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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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Iran - 지리, 기후, 역사

2019-02-01 1694
About Iran

이란 (Iran)

이란은 '사탄의 시(Satanic Verses)'에 대해 어떤 언급조차 할 수 없는 곳으로, 햇빛에 그을려가며 여행할 여행지 목록에 올려질 곳은 아니다. 하지만 차도르착용에 개의치 않거나 에일(ale; 맥주의 일종)과 여권신장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 피한다면 나름대로 실망치 않는 흥미로운 여행을 선물할 것이다.

문화 탐방자들은 이란에서 격조 높은 고대도시의 잔해와 화려한 회교사원, 모솔리엄(mausoleum;무덤), 흥미로운 박물관 등을 볼 수 있다. 더욱 모험적인 것을 원한다면 소달구지를 타고 여행하거나 저렴한 스키를 즐길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배낭 속에 조심스럽게 보관했던 행글라이더를 타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대담한 이란인들도 구경할 수 있다.

통계 자료

국명: 이란 회교 공화국(The Islamic Republic of Iran)
면적: 1,648,000 sq km
인구: 7000만 명
수도: 테헤란(Tehran; 인구 1500만 명)
인종: 페르시아인(파시스 Farsis;65%), 아자리인(Azari; 25%), 아랍인(4%), 로스인(2%), 투르크 멘인(2%), 커디쉬인(Kurdish), 아르메니아인(Armenian), 유태인
언어: 페르시아어
종교: 이슬람교
정치: 회교공화국
정신적 지도자: 아야톨라하 사에드 아일 카메네이(Ayatollah Sayyed Ali Khamenei)

지리 및 기후

이란 회교 공화국은, 북쪽으로 아르메니아(Armenia),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투르크멘공화국(Turkmenistan)(모두 이전에는 구소련에 속했다) 그리고 카스피해와 접해있으며,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과 파키스탄(Pakistan), 남쪽으로는 오만(Oman)만과 페르시아 만 그리고 서쪽으로는 이라크(Iraq)와 터키(Turkey)를 마주하고있다.

이란의 국토면적은 한반도의 약 8배에 해당한다. 이란에는 3개의 산맥이 솟아있는데, 북서쪽의 비옥한 토양을 가진 화산대 사바란(Sabalan)과 타레쉬(Talesh) 산맥: 쥬라기에 형성되어 서쪽 국경 아랫부분 기다랗게 늘어서 있는 자그로스(Zagros)산맥; 그리고 이란에서 가장 높으며 만년설로 덮인 다마벤드(Damavand)산(5670m)이 속한 알보르즈(Alborz) 산맥 등이다. 북동쪽과 중앙평원 동쪽은 커다란 두 사막, 데쉬트-카비르(Dasht-et Kavir;200,999 sq km)와 데쉬트-룻(Dasht-e Lut)(166,000 sq km)으로 대부분 덮여 있다.

거칠 것 없는 대규모 도시개발과 산업발전 그리고 이란-이라크전쟁은 카스피해와 페르시아 만 주위의 자연환경, 특히 알보르즈(Alborz)산맥의 남부 능선에 돌이킬 수 없는 환경파괴를 초래하였다. 더 이상의 파괴를 막기 위해 이란정부는 몇 개의 국립공원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공원에 울타리와 산림감시원이 없으므로 이 국립공원이 파괴되는 것도 시간문제이다. 알보르즈 산맥의 북부능선은 낙엽수림으로 빽빽히 들어차 있고 이란에서 가장 방대하게 식물이 성장하는 지역이다.

아르다빌(Ardabil) 북쪽에 있는 칼칼(Khalkhal)과 고간(Gorgan) 남쪽 접경에 있는 나하르코란(Nahar Khoran)은 빼어난 관목 지대이다. 늑대, 자칼, 멧돼지, 하이에나, 흑곰, 스라소니 같은 포유동물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마잔다란(Mazandaran)지방의 깊은 숲 속에 많이 서식한다. 사막과 산에서는, 여유있는 페르시아 다람쥐와 몽구스, 빠르게 움직이는 페르시아 가젤(Gazelle), 호저(Porcupine), 오소리(Badger)와 토종의 야생 이란 당나귀도 볼 수 있다. 매력적인 동물로는, 검은 수염과 나선형 뿔을 가진 커다란 알보르즈 붉은사슴과 흰수염과 큰 뿔을 가진 오리얼(Oreal)양이 있다.

지형과 고도의 다양성, 국토의 크기로 인해 이란의 날씨는 매우 변덕스럽다. 겨울(12월에서 2월까지)에는 대부분 지방이 매우 추운 반면, 여름(6월에서 8월까지)에는 기온이 40℃까지 올라 매우 덥다. 일반적으로 강수량은, 이란에서 가장 추운 지역인 북쪽과 서쪽으로 갈수록 줄어든다.

역사

이란 지역에 등장한 최초의 인류는 엘라미티스(Elamites)로 추측되고 있다. BC2000년 경 아리아(Aryans)인들이 농업과 자급자족기술을 가지고 이 지역으로 왔다. 아케메니아 왕인 시리우스대왕(Cyrus the Great)이 이 지역을 침범했던 6세기 중반까지 페르시아의 역사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았다. 아케메니아(Achaemenian) 왕조가 페르시아 제국을 건국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결과적으로는 오늘날 이란의 탄생이 그 전통을 이어온 셈이다.

BC4세기 경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이집트, 터키, 이라크 등을 정복한 후 페르시아를 침공하였다. 3번에 걸친 다리우스(Darius) 3세의 평화협상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는 셔시(Shush)로 침범했다. 그는 그곳에서부터 동쪽으로 가기 위해 산을 넘어 시간을 조금 지체하긴 했지만 결국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로 들어갔다. BC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알렉산더제국은, 마케도니아 셀레시드(Macedonian Seleucids)의 지배하에 있던 페르시아와 더불어 3개의 왕조로 분리되어 서로 싸웠다.

그러나 셀레시드는, AD 3세기까지 페르시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던 유목민 파티안(Parthians)을 비롯해 상당수의 호전적인 소수민족을 지배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페르시아의 중부지역에서 온 사사니안(Sassanians)은 파티안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산업을 중요시하는 조로아스터교도(Zoroastrian)로 이루어진 집단으로서 도시개발과 무역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싸움에 참여하게 되어 637년 아랍(Arabs)에 의해 패망하였다. 아랍은 1050년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였고 이슬람교가 대부분 인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페르시아 문자와 이슬람 문화가 전파되었다. 아립인들은 1051년 에스파한(Esfahan)을 점령한 터키 왕조에 의해 패망했다.

많은 투쟁에도 불구하고 터키는 13세기초 징기스칸이 이끄는 용맹한 몽골에 의해 완전히 무릎 꿇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곳에 군림하였다. 14세기 후반 몽골이 통치력을 상실하자 티무리드(Timurid) 왕조가 그 공백을 매웠으나, 투르크멘(Turkmen)족, 오토만 터키( Ottoman Turks)족, 그리고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식민지 등의 견제를 받았다.

뒤를 이은 사파비드(Safavid)왕조(1502-1722)는 위대한 페르시아 제국 중 하나였다. 현명한 사하아바스 1세(Shah Abbas I)와 그의 추종자들은 시아(Shiism)파의 신전을 세웠고 에스파한(Esfahan)을 다시 건설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운명은 18세기초 아파한(Afahan)의 침입으로 쇠퇴했다.

하지만 아파한(Afahan) 역시 통치력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그 후 이란은 때론 이상하고 악독한 통치자에 의해, 때론 인정많은 통치자에 의해 유지되다가, 1779년 냉혹하고 포악한 아그하 무하메드 칸(Agha Muhammed Khan)이 터키의 가자(Ghajars)를 통합하고 테헤란에 수도를 세우면서 다시 중앙집권화되었다. 가자의 왕들은 1921년까지 평화스럽게 이란을 지배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중립을 유지하였다. 마지막 가자(Ghajar)왕 중 한 명이 선거와 입법의회(마지리스;Majlis)를 소개하였으나, 이것은 1923년 페르시아의 레자 칸(Reza Khan)시대 전까진 활용되지 못했다. 레자(Reza)는 수상이 되었고 20세기로의 거대한 과업을 이끌기 시작하였다. 이란(이 국명은 1934년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다시 한 번 중립을 지켰으나 영국과 구소련이 독일을 몰아내기 위해 이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41년 레자(Reza)는 남아프리카로 추방당했고 그의 아들 모하메드레자(mohammed Reza)가 뒤를 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구소련의 철수를 설득하여, 젊은 왕(Shah)은 절대적 권력을 다시 얻었고 이란은 서방에 돈독한 우방이 되었다. 그후 30년 동안 왕정의 억압정책과 현대화 정책에 맞선 저항 세력들이 생겨났다. 왕의 그릇된 석유 정책으로 경제가 매우 나빠지자 힘을 키우던 저항 세력은 태업과 대규모의 시위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드러냈다.

왕의 책임은 빠져 나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고 미국이 저항세력을 지지하자, 그는 결국 1979년 1월 16일 물러나고 말았다. 몇 주가 지난 후 왕의 반대 세력 지도자로 알려진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가 다시 돌아와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야톨라의 열렬한 민족주의와 이슬람근본주의의 표방은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회교공화국을 효과적으로 건설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이란에서 미국은 '악마'로 낙인찍혔고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로 매도되었다.

호메이니가 이만(Eman;지도자)으로 선포된 지 오래지 않아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기회를 잘 잡아 카자흐스탄(Khuzestan) 지방의 땅을 차지하였다. 이것은 불길한 징조였으며 두 나라를 끔직한 전쟁에 몰아넣어 1988년 불만족스런 종전협상이 있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서방강대국과 구소련은 '두 악을 약화시킨다'는 논리를 전개하며 이라크를 지원하는 동시에, 무기는 매우 비싸게 이란에게만 판매하였다. 불확실한 미래만을 남겨둔 채 1989년 6월 4일 호메이니는 세상을 떠났고 2달 후에 호잣올에슬람라프산자니(Hojjat-ol-Eslam Rafsanjani)가 명예직으로만 되왔던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대법관으로써의 호메이니 위치는 전직 대통령인 알리 호메이니(Ayatollah Ali Khomenei)가 차지했다. 이란은 미국에 의해 수출입금지조치를 통고 받았는데, 이는 이란이 전세계에 있는 테러집단을 도왔고 중동지방의 평화유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1997년 선거에서 온건파의 호잣올 에슬람 세이드 모하메드 카타미(Hojjat-ol-Eslam Seyed Mohammed Khatami)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국민들은 다른 나라와의 관계가 호전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이란과 독일을 비롯한 대부분 유럽국과의 관계는 1997년 최악의 상태가 되었는데, 수년 전 독일에 저항했던 이란의 쿠르드 족(Kurdish) 암살테러에 이란 정부가 연관되었다는 독일 법원의 판결 때문이었다. 카타미(Khatami)의 당선은 이슬람 혁명과 전혀 관련이 없는 많은 여성과 젊은 투표자들의 지지로 이룩된 것이며, 그들은 이슬람 공화국의 강요에 의한 보수적인 정책이 느슨해지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야당성 정치활동은 그렇게 활발하지 못한 상태이다.

source : PRD5ufiFt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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