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ba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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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Lebanon - 지리,, 기후, 역사

2019-02-01 1922
About Lebanon

레바논 (Lebanon)

한때 중동의 파리라고 여겨지던 레바논은 1975년 내전으로 분열되면서 여행자들의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는 레바논 여행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움도 놀랄 만큼 많이 없어졌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레바논은 수수한 크기 안에 고대 도시들이나 로마 유적, 고급스런 스키 휴양지, 목가적인 매력과 이슬람교의 건축물을 시작으로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레바논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나라의 단일 문화주의자들은 레바논의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다양성이 사회적인 몰락을 촉진할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불행히도 레바논은 이 주장이 틀린 것이라는 것을 주장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현재 레바논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주로 부유한 단체 여행객들이다. 개별적인 여행자들은 아직 드물지만 역시 환영 받는다. 레바논 인들은 이방인에게 순수한 환대를 내비치며 전혀 수줍어하지 않고 자신의 집으로도 초대하기도 한다. 이 지역의 역사나 레바논이 현재 어떻게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알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이다.

통계 자료

국명 : 레바논 공화국(Republic of Lebanon)
면적 : 10,452 sq km
인구 : 대략 300만 명 
수도 : 베이루트(Beirut, 인구 1,500,000)
인종 : 아랍인, 팔레스타인인,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언어 : 아랍어, 프랑스어(둘 다 공식언어), 영어, 아르메니아어 
종교 : 이슬람, 기독교
정체 : 공화제

지리 및 기후

레바논은 지중해의 동부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과 서쪽의 시리아, 남쪽의 이스라엘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로 대충 남북으로 180km, 동서로는 50km정도 크기이다. 수수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는 완벽히 다른 지리학적 지역들이 있다.

매우 좁고 울퉁불퉁한 해안에는 이 나라의 주요 도시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내륙에는 레바논 산맥이 가파르게 솟아올라 극적인 정상과 능선을 연출하며 가장 높은 코르넷 아스사다(Qornet as-Sawda)는 3000m가 넘는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능선은 150km 길이의 베카아(Bekaa) 계곡으로 험하게 떨어져 내리며 이곳에서 1000m 고도를 유지하면서 해안과 평행하게 달린다. 베카아는 주요 포도주 산지로 최근까지 마리화나의 산지이기도 했다.

레바논 산맥 반대는 베카아 계곡 동쪽에서 완전히 메마른 중앙 산맥을 이루어 자연스럽게 시리아와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레바논에서 가장 유명한 식물은 삼나무로 현재는 겨우 몇몇 산 정상, 그 중에서도 쵸우프(Chouf) 산맥의 브챠레(Bcharre)와 바룩(Barouk) 근처에서만 발견된다. 이들 몇몇 숲들만이 성경이 쓰여질 당시에는 이 나라를 덮고 있던 레바논의 위대한 삼나무 숲 중 남은 전부이다. 그러나 레바논은 중동에서 아직도 가장 나무가 많은 나라이며 여러 종류의 소나무가 산에서 자라고 많은 연안 지역에는 과일 나무들이 경작되고 있다.

레바논의 산악 지역은 맹금류들의 고향으로 에덴(Ehden) 자연 보호구역에는 여러 종의 독수리와 대머리 수리, 빨간 수리, 보넬리 독수리, 사르디안 휘파람새, 스코프 올빼미 등이 산다. 철새이건 상주하는 새이건 바닷새들도 트리폴리 연안 앞의 팜(Palm)섬 공원에서 볼 수 있다.

바다거북이와 지중해 바다표범들도 공원 주위의 물에서 산다. 레바논의 거친 육상 포유동물로는 특이한 고슴도치 이상 재미있는 동물이 없다. 레바논의 생태학은 내전과 산업화의 진행으로 크게 위협받고 있다. 전쟁동안 오염물질이나 쓰레기가 바다와 강에 마구 버려지고 무계획적인 건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섰다.

정부의 통치력 부재는 곧 여러 산악 지역에서 불법적인 채석이나 벌채가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여러 자연보호 기관이 이러한 피해를 고치고 법을 통해 자연 환경과 금렵지역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다양한 지형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후가 지역마다 크게 변화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넓게 이야기해 레바논은 세 가지 다른 기후 지대를 가지고 있다 - 연안지역과 산악지역, 베카아 계곡이 그것들이다. 연안지역은 시원하고 비가 많은 겨울과 덥고 때로는 숨이 막힐 듯한 지중해성 여름을 가지고 있다. 산악지역은 전형적인 고산 기후이다. 많은 사람들이 답답한 베이루트의 여름을 피해 고원으로 모여들며 겨울에는 눈을 찾아 다시 온다.

베카아 계곡은 뜨겁고 건조한 여름과 춥고 건조하며 눈, 서리, 거센 바람을 동반한 겨울로 대비된다.

역사

레바논은 성경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정복자들은 이곳의 풍부한 자연 자원과 안전한연안 정박장, 그리고 높은 산들의 방어 가능성에 매력을 느껴왔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이 나라의 역사는 침략자, 약탈자, 유명한 사람들의 명사록이 되었다. 레바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BC 10,000년경의 일로 BC 3,000년 전에 이르러서는 각 마을들이 전형적인 도시로 발전했다.

BC 2,500년경에 연안은 지중해에서 가장 위대한 초기 문명 중 하나를 일으킨 페니키아인들이 나중에 들어와 이곳을 식민지화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정치적으로 전혀 통일된 적이 없으며 각각의 독립된 도시 국가들에서 나오는 사업과 지적인 노력의 결과를 통해 이곳을 지배했다.

훌륭한 장인들이었던 그들은 월등히 발전된 배와 항해 기술을 통해 바다를 지배했고 최초의 알파벳을 발명하였다 이 발명은 초기 그리스 문화의 문학적 걸작을 낳게 하는 주목할만한 발전이다.BC 9세기에 앗시리아인들이 들어와 페니키아의 배타적인 지중해 무역 지배를 깨뜨렸다.

그들은 신바빌로니아인들에게 굴복하였고 다시 페르시아인들(페니키아인들에게는 해방자로 여겨졌다)들이 이곳을 지배했다. 페니키아인들은 BC 4세기 알렉산더 대제가 중동을 휩쓸면서 마침내 쇠퇴하였고 서서히 그리스화되었다. BC 64년 폼페이대제가 페니키아를 정복하고 로마제국의 시리아 주의 일부로 만들었다.

베이루트는 헤롯왕 치하에서 중요한 중심지로 발벡(Baalbek)에 엄청난 신전들이 건설되었다. 로마제국이 분열되면서 기독교가 힘을 얻고 레바논은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 수도를 둔 동쪽 비잔틴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스정교는 이곳에서 크게 세력을 얻지 못했으며 남쪽에서 이슬람이 알라의 이름으로 들어오면서 쉽게 레바논을 지배했다.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우마이유드(Umayyuds)는 레바논을 한 세기 동안 쥐고 흔들었지만 특히 레바논 산 근처에 난민촌을 지은 시리아의 마론파를 비롯한 현지의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였다

. 우마이유드가 750년 압바시드(Abbasids)에 무너지면서 레바논은 페르시아의 압바시드 제국에 밀려 침체하기 시작했다. 이 제국은 11세기 파티미드(Fatimid)왕조에 밀려나기 전까지 지속되었고 파티미드는 십자군 원정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십자군은 주로 예루살렘을 목표로 했지만 이 도시를 약탈하기 전에 마론파와 손을 잡고 시리아와 레바논 연안으로도 진격했다.

이슬람 아이유비드(Ayyubids)는 시리아, 이집트, 서아라비아, 예멘 일부 등을 공격하였고 나중에 13세기 말부터 300년 간 레바논을 지배한 마멜루크로 알려진 특이한 노예 군인 왕들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들은 대부분의 힘과 자원을 거세게 들이닥치는 몽고군과 싸우데 쏟아 부었다.

마멜루크는 오토만 제국의 등장으로 쇠약해졌으며 레바논의 부족 지도자들 레바논 중앙의 타누크히드 수장, 마론파, 드루제 등은 여러 제국과 복잡한 연합을 형성했다. 오토만의 술탄 셀림 I (Selim I)은 1516-17년에 정복하였고 파크 아드 딘II(Fakhr ad-Din II, 1586-1635)과 파크의 조카 아마드 마안(Ahmad Ma'an)에 의해 잠시 방해를 받았다. 아마드 마안은 1667년 수장국을 세워 현재 레바논의 핵심을 형성했다. 아마드 마안이 죽자 권력은 쉬합 가문으로 넘어가 국내의 세력 다툼과 종교적 차이가 수장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1840년까지 이 가문이 권력을 쥐었다.

1842년 오토만은 레바논산을 두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하나는 드루제, 다른 하나는 마론파로 만들었다. 이들 사이의 다툼은 필연적인 것으로 나누어 지배하겠다는 정책을 펴던 오토만은 이것을 더욱 부추겼다. 1845년까지 드루제와 마론파뿐 아니라 농부와 봉건적인 통치자들 사이에서도 전쟁이 일어났다.

오토만은 유럽의 압박을 받으며 오토만 기독교 총독의 지배하에 하나의 레바논 행정부를 설립하고 봉건제를 종식시켰다. 새로운 체제는 제대로 효과가 있어서 터키 군사 지배에서 심각한 기근을 겪게 되는 1차 대전까지 안정과 경제적인 번영을 가져왔다. 1918년 연합군의 승리에 뒤이어 레바논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2차 대전 중 레바논은 완전히 독립하였고 주요 교역과 은행업을 발전시켰다. 레바논의 결정적인 약점은 권력이 우익 기독교 국민들에게 집중되는 동안 이슬람교인(인구의 반을 차지하는)은 실제 정부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느끼는 데서 시작되었다.

많은 수의 팔레스티나인들이 들어오면서 갈등의 요소는 더욱 커져갔다. 내전이 발발한 것은 1975년으로 압도적인 이슬람 좌익 연합과 기독교 우익 군부 세력이 충돌하였다. 이후 20년 동안 정신 없이 얽힌 내전과 국제 전쟁 그리고 수많은 인질극은 이 나라에서 흔한 일이 되었다.

대충 이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리아는 이슬람과 기독교인 사이의 불안정한 평화를 성사시키려는 레바논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개입하였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로부터 북부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대리 군대를 설치하면서 진입해 들어왔고 UN은 기독교-이슬람교 사이의 내전 발발을 억제하기 위해 평화유지군을 보냈다. 이스라엘은 1982년 PLO를 제거한다고 발표하면서 베이루트를 포위했다. 또 이스라엘은 팔레스티나시민을 학살하는 기독교 민병대를 지원했다.

PLO는 부분적으로 미국에 의해 철수되었고 미국, 서유럽 군이 합쳐진 다국적군(MNF)은 팔레스티나와 이슬람교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이스라엘이 1년 남짓만에 철수하면서 드루제 이슬람 민병대와 기독교군 사이의 전투가 발발하였고 레바논 군과 이슬람 군과의 전투도 일어났다.

다국적군은 많은 인명피해를 입고 1984년 철수했다.시리아는 서서히 레바논의 이슬람 지역을 손에 넣었지만 1988년 레바논의 신 군사정부는 시리아를 몰아내려 했다.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싸움은 시리아와 좋은 관계에 있던 새로운 대통령인 중도 마론파의 엘리아스 히라위(Elias Hrawi)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92년 모든 살아남은 외국 인질들이 풀려났으며 시리아 군대는 철수를 시작했다. 1992년 8월 의회 선거가 20년 만에 치러졌고 이란의 지원을 받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정당인 헤즈볼라당은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라피크 하리리(Rafiq Hariri)는 새로운 수상이 되었다. 헤즈불라와 이스라엘 군인의 전투는 1993년까지 계속되어 분노의 포도 작전으로 최고점에 이르렀다 -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부의 80여개 마을에 대해 일주일간 공중, 바다, 육지의 폭격을 계속했다. 1996년 4월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과 베이루트를 공습하면서 다시 말썽이 커졌다.

국제사회의 반응은 이스라엘을 비난하였고 UN은 정전 협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긴 전쟁으로 인해 150,000명의 레바논 인들이 죽거나 황폐화된 나라를 떠났다. 기반 산업의 피해는 수백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오늘날 국내적으로 레바논은 빠르게 회복하고 있어서 건물도 늘어가고 있고 여러 기관들도 다시 문을 열며 경제도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

레바논의 문제는 다른 중동 국가에서는 한물간 강대국 세력들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다는 것이다. 과거 몇 십년 동안 중동 문제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국가들은 레바논을 싸움터로 이용하면서 억지를 부려왔다 - 그것이 PLO이건 시리아, 이란, 이스라엘, 아니면 실제로는 UN이건 모두 마찬가지이다.

레바논의 주요 정치적 이해관계의 갈등은 현재 어느 정도 진정되어있지만 이스라엘-레바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양쪽의 총격은 종종 계속되고 있다.

source : xKCFGS5-G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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