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Qatar - 지리, 기후, 역사
카타르 (Qatar)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카타르는 세계의 레이다 망에서 사라지는 버릇이 있다. 19세기이전에 그려진 대부분의 아랍지도에는 카타르반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서방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타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카타르라고 소리 내어 읽을 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세계에서 여행자가 많이 몰리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카타르는 1989년에 관광비자를 발급하기 시작했으며 서서히 출발하여 새로 개방되는 국가로서의 이익을 거두기 시작하고 있다. 아랍에미레이트의 여행안내소와는 큰 차이가 있지만 카타르는 꼭 가볼 만한 곳이다.
통계 자료
국명: 카다르국
면적: 11,400 sq km (4460 sq mi)
인구: 55만명
수도: 도하(Doha) (인구 30만명)
인종: 아랍인 40%, 파키스탄인 18%, 인도인 18%, 이란인 10%
언어: 아랍어, 영어, 우르두어
종교: 이슬람
정체: 군주제
에미르(Emir, 이슬람토후): 샤이크 하마드 빈 칼리파 알-타니(Shaikh Hamad bin Khalifa al-Thani)
지리 및 기후
엄지손가락과 약간 비슷한 모양을 한 카타르반도는 아라비아 반도의 동쪽해안에서 페르시아만을 향해 북쪽으로 불룩 돌출되어 있으며 길이가 약 160킬로미터(90마일), 넓이가 55킬로미터(35마일)에서 80킬로미터(50마일)에 이른다. 작은 섬들을 포함하여 카타르는 미국의 코네티컷주보다 약간 작은 크기이며 대부분이 평지로 가장 높은 곳이 해발 40미터(130피트)에 이른다. 국토의 대부분이 실제로 어떤 자연식물도 없는 자갈로 된 건조한 사막으로 덮여있다.
카타르의 동물로는 후바라같은 조류와 박쥐나 사막고양이같이 발견하기 아주 힘든 동물들로 한정되어 있다. 물론 낙타를 볼 수도 있지만 카타르에는 식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중동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낙타무리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여름은 5월부터 9월까지 계속되며 이때의 기온은 평균 섭씨35도(화씨95도)이지만 최고 섭씨50도(화씨122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90%의 습도가 더욱 후덥지근하게 만든다. 겨울(12월-2월)은 쾌적하고 시원한 저녁과 함께 좀더 견딜만하다. 일년내내, 특히 봄에 카타르에는 모래폭풍이 자주 일어나며 12월과 1월에 강타하는 폭우로 많은 도로가 폐쇄되기도 한다.
역사
고고학발굴로 지금보다 기후가 훨씬 온화했던 석기시대에 카타르반도에 인간이 거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고대시대와 현대사이에 거주의 흔적을 거의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며 카타르는 걸프해에서 어떤종류로든 유일하게 포르투갈의 유적이 없는 중요한 곳이다. 걸프해의 거의 모든곳을 포르투갈이 정복하거나 적어도 공격을 했기 때문에 이사실은 16세기 카타르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거나 아주 극히 드물게 살았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한다.
역사에 기록된것에 따르면 카타르는 진주채취의 중심지로서 잘 정비되어 있던 18세기중반에 카타르에 온 알-타니(Al-Thani)가문이 점령하게 되며 약 100년후에는 카타르반도의 통치자가 된다. 그리고나서 대부분의 활동은 알-칼리파(Al-Khalifa)가문(지금의 바레인 통치자)의 통치하에 있던북서부의 주바라(Zubara)에 집중된다.
그 이후로 심지어 현재까지 알-칼리파와 알-타니 가문간의 긴장은 카타르역사에서 계속되는 특징으로 남아있다. 오늘날 두 가문간의 주요한 영토분쟁은 카타르의 서부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하와르섬(Hawar Islands)에 관련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도하(Doha)(현재의 수도)는 특히 중요한 무역항이 결코 아니었으며 19세기와 20세기초에 카타르는 오일발견이전의 걸프해의 수준으로 형편없이 가난한 국가였다.
주바라같은 곳은 지역인구를 먹여살리기에 충분한 돈을 제공하는 한가지인 진주양식장에 대해서 접근을 통제했기 때문에 두 가문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하게 된다. 카타르의 첫 번째 알-타니 에미르(Al-Thani emir, 이슬람 토후)가 19세기중반 도하에 수도를 세우게 된다. 카타르에서 다른 부족과 비교하여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 그는 1867년 영국과 조약을 체결한다. 알-타니와 후계자인 그의 아들은 터키에 대하여 영국을 속이고 자립을 유지하면서 지도자가 된다.
1872년 알-타니 에미르는 도하에 터키군이 주둔하도록 허용하면서 터키와의 조약을 맺게 되는 것이다. 여러해가 지나면서 소규모의 터키주둔군은 마음의 안심이 되기보다는 불안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터키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편에 서면서 1915년에 주둔군은 카타르에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쟁에서 영국과 터키는 서로 반대편에 있게되고, 특히 카타르는 이미 대부분의 아라비아반도의 동부를 정복하고 있던 사우디 아라비아의 설립자와 차기 왕에 대해 노심초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동맹이 현명한 조치인 것처럼 태도를 바꾸면서 걸프해의 나머지 국가를 통치하게 된다.
터키군을 몰아내고 카타르 에미르는 1916년 영국과 독점협정을 맺으며 그 협정에 따라 카타르의 통치자가 영국의 허락없이 다른 외국세력과 협약을 맺지 않는다는 약속의 대가로 영국은 카타르에 대한 보호를 보장하게 된다. 1930년대에 진주시장이 붕괴되기전에도 카타르에서의 생활은 고된 것이었다. 모든 곳에 만연되어 있던 가난, 굶주림, 질병때문에 에미르는 1930년대초에 처음으로 도착한 오일탐사대를 환영하게 된다. 채굴권이 1935년에 승인되고 탐사대는 1939년에 기름을 찾아내게 된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때문에 기름생산은 10년동안 시작되지 못한다. 이후로 모든 것이 아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카타르에서 생산되는 기름의 양은 많지 않지만 카타르의 적은 인구에게 골고루 돌아갈만큼 충분한 현금을 소유하게 된다. 초창기의 대부분의 수입은 현대화하기 위해 사용되며 1952년 최초의 학교가 개교하고 의료설비가 새롭게 교체된다. 기금유입으로 인한 에미르의 생활양식에 대해 세상이 놀라게 되며 1950년대 중반부터 계승된 에미르들은 정부에 점점 관심을 갖지 않게 되고 매사냥, 제트기조립, 스포츠카같은것에만 관심을 더 많이 두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부의 양이 적어도 공평하게 분배된 덕분에 대부분의 카타르인은 정치적인 관심이 줄어들게 되었으며 민주주의나 군주제의 종료에 대해 요구하는 사람도 거의 없게된다.영국이 1971년말까지 카타르에서 떠날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카타르는 바레인, 트루셜 스테이츠(지금의 아랍에미레이트)와 함께 동맹국을 형성할 의도를 가지고 회담을 시작한다. 바레인이 회담에서 손을 떼었을때 카타르는 1971년 9월 1일 독립을 선언하면서 거의 즉각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6개월후에 에미르의 사촌이자 수년동안 직함없이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고 있던 칼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Khalifa bin Hamad al-Thani)가 왕궁쿠데타로 권력을 잡게 된다. 쿠데타이후 수년동안 정치적으로 안정되며걸프해의 모든 나라의 경우처럼 1974년에 급격하게 오른 오일가격으로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전폭적인 복지국의 하나를 건설하기에 충분한 돈을 갖게 된다.독립이후 카타르는 영국과의 밀접한 방위조약을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 프랑스와의 방위협조도 늘리고 있다.
수년동안 카타르의 외교정책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주도를 따른 것이었지만 1990년대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도하는 이란과의 보다 밀접한 유대를 추구하면서 걸프해를 소란스럽게만들었다. 1993년 카타르는 이스라엘과 외교적인 접촉을 시작하고 1995년에는 텔아비브에 천연가스를 공급하기로 협의하면서 유태인국가인 이스라엘과 경제관계를 세운 걸프해에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1995년 6월 샤이크칼리파(Shaikh Khalifa)는 뜻밖에도 그당시까지 왕자이자 국방장관이던 그의 아들 하마드(Hamad)에게 에미르를 계승하게 된다.
새로운 에미르는 재빠르게 언론검열의 종료를 발표하고 걸프해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카타르를 계속해서 확립하게 된다. 샤이크 하마드(Shaikh Hamad)는 1996년 이집트에서 개최된 반테러리즘 정상회의에 직접 참여한 걸프해에서 유일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source : w4sXLNv4p0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