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Bahrain - 지리, 기후, 역사
바레인 (Bahrain)
페르시아만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현대적인 국가라는 명성덕분에 바레인은 중동에서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걸프해로 들어가는 관문이 되었다. 이웃한 국가들이 기름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반면 바레인은 경제를 다양화했으며 중동에서 가장 좋은 교육과 의료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오랫동안 영국의 영향을 받은 이유로 영어가 폭넓게 사용된다. 개발이 신속하게 이루어졌지만 모든 것을 집어삼키지는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지의 하나이며 에덴동산의 현장으로 여겨지는 바레인은 고고학 발굴현장, 역사박물관, 대형 삼각 돛을 단 범선 조선소, 뒷골목의 옥외시장으로 가득한 곳이다.
통계 자료
면적: 620 sq km (240 sq mi)
인구: 60만명
수도: 마나마(Manama) (인구 17만5천명)
인종: 바레인인 63%, 아시아인 13%, 이란인 8%, 기타 아랍인 10%
언어: 아랍어, 영어, 파르시어, 우르두어
종교: 이슬람 시아파 70%, 수니 이슬람 15%, 기타종교 및 토착종교
정체: 전제군주제
지리 및 기후
아랍국가중에서 유일한 섬국가인 바레인은 전부해서 대략 싱가폴크기인 33개의 섬으로 된 군도이다. 본섬이 서쪽의 사우디 아라비아와 동쪽의 카타르중간의 페르시아만에 위치하고 있다. 이란이 페르시아만 건너편 북동쪽으로 약 200킬로미터(125마일)떨어진 곳에 있다. 바레인섬이 남북으로 50킬로미터(30마일), 동서로 16킬로미터(10마일)에 이르면서 군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이 본섬은가장 높은 지점이 해발 130미터(426피트)밖에 안되는 자발 아드-두칸(Jabal Ad-Dukhan)과 함께 대부분 평지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개발지역이 섬의 북부에 집중되어 있다.바레인은 오랫동안 중동의 사막한가운데에서 푸른녹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것이 변하고 있다. 섬의 일부분은 여전히 대추야자나무가 빽빽하게 뒤덮고 있지만 예전보다 훨씬 많이 무성하지가 않다. 일부 나무는 잘려지거나 나무의 주요한 물공급원이던 광천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죽어가고 있다. 알-아렌 야생동물 보호구역(Al-'Areen Wildlife Sanctuary)외의 지역에서는 길들여진 당나귀를 제외하고는 많은 동물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아랍인들이 오래전부터 의지해오던 낙타조차 바레인에서는 비교적 보기가 힘들다.바레인은 6월에서 9월까지 한낮에 평균기온이 섭씨 36도(화씨97도)까지 오르면서 아주 덥고 습하다. 9월부터 3월까지는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시원하여훨씬더 쾌적한 편이다.
역사
바레인의 역사는 인류문명의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본섬은 BC 약6000년경에 아라비아반도 본토에서 분리된 것으로 여겨지며 선사시대이후로 인간이 거주하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 바레인 군도는 BC 3000년에 딜문(Dilmun)무역제국의 현장으로서 세계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약 2000년동안 지속된 청동기 문화인 딜문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를 인더스 계곡(Indus Valley)으로 연결하는 무역루트를 따라 바레인군도의 전략적 위치에서 잇점을 얻게된다. 지역 한가운데가 한창 급속하게 건조해지는 가운데, 딜문의 광천수로 무성해진 초원은 세계 최초의 문명의 하나이자 오늘날의 이라크 남부지역에서 번성하던 수메리아(Sumeria)제국의 신화에 성스러운섬의 형상으로 남아있게 된다.
딜문은 길가메쉬 서사시(Epic of Gilgamesh)에 바레인군도를 영웅들이 영원한 삶을 누리는 천국으로서 묘사한 바빌로니아인들과도 비슷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바레인이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현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딜문은 사실상 쇠퇴하여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제국에 흡수되고 만다. 바레인군도에 틸로스(Tylos)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그리스가 BC 300년경에 도착하게 된다.
바레인은약 600년동안 헬레니즘 문화속에 남아있게 되며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가 전파된 후 7세기에 많은 섬주민들이 예언자 마호메드의 개인적인 초청을 받아들여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다.일련의 이슬람통치자의 통치후에 바레인은 16세기에 포르투갈에 의해 정복된다. 포르투갈인들은 군도를 진주를 캐는 항구와 군사주둔지로 사용하게 된다. 1602년 포르투갈인 감독관이 섬에서 가장 부유한 무역상의 형제를 처형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되고 그 무역상인 루큰 엘-딘(Rukn El-Din)이 반란을 일으켜 곧 유럽인들이 바레인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후 섬은 페르시아제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현재 바레인의 통치가문인 알-칼리파(Al-Khalifa)가문이 도착함으로써 동맹은 곧 끝나게 된다. 1830년대에 바레인은 영국과 맺은 수많은 조약중에 최초의 조약을 맺게 되며 이로써 영국이 걸프해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대신 오토만 터키제국으로부터 바레인 해상을 보호해주게 된다. 일련의 대격전으로 1869년 영국이 스스로 선택한 에미르(emir, 이슬람토후)를 직접 취임시키게 될때까지 이 협정으로 영국은 바레인의 내정에 관여할 수 있게 된다.
1902년에 중동지역에서 기름이 발견되었지만 세계 진주시장이 붕괴하는 1930년때까지 대규모시추와 처리공정은 시행되지 않는다. 기름을 판돈으로 바레인은 교육과 의료체계를 향상시킨다. 또한 영국과도 좀더 가까워짐으로서 중동의 영국 주요해군기지가 1935년 바레인으로 이전되며 1946년에는 중동의 영국 정부고관이 이전해 온다.영국의 영향을 받은 또다른 표시는 에미르의 조언자로서 1926년에 바레인에 도착하여 30년동안 머무른 찰스 벨그레이브(Charles Belgrave)의 장기재직이었다.
벨그레이브는 바레인의 교육시스템을 새롭게하고 바레인의 여러 사회기반시설의 개발을 감독하게 된다. 1942년 이사 빈 살만 알-칼리파 에미르(Emir Isa bin Salman Al-Khalifa)가 권좌를 불려받았을 때 벨그레이브는 바레인의 월등한 개발수준을 이용하여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이웃국가에서 발생한 오일붐의 잇점을 이용하게 되며 바레인을 걸프해에서 주요한 중계지역으로 만들게 된다. 1950년대 중동지역을 휩쓴 아랍 민족주의의 여파로 바레인에서 반영국적인 분위기가 증가하게 된다.
1956년 수에즈운하 위기동안 폭동이 일어나게 되면서 영국군이 진군해온다. 15년후에 영국은 걸프해에서떠날 의사를 공표하고 이로써 바레인은 1971년 8월 14일에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1970년대와 80년대에 오일가격이 하늘높을줄 모르고 치솟으면서 바레인은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다.
이란혁명은1979년과 1980년에 바레인에서 일부 폭력적인 친-이란 시위를 촉발시켰지만 회교 원리주의는 폭넓은 지원을 얻지 못하게 된다. 1980년대말에 걸프해에 위치한 산유국의 경제가 침체됨에도 불구하고 바레인은 경제 다양화에 대한 초창기의 노력덕분에 여전히 번영하며 안정된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바레인의 주요한 조선산업은 이란-이라크전에서 한측이나 양측의 포격을 받은 유조선을 수리하면서 1980년대말에 크게 번창하게 된다. 1986년 바레인과 사우디 아라비아사이의 킹 파드 제방길(King Fahd Causeway)이 열리면서 사업과 관광이 증가하게 된다. 1990년대 바레인은 외국의 위협과 국내의 분쟁으로 난국에 봉착하게 된다. 걸프전에서 사담 후세인이 바레인에 대한 스커드미사일 공격을 명령하고 아무손상도 입히지 않은채 바다로 떨어졌지만 양국간의 관계는 전례없이 얼어붙게 된다.
민주개혁 실시에 대한 에미르의 거절로 인해 1990년대 중반에 폭동이 만연하게 된다. 1998년초 걸프해에서 미군이 병력을 증가함으로써 바레인과 미군 당국과의 관계가 팽팽해지지만 바레인은 1990년대말 이라크에 대한 UN감시단과 밀접하게 협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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