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zerbai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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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zerbaijan - 지리, 기후, 역사

2019-02-01 1737
About Azerbaijan

아제르바이잔 (Azerbaijan)

아제르바이잔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로 석유가 나오기 시작하자 경제적으로 나아지기 시작했다. 카스피해가 바라다 보이는 수도 바쿠(Baku)는 이러한 경제적 호황으로 인해 갑작스레 풍요로운 도시로 성장했다. 아제르바이잔에는 많은 청동기시대의 암면 조각이나 중세시대의 회교사탑, 회교도의 사원인 모스크, 아제르바이잔의 유명한 직물 등 눈길을 사로잡는 많은 볼거리들이 있는 나라이다.

최근 들어 아제르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유혈사태는 조금씩 진정되어 가지만 아직까지 아제르바이잔은 모든 이들에게 평등한 그런 곳은 아니다.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 Karabakh)(1992년 1월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자치주)지역은 아직까지 위험한 곳이며, 아르메니아 가까이 갈수록 좀 더 팽팽한 긴장상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쪽의 조용한 지역에 이르게 되면 이런 긴장상태와는 다른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는데, 어쨌든 아제르바이잔은 한 번쯤 여행해 볼 만한 그런 곳이다.

통계 자료

국명: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Azerbaijani Republic)
면적: 86,600 sq km (33,400 sq mi)
인구: 7백80만명
수도: 바쿠(Baku -인구 170만명)
인종: 아제르인(90%) 다게스타인(3,2%) 러시아인(2.5%) 아르메니아인(2.3%)
언어: 아제르어(89%) 러시아어(3%) 아르메니아어(2%)
종교: 시아파 회교(93%) 러시아 정교(2,5%) 아르메니아 정교(2.3%)
아르메니아 정교 (2.3%)
정체: 공화국

지리 및 기후

아제르바이잔은 코카서스 산맥 남동쪽 카스피해 연안의 서쪽해변가에 위치한 작은 나라이다. 서쪽으로 코카서스, 북동쪽으로 러시아, 그리고 북서쪽으로 조지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아르메니아는 서쪽, 이란과는 남쪽으로 국경선을 이루고 있다.아라스(Aras)강이 남쪽국경선으로 흘러 쿠라(Kura)강과 합류해 북서쪽 산에서 남동 해안을 통해 카스피해로 들어 간다.아제르바이잔의 서쪽 5500sq km (2125 sq mi)지역은, 나크체반(Nakhichevan) 자치공화국이다.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남서쪽은,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kh)공화국의 오블라스트(Oblast) 자치주로, 아르메니아(카라바흐 인구의 대부분은 아르메니아인들이다)와의 전쟁 후 독립을 선언한 곳이지만 여전히 아르메니아의 통치하에 있다. 라친(Lachin)에 있는 좁은 다리가 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높은 곳은 코카서스산맥에 있는 눈 덮인 Bazardyuzyu산으로 해발 4465m(14,645ft)이다.

산맥의 남쪽에 있는 Sheki Zakataly지역은, 많은 강이 躍0?이 지역 원주민을 포함해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곡물과 과일, 담배, 견과류등이 생산된다. 해안저지대에서는 야채와 과일, 곡물 등이 생산된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에는 풍부한 석유자원과 천연가스 같은 지하자원이 압솔론(Apsheron)반도 지하와 카스피해 부근 해안선을 따라 많이 매장되어 있다. 아제르바이젠에는 200여종의 자생식물을 포함해 약 4000여종의 식물들이 있다.

산아래 언덕에는 소나무와 백양목,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등이 숲 속에 우거져 있으며, 해안저지대 남부에는 오렌지 농장이 들어서 있다.주요 동물생태계는 파충류군이나, 산에서는 산양, 사슴, 곰, 야생 돼지 등도 찾아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는 350여종의 조류를 포함한 12,000여종의 동물이 있으며 약 200여종은 Kizilagadj 보호구역(레코란(Lenkoran)저지대에 있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해안평야지대에선 가젤을 볼 수 있고 타쉬(Talysh)숲에서는 호랑이와 호저(가시가 있는 돼지의 일종)를 볼 수도 있다.

카스피해에는 청어와 연어, 보기 드문 민물농어가 있고, 특히 철갑상어가 들끓는 곳으로 세계 철갑 상어의 5분의4가 이 곳에 몰려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기후는, 북 서쪽 산맥과 기분좋게 따뜻한 카스피해연안 사이에서 극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봄과 여름에는(4월 중순에서 10월) 20도에서 30도(화씨 70도에서 80도) 가량이며 12월에서 3월까지는 훨씬 더 많이 내려간다.

역사

초기에 이 땅은 다뉴브 계곡을 따라 들어온 종족들과 군대들에 의해 많은 침략을 받았다.-켈트족, 노르만족, 반달족, 비지고스족, 훈족, 아바스족, 슬라브족 그리고 맨체스터 연합지원군이 모두 이 땅을 침략했었다. 서기 803년 샤를마뉴가 다뉴브 계곡에, 오스마르크(Ostmark)라는 영지를 세운 후로 이 곳은 게르만계 중심의 기독교국이 되었다. 1278년부터 합스부르크가가 정권을 잡고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오스트리아를 지배한다.

합스부르크 가의 통치하에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점차 확장되었다. 카린시아(Carinthia)와 카니올라(Carniola)가 1335년 합병되고, 1363년에는 티롤(Tirol)이 합쳐졌다. 그러나 합스부르크가는 영토확장에 있서 무력침공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보랄산(Voralberg) 대부분은 파산한 영주들로부터 사들인 것이고, 다른 영토도 정략결혼으로 얻어낸 것이다.

국제 결혼은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그 바람에 약간의 유전적 부작용도 생겨났다고 한다 - 물론 공식 초상화에는 그렇게 그려지지 않았지만, 가족 초상을 보면 턱이 점차 넓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1477년 막스 밀리언은 부르고뉴의 마리아와 결혼하여 부르고뉴와 네덜란드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큰아들 필립은 1496년 스페인 왕녀와 결혼하였고, 1516년에는 필립의 아들인 스페인의 찰스1세(광대한 식민지의 지배권을 부여받는 지위)가 되었다. 3년 후 그는 신성 로마제국의 찰스5세가 되었다. 이런 영토를 한사람이 제대로 다스리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찰스는 1521년 오스트리아지역을 동생 페르디난드에게 넘겼다.

비엔나에 머문 첫 번째 합스부르크가 사람인 페르디난드는 1526년 매형 루이2세가 죽자 헝가리와 보헤미아까지 통치하게 된다. 1556년 찰스가 퇴위하면서 페르디난드1세가 이 곳의 왕이 되고, 찰스의 나머지 영토는 그의 아들 필립2세가 물려받게 된다. 이렇게 되어 합스부르크가 왕가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둘로 나뉘게 된다. 1571년 황제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자 대다수 오스트리아인이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1576년 새 황제 루돌프2세가 종교개혁 반대정책을 취하자 나라전체가 카톨릭으로 환원되었는데 물론 그것은 강제적이었다. 유럽의 개신교지역에 카톨릭을 강요하려는 시도 때문에 1618년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중부유럽은 황폐해졌다.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Westphalia)과 함께 평화가 도래하는데, 이것은 유럽지역에서의 카톨릭 강요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남은 17세기동안 오스트리아는 투르크족이 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40년 마리 테레사가 여자이기 때문에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계승받았고 뒤이은 전쟁 덕분에 그 왕권은 유지되었다. 그녀의 40년 통치기간에 오스트리아는 근대국가로서의 발전을 시작한다. 그녀는 권력을 중앙집권화하고 공무원을 만들어 군대개편, 경제개혁, 공공교육제도등을 도입하였다. 1805년 나폴레옹이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를 포기하라 오스트리아의 오스터릿츠(Austerlitz)를 공격하자 이런 진보는 중단되었고, 이 분쟁은 1814-15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비엔나 의회의 중재안이 나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중재안에 의해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의 통치권을 갖게 되지만, 1848년 혁명기간 중 내적 변혁을 겪다가 결국 1866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패배 후 1867년 황제 프란쯔 요셉하에 두(오스트리아, 헝가리)왕조로 나뉘게 되며, 비스마르크가 통합한 독일제국도 잃게 되었다. 두 왕조는 방위, 외교, 경제정책을 공유했지만 의회는 분리되어 있었다. 또 한 번 번영의 시기가 도래하자 특히 비엔나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조카가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자 상황은 급변하여 한달 후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기 이르렀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1916년 프란쯔 요셉이 죽고 그의 계승자가 1918년 전쟁의 결과로 퇴위하자 오스트리아는 11월12일 공화국이 된다. 1919년 축소된 새 국가는 이전 합스부르크 통치하에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유고슬라비아에 이어 루마니아, 불가리아에까지 독립을 승인하게 된다. 이러한 손실은 심각한 경제문제와 정치적, 사회적혼란을 야기시켰다. 한편, 독일에서 나찌가 등장하자 문제는 더 커졌다. 나찌는 오스트리아의 내전을 꾀하여 수상 도르프스의 암살에 성공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내에 국가 사회주의당 세력을 키우기 위해 새로운 수상을 세웠는데 크게 지지를 받아서, 1938년 오스트리아를 침략하여 독일제국에 복속시키는 데도 별 저항이 없었다. 같은 해 4월 국민투표의 결과로 독일과의 합병이 결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연합군은 1937년 이전 정권을 복귀시켰다. 미, 영, 소, 불의 연합국은 오스트리아에 주둔하며 영토를 4등분하였고, 소련 점령지역에 속해있던 수도 비엔나도 4등분 되었다.

다행히 자유왕래가 허용되어 베를린과 같이 되진 않았다. 1955년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연합하지 않을 것과 중립국이 될 것을 선언함으로써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이 비준되었고 점령군은 철수했다.2차 세계대전이후, 오스트리아는 경제난국을 타개하지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EU(EEC)와 1972년 자유무역조합을 협정했고, 1994년 국민투표에 의해 EU로 가입할 것을 결정해, 1995년 1월1일 정식으로 EU국가가 되었다.

source : I-xQCEfJo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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