon estuary과 골웨이만 Galway Bay은 서해안에서 가장 깊은 만은 형성하고 있고, 아일랜드의 가장 긴 강인 샤넌강은 259km를 흘러 리머릭시 바로 서쪽을 지나 샤넌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일랜드의 강과 호수에는 연어와 송어 등의 물고기들로 가득하고, 섬에는 아일랜드 산토끼나 아일랜드 흰담비 등을 포함해 30-40종의 포유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섬에는 380여 종의 새들이 있는데, 특히 해안에는 무수히 많은 바다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OPW(Office of Public Work)에서는 공화국 내에 5개의 자연공원과 75개의 자연보존지역을 선정해 관리하고 있다 : 북아일랜드의 National Trust 역시 26개 자연보존지역을 감독하고 있다. 습지대에 대한 보호관리는 최근 아일랜드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아일랜드는 기후가 온화한 편이다. 1, 2월 평균 기온은 4-7℃정도. 7, 8월 평균 기온은 17-20℃. 5, 6월이 가장 화창하고 12월이 가장 흐리다. 아일랜드 주변의 바다는 북대서양 조류와 걸프 해류 덕택에 위도에 비해 놀랄 만큼 따뜻하다. 그러나 변덕이 심한 기후로 한여름에도 추운 날씨와 갑작스런 비에 대비해야 한다. 아일랜드에는 비가 많이 온다. 가장 건조한 곳도 일년에 150일 정도의 비는 온다. 일주일 내내 비가 오는 때도 있다. 연 강수량은 약 100cm로, 비에 관한 지역적인 용어나 유머가 많다. 예를 들면 '부드러운 날 soft day'은 비오는 날을 말하며, 우스갯소리로 벨파스트 외곽의 캐이브 힐(Cave Hill)이 안보이면 비가 오기 때문이고, 보이면 곧 비가 올 징조라고 한다. 그리고 우산을 가지고 다니건 안 가지고 다니건 젖기는 마찬가지라고들 한다.
역사
수많은 석기 시대 유적은 아일랜드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수도원의 잔해들과 둥근 탑들, 그리고 무너져가는 교회당들은 그에 못지 않은 기독교적 전통의 뿌리깊음을 보여준다. BC 300년경 맹렬하고 기세 좋은 켈트 족 군사들과 모험가들이 유럽 대륙으로부터 아일랜드에 도달해 BC 100년까지 머물렀다. 로마인이 영국을 침공했을 때, 웨일즈 너머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기울어 가면서 아일랜드에도 유럽문명이 들어와, 5세기경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중세 암흑기 동안 아일랜드는 성자들과 학자들의 땅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이 나라의 많은 수도원들에서는 열성적인 수도사들의 손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성경의 필사본들이 계속 만들어져 왔고, 그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남아 그 정열을 짐작하게 한다. 8세기 말부터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이 푸르고 온화한 땅에 정착할 때까지 부유한 아일랜드의 수도원들은 바이킹의 약탈대상이 되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전성기에 더블린(Dublin), 워터포드(Waterford), 리머릭(Limerick)등지를 점령했었지만, 결국 1014년 클론타프(Clontarf) 전투에서 아일랜드의 전설적 영웅 브라이언 보루Brian Boru에게 대패했다.
영국의 침략
1169년 힘을 키워가던 아일랜드 왕조에 두려움을 느낀 헨리 2세가 병력을 아일랜드로 급파하면서 노르만인의 영국 정복은 아일랜드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이것이 바로 오랜 영국-아일랜드 관계의 시작이 된다. 그러나, 이전 바이킹들과 마찬가지로 영국계 노르만 침입자들도 정착 후로는 점차 융화되어 갔고, 영국인들의 영향력도 점차 패일(Pale)이라 불리는 더블린 주변의 지역으로 물러났다. 여기서 'beyond the pale'(범위 밖에)란 관용어구가 생겨났다고 한다.
1500년경, 영국의 헨리 8세는 쉽게 굴하지 않는 이웃나라 아일랜드에 영국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시 행동을 개시했고, 그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1세때 두 나라간의 갈등은 보다 심각해진다. 카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은 심하게 탄압당했고 열성적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들이 카톨릭 신자들로부터 몰수한 땅에 이주되었다. 영국군대는 계속되는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1607년에 아일랜드 왕실은 프랑스로 건너가게 되었다. 종교적 갈등은 점점 심각해졌고 1641년에는 카톨릭 신자들이 얼스터(Ulster)에서 반란을 일으켜 프로테스탄트 정착민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러나 40년대가 채 저물기 전, 영국의 청교도 전쟁이 올리버 크롬웰의 승리로 끝나고, 카톨릭을 옹호했던 찰스 1세가 패배하자 구교도의 나라 아일랜드에는 다시 한번 피 바람이 분다.
크롬웰은 1649년부터 종교적 광기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날뛰어 아일랜드 전역을 피바다로 물들이며 살육을 행했다. 전쟁에서 패한 아일랜드인들은 서인도 제도에 노예로 끌려가거나, 땅을 빼앗긴 채, 거친 불모지 서아일랜드로 쫓겨났다. 그 후 10년이 채 안되어 1660년의 왕정복고 시대가 열리고 찰스 2세가 왕좌에 오른다. 그는 심적으로 카톨릭 지지자였으나 신교도들의 강력한 견제로 뜻을 펴지 못한채 1685년 동생 제임스 2세에게 왕권을 물려준다. 제임스 2세의 보다 적극적인 카톨릭 옹호는 영국 프로테스탄트의 강력한 반대를 불러일으켜 결국 그는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그는 신교도인 자신의 딸 메리와 남편인 오렌지고 윌리엄이 이어받은 영국 왕좌를 되찾기 위해 아일랜드에서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
결국 아일랜드는 영국 왕좌를 위한 싸움터가 된 것이다. 제임스 2세는 데리(Derry)의 포위공격 지연으로 꾸물거리다가 1690년 보인(Boyne)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18세기 초, 아일랜드의 억눌린 카톨릭 세력은 겨우 국토의 15%만을 차지하고 살며 일, 교육, 종교, 땅의 소유 등에 있어서 온갖 잔인한 제한을 겪어야 했다. 미국 혁명(1775-1783)과 프랑스 혁명(1789)은 영국으로부터 좀더 공정한 대우를 바라던 아일랜드의 신교도와 카톨릭 교도 모두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종교 협상은 오래가지 못했고, 1798년의 프랑스 지원을 받은 월프 톤(Wolfe Tone)의 봉기와, 1803년의 이상주의적이기만 했던 로버트 에멋 (Robert Emmet)의 시도도 모두 끔찍한 실패로 돌아갔다. 1800년 Act of Union을 통해 아일랜드는 영국과 정치적으로 통합하기에 이른다.
19세기 전반 다니엘 오코넬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아일랜드 독립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는 듯했다. 카톨릭에 가해졌던 제제들의 상당수가 폐지되거나 축소되었다. 그러나 그의 활동 역시 실패했고 아일랜드는 더욱 큰 비극을 맞아야 했다. 남미에서 유입된 감자는 재배가 쉬워 급격히 늘어만 가는 빈곤한 아일랜드인의 주식이었다. 그러나 1800년에서 1840년 사이 인구가 4백만에서 8백만으로 급증하는 상황에서, 1845년과 1849년 사이에 감자 수확이 계속 실패하자 끔찍한 기근과 대규모 이민이 초래되었다. 이 재난기에 영국으로부터의 지원은 형편없었고, 미국으로 떠난 아일랜드인들의 생활은 비참의 연속이었다. 후에 재산을 모은 아일랜드계 미국 부호들은 독립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돌아오기도 했다. 2백만에 달하는 아일랜드인들이 20세기까지 계속된 기근과 이민의 결과로 죽거나 나라를 떠났고, 계속되는 이민으로 인구는 20세기에 들어서도 계속 줄어갔다.
19세기 후반 영국 의회는 마침내 아일랜드에 '자치권'과 어느 정도의 결정권을 주기 시작했으나 그 과정은 아주 길었고, 제 1차 세계 대전과 얼스터 사태가 이를 방해했다. 북아일랜드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던 신교도들은 자치권이 시행되면 카톨릭 국가에서 그들이 소수민이 될 것을 알고 이에 맹렬히 반대했다. 아일랜드는 1916년, 엉망이 되어버린 봉기만 없었더라면 느리게나마 평화적으로 타협을 볼 수도 있었다. 이 부활절 봉기는 아일랜드 식으로, 말만 거창하고 별다른 계획도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한 것이었다. 영국의 반응 또한 무계획적이었다. 폭동이 진압된 후, 주모자들을 오랫동안 질질 끌며 처형해 오히려 그들을 순교자로 떠받들게 했고 급기야는 아일랜드 독립에 대한 국제적 지지 여론이 형성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독립의 길
1919년부터 아일랜드 정치 운동 단체인 '신 페인 Sinn F in'('우리 홀로', 혹은 '우리 스스로'란 뜻)과 그 우익 군사 세력인 아일랜드공화국 군대(IRA)는 영국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였다. 진압을 위해 파견된 악명 높은 영국군 Black & Tans의 날로 심해져 가는 잔혹한 대응이 반영감정을 더욱 부추겼고, 피는 피를 불러 1921년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비극은 그칠 날이 없었다. 조약에는 수많은 조건이 덧붙여졌고, 영국계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많이 사는 북아일랜드 6개국은 독립에서 제외되자, IRA 지도자인 마이클 콜린즈는 '나는 내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고 말했고, 그 후 이 협약을 받아들이려는 파와, 북아일랜드 6개 주가 모두 포함된 아일랜드 전체의 완전 독립을 위해 투쟁하겠다는 파 사이에 내란이 일어났다.
분단 이후의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합리적인 타협의 길로서 동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의견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쓰라린 내전이 계속되었다. 그 당시의 논점은 배제된 6개 주의 미래보다는 새로 태어날 나라의 지배적인 위상과 영연방으로서 영국 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1년도 채 안되어 콜린즈는 암살되었고. 내란은 곧 끝이 났다. 1923년 내란이 끝난 후, 거의 50여년 간 아일랜드 공화국의 역사는 그나마 평화로웠다. 조약에서 영국과 아일랜드를 계속 연관시키는 조항은 하나하나 폐기되었고, 1949년에는 아일랜드가 영국 연방에서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번영하는 농경 사회로서의 아일랜드의 전망 역시 사라져갔고, 제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이민자 수도 줄어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일랜드 독립에서 배제되고 영국에 속해 있던 북 아일랜드의 6개 주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거기서 다수의 신교도들이 카톨릭을 권력에서 체계적으로 배제시킴으로써 전권을 휘둘렀으며, 이 같은 'jobs for voys' 정신은 결국 1967년 비종파주의 민권운동을 발발시켰다. 카톨릭계 주민들의 콧대에 난폭하게 대립하던 신교도들은 결국 1969년 양측을 분리하기 위해 영국 군을 끌어들였고, 이에 반발해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던 IRA가 다시 일어나 하나의 아일랜드를 위한 투쟁을 벌였다(남쪽의 아일랜드 공화국은 이 투쟁을 지원하지 않고 있다).
심각한 분쟁이 1970년대에 도처에서 터졌고, 1980년대에는 좀 잠잠해졌으며 1994년에 평화가 손짓했다. 1993년 12월, 영국과 아일랜드 공화국간의 다우닝가 선언은 영국이 아일랜드 분리를 유지시키는 '이기적인 경제, 군사의 관여를 하지 않겠다'는 발표였다. IRA의 정치체인 '신 페인'은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영국 정부는 '신 페인'과 직접 협상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을 꺼리고 있다.
북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해서는 공화국 민족주의자들의 권리와 열망이 충족되어야 하고, 당연히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평범한 신교도들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 동시에 영국과의 연계를 약화시키려는 어떤 시도에도 IRA 식의 무력 저항으로 맞서겠다는 과격파 신교도들의 위협도 고려해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1994년 8월에 있었던 IRA의 조건 없는 휴전 발표는 북쪽에서의 정치적 폭력 종식에 대해 희미하나마 희망을 던져 주었다. 준 군사 조직을 가진 신교도들이 10월 휴전에 응하자, 평화 유지의 전망은 지난 25년 간의 어느 때보다도 훨씬 좋아졌다. 영국의 군대 철수 의지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앞으로 전개될 아일랜드 역사에 큰 변수가 될 것이다.
아일랜드에서의 18개월간 평화로운 시간은 1996년 2월 어느 금요일 저녁 IRA에 의한 폭격으로 런던 동부 Docklands지역에서 많은 사상자와 재산피해를 내면서 무산되었다. IRA는 무기사용중지를 취소하고 연이어 런던과 맨체스터에 폭격을 가했다. IRA의 무기사용을 다시금 철회하면서 1996년 6월 Ulster의 미래에 관한 논의에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가운데 영국 대표자들과 Sinn Fein을 제외한 남북아일랜드 대표들의 회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직 멀기만 한 문제 속에서도 협상과 진정한 평화의 가능성은 보이고 있다.
source : LcKnx7I97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