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Bulgaria - 지리, 기후, 역사
불가리아 (Bulgaria)
불가리아가 혼란스런 자본주의 서커스장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들이 안전 그물도 없이 공중그네를 타고 있다고 말해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화선에서 구리를 빼내기 위해 거리를 파헤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곧 전화가 정확하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오늘날 불가리아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불가리아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씩씩하게 투쟁해나가고 있으며 사회경제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친절한 국민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불가리아의 도시 지역, 특히 소피아(Sofia)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여전히 나귀를 몰아서 농사를 짓고 집에서 키운 감자와 집에서 만든 치즈를 먹고 사는 농부들을 만날 수 있다. 달라진 점은 그 농부들 역시 저녁이면 위성 TV 앞에 앉는다는 점이다. 불가리아의 가속화된 인플레이션으로 관광객들은 터무니없이 싼 스키장과 해변 휴양지를 제공받을 수 있고, 또한 불가리아의 장관을 이루는 산맥, 안식처 같은 수도원, 교회, 모스크, 로마와 비잔틴 시대의 유적, 어디서건 마실 수 있는 뛰어난 커피 등을 즐기기 위해서도 많은 경비가 필요하지 않다.
통계 자료
국명: 불가리아 공화국(Republic of Bulgaria)
면적: 110,912 평방 km
인구: 900 만명
수도: 소피아(Sofia, 인구 110만명)
인종: 불가리아인 85% 터키인 8.5% 집시 2.6% 마케도니아인 2.5%
언어: 불가리아 어. 터키어 및 로마니어(집시어)를 쓰는 사람들도 소수 있음.
종교: 불가리아 정교 80%, 이슬람교 4%
정체: 민주정
지리 및 기후
불가리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점, 발칸 반도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불가리아의 어느 지역을 여행해도 지형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바람이 많이 부는 평원은 다뉴브 강 제방에서부터 스타라타 플라니나(Stara Planina) 정상까지 경사져 있다. 이 동서 산맥은 불가리아 북부를 가로질러, 흑해에서 유고슬라비아에까지 이른다. 불가리아 남부에는 산이 더 많다. 소피아 남쪽 리라(Rila) 산맥의 무사라 봉(Musala Peak, 2925m)은 알프스와 트랜스코카시아(Transcaucasia) 사이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더 남쪽 피린 마시프(Pirin Massif)의 비흐렌 봉(Vihren Peak, 2915m) 역시 거의 비슷하게 높다. 로도피(Rodopi) 산맥은 리라와 피린에서 그리스 국경을 따라 동쪽으로 뻗으며 에게해와 불가리아 중부의 트라키안(Thracian) 평원을 갈라놓고있다.
많은 구 공산국가에서처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현금의 매력이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라는 요소를 밀어내고 있다. 보호구역에서도 벌채와 사냥이 행해지고 있으며 백색 황새와 검은 대머리수리 등의 새들이 멸종위기에 있다. 불가리아의 곰 숫자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인한 '곰 피난소' 덕분에 일시적으로 증가했었지만 다시 감소되고 있다. 현재 불가리아 숲에서 눈에 띄는 동물로는 사슴, 토끼 정도이다.소피아에서 200km 북쪽에 있는 코즈로뒤(Kozloduj) 핵발전소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 시설에 속한다. 이 발전소가 1974년 문을 연 이래 주기적으로 사소한 사고가 일어났고 부분적인 폐쇄와 그로 인한 나라 전체의 전력 공급 중단을 의미하는 안전 경보도 여러 번 내려졌다. 이를 폐쇄하기 위한 서구의 원조액이 할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시설을 폐쇄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역사
고대 오르페우스와 스파르타쿠스의 출생지였던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속해 있었다. 기원전 46년 로마인들이 반도 전체를 점령하였고, 트라코-일리리안(Thraco-Illyrian) 부족의 침입으로 이 지역이 폐허의 황무지가 되기 전까지 거주했다. 6세기에는 평화를 좋아하는 슬라브인들이 이 지역에서 가축을 방목하며 살았다.
679년 사나운 터키계 부족인 불가르인들이 다뉴브 강을 건너와 최초의 불가리아 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비잔틴 제국의 영역을 침범하며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9세기에는 마침내 마케도니아를 점령했다. 불가르인들은 결국 숫적으로 우세한 슬라브 민족에 동화되었고 그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865년 한 비잔틴 수사가 궁전 벽에 지옥의 그림을 그려 짜르 보리스(Boris) 1세를 겁먹게 함으로써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성공했다.
870년 불가리아 교회는 독자적인 총주교를 내세우는 독립 조직이 되었으며, 여기에 고무된 짜르 시메온(Simeon, 893-927)은 세르비아를 넘어 아드리아 해까지 왕국을 확대시켰다. 시메온이 탐욕스러운 손길을 비잔틴 왕좌에까지 뻗치자 그의 왕국은 다시 축소되었다. 이는 불가리아를 약화시켜 비잔틴 황제인 바실(Basil) 2세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했다. 바실 2세는 1014년의 결정적인 승리 이후 쫓겨난 15,000명 불가리아 군대를 주목해 왔던 것이다. 불가리아는 이후 4년동안 비잔틴의 지배를 받았다.
두 번째 불가리아 제국(1185-1396)은 아센(Asen)과 피터(Peter)라는 두 형제가 비잔틴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한 장군을 이끌고 온 후 세워졌다. 새롭게 얻은 자신감을 뽐냈던 새 제국은 트라케(Thrace),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의 전 지역을 차지했다. 다음 두 세기동안 타타르인들과 터키인들이 제국을 조금씩 침식시켰다. 14세기 말 터키인들이 불가리아 전역을 지배함으로써 5세기에 걸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억압적인 체제가 지속되기는 했지만 터키인들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불가리아인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거나 그들의 언어와 관습을 근절시키려는 조직적인 시도는 없었다. 터키세력이 약화된 18세기 불가리아인들은 치솟는 세금과 인플레이션,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와 터키 사이의 성공적이지 못한 전쟁 부담 등으로 고생하기 시작했다. 불가리아의 분노에 대응해 터키인들은(전쟁 사이사이에) 불가리아인들을 동화시키려는 개혁안을 도입했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19세기 초 민족적 관습과 민간 전승은 전국적 부흥으로 꽃피었고 지하 혁명 세력은 터키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 1876년 4월 코프리브시티사(Koprivshtitsa)에서 시기 상조의 폭동이 일어나자 터키는 전례없는 잔인성으로 이를 탄압했고 전 유럽에 '불가리아에서의 잔악무도한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퍼졌다. 15,000명 불가리아인들이 플로브디프(Plovdiv)에서 학살당했고 58개 마을이 초토화되었다.
파자르디크(Pazardzhik)는 한 대담한 서기 덕분에 구원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는데 그는 공식 명령서에서 쉼표를 하나 옮김으로써 명령을 '마을을 불태우고 용서하지 말라(burn the town, not spare it)'에서 '마을을 태우지 말고 용서하라(burn the town not, spare it)'로 바꿨다는 것이다. 1870년대 후반 분노한 유럽 연합국들이 불가리아를 하기 위해 진주했다. 주된 구세주였던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200,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러시아군이 이스탄불 50km 앞에 다다르자 터키는 발칸 반도의 60%를 불가리아에 양도했다.
불가리아-그리고 러시아와 관계된 불가리아의 소규모 동맹 복합체-의 근대사는 1878년 해방부터 시작된다. 발칸의 강력한 러시아 위성국을 두려워한 유럽 세력은 불가리아를 조금씩 난도질했지만 이 상황에 누구도 만족하지 못했고 1차 대전에 앞선 두 차례의 발칸 전쟁에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전쟁에서 불가리아는 그다지 성과를 올리지 못해 마케도니아를 잃었으며 그에 대한 불만으로 불가리아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차 대전에서 동맹국에 합류했다.
전반기에는 마케도니아 난민, 공산주의 폭동, 경제 위기와 관련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 불가리아의 분열 과정에서 가장 끔찍한 사건이 1923년 9월 일어났는데, 수천의 토지균분주의자와 공산주의 선동가들이 반동 캠페인 도중 학살당한 것이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불가리아는 독일 편에 섰지만 대중 폭동을 두려워한 짜르 보리스 3세는 러시아와의 전쟁선포를 거부했다. 지하조직인 파더랜드 프론트(Fatherland Frot)는 친독일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을 통합해, 결국 군주제를 전복시키는데 필요한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었다. 공산주의자 토도르 지브코프(Todor Zhivkov)는 군대를 설득했고, 결국 전쟁 말기에 불가리아는 과거의 해방자(러시아)편에 서서 현재의 동맹국(독일)과 싸웠던 것이 다.
1954년부터 1989년까지 불가리아 지도자였던 토도르 지브코프의 임기 동안, 불가리아는 동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농부들은 소규모 개인 농장을 경작할 수 있었고 공업 역시 발달하여 국민 총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1989년 공산주의 붕괴로 공업은 위험에 노출되었고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뒤숭숭한 사건이었다.
이름을 바꾼 공산주의 정당(현재 불가리아 사회당)이 새로운 민주주의 불가리아의 방향을 통제하면서 뒤숭숭한 잡음에 대한 대통령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있다. 급속한 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 사회적 안전장치의 부재, 눈에 띄게 증가된 용인된 범죄 등은 광범위한 환멸을 불러 일으켰다.
페타르 스토야노프 대통령 하에, 진보는 꾸준하지만 일하는 가축처럼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source : N1-Jmq7BL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