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Egypt - 지리, 역사
이집트 (Egypt)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여행가였던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를 '나일강의 선물'이라 묘사한 바 있으며, 예수의 탄생 훨씬 이전부터 여행가들은 피라미드, 스핑크스, 고대 룩소르, 나일 강 등 이집트의 이미지에 매력을 느꼈다. 파라오, 그리스, 로마, 아랍, 터키, 영국이 모두 이집트를 지배했었고, 그들의 모든 유산과 이슬람 그리고 20세기 문명이 혼합되어 오늘날의 이집트가 되었다.
파라오 시대의 폐허 옆에 서 있는 진흙 벽돌 마을은 강철과 석재, 유리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베두인족은 염소가죽으로 만든 텐트에서 살고, 농부들은 아직도 조상들이 쓰던 단순한 도구로 토지를 경작한다.
도시에서도 길고 늘어지는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리복 운동화를 신은 사람들도 있다. 또 자동차와 당나귀가 끄는 짐마차와 함께 어슬렁거리는 염소도 도로를 활보한다. 이러한 대조가 카이로보다 더 다채롭게 드러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카이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며 자동차 경적 소리,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카세트라디오 소리, 신자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리는 무에진(muezzin)소리로 항상 귀가 멍멍하다. 그러나 이집트가 혼란스럽고 떠들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집트는 다이버들이 꿈꾸는 나라이기도 하고, 사막을 가로질러 조용히 낙타를 몰고 가는 대상과, 나일강을 따라 여유롭게 내려가는 긴 너벅선이 지나 다니는 곳이기도 하다
통계 자료
국명: 이집트 아랍 공화국(Arab Republic of Egypt)
면적: 1,001,449 sq km
인구: 62,359,623 명
수도: 카이로(Cairo)
인종: 베르베르 족(Berbers), 베두인 족(Bedouins), 누비아 족(Nubians)
언어: 아랍어
종교: 이슬람교 90% , 기독교 7%
정치 체제: 민주주의
지리 및 기후
아프리카 북동부 구석의 거대한 사각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이집트는 백만 평방미터 이상의 면적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국토의 99%이상이 불모의 사막지대이므로, 인구의 99%가 전 국토의 3%에 해당되는 지역, 즉 비옥한 나일강 계곡과 나일강 삼각주에 밀집해 있다. 이집트 국경은 서쪽으로 리비아, 남쪽으로 수단, 북쪽으로 지중해, 동쪽으로 홍해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수에즈운하의 동쪽 지역은 시나이(Sinai) 반도로, 캐서린 산 (2642m의 Gebel Kathrina는 이집트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과 시나이 산을 비롯한 산맥으로 비탈진 지역이다.
이집트 지중해 해안을 따라가면 수많은 백사장이 있고 그 중 몇몇은 리조트로 개발되었지만 대부분이 아직도 원시의 모습 그대로 고립된 채이다. 카이로 북쪽에서 나일강은 수많은 지류로 갈라져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숭배하던 동물 대부분은 오늘날 이집트에서는 멸종되었다. 표범, 치타, 오릭스 영양, 하이에나가 사라졌고 가젤영양도 두 세 종류만 남아 있다. 설치류와 박쥐도 많지만 길들여진 낙타와 당나귀가 이집트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동물이다.
430여종의 조류가 있는데 그 중에는 이집트에서 생육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유럽에서 남아프리카로 해마다 오가는 철새들이 많다. 200만에 달하는 새들이 해마다 겨울을 지내기 위해 이집트로 날아오는 것으로 보인다. 34종의 뱀이 있고,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뱀이 코브라이며, 전갈도 이집트 전역에 많지만 야행성이라 눈에 잘 띄지는 않는다. 홍해에는 상어, 가오리, 거북, 돌고래, 다양한 색깔의 산호, 해면, 불가사리 및 여러 종의 연체동물들이 살고 있다.
이집트 날씨는 연중 대부분 덥고 건조하다. 12월, 1월, 2월의 겨울동안 일일 평균 기온은 지중해 연안에서는 섭씨 20도 정도(화씨 68도 전후), 아스완(Aswan)에서는 기분 좋은 섭씨 26도(화씨 80도) 정도이다. 최고 온도는, 지중해 연안이 섭씨 31도(화씨 88도), 아스완은 섭씨 50도(화씨 122도)까지 오른다. 겨울밤이면 섭씨 8도까지 내려가는데 이집트 기준에서는 아주 추운 날씨라 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지역으로 1년에 19cm정도 내리고, 아스완은 연 강수량이 2mm로 거의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이다. 3월에서 4월에는 서부 사막으로부터 캠신(khamsin) 열풍이 시간당 150km까지 올라가는 속도로 분다.
역사
이집트 역사는 나일강과 뒤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나일강은 그 지역에 처음 사람이 정착했을 때부터 경제, 사회, 정치, 종교 생활의 중심이 되어 왔다. 나일강 주변에 초기 공동체가 생겨나면서 맹렬하게 독립을 추구한 공동체도 많았고 작은 왕국들도 생겨났다. 결국 이 모두는 두 개의 나라로 정리되었는데, 한 나라는 나일강 삼각주까지 이르는 계곡을 차지했고 또 다른 나라는 나일강 삼각주 자체에 자리를 잡았다.
5000여년 전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는 메네스(Menes)왕의 치세에 통일되어 최초로 안정적인 왕조가 확립되었다. 그 후 2700년간 50명 이상의 파라오와 30여개의 왕조가 명멸했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침공한 후부터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외국의 지배가 이어졌다. 강력했던 파라오 시대를 입증하는 유물들, 즉 피라미드, 사원, 공공건물 및 예술작품 등에도 불구하고 파라오 시대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진 것이 없다.
파라오는 신적인 존재로 여겨졌으며 그가 다스렸던 사회는 계급 구분이 아주 엄격했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7세기에 만들어졌으며 그후 500년간 파라오의 권력이 점점 강해짐에 따라 사원과 피라미드도 점점 더 웅장해지고 규모가 커졌다. 군주의 권력은 제4왕조 시기에 극치를 이루었고 케오프스(Cheops) 왕, 케프렌(Chepren) 왕, 미세리누스(Mycerinus) 왕은 기자(Giza)에 세 개의 大 피라미드를 세웠다.
제 6왕조와 제 7왕조 시기(기원전 2490년에서 2330년 경)에 권력이 분산되어 작은 공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헤라클레오폴리스(Heracleopolis, 현재의 Beni Suef 근처)에 제2의 수도가 세워졌고 봉건제가 확립되었으며 이집트는 내란에 빠져들었다. 테베(Thebes, 오늘날의 Luxor)에 독립된 왕국이 세워졌고 메투호텝(Metuhotep) 2세의 치하에서 이집트는 다시 파라오 한 사람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다음 250년 동안 이집트는 번영을 누렸지만 귀족과 장관들은 다시 분열을 일으켰다.
제국은 약해졌고 이집트는 외부 세력의 정복대상이 되었다. 힉소스(Hyksos)족이 북동쪽으로부터 침략해 왔고 1세기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다음 400년 동안(기원전 1550년에서 1150년) 투트모시스(Tuthmosis) 1세를 비롯한 여러 통치자 아래에서 신왕국이 번영했다. 투트모시스 1세는 왕가의 계곡에 묻힌 최초의 파라오였으며, 그의 딸 핫셉수트(Hatshepsut)는 이집트의 몇 안되는 여왕 중 한 사람이다.
투트모시스 3세는 이집트의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제국을 서아시아까지 확장했다. 아메노피스 4세는 사제들의 가르침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하는 아텐(Aten)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로 아크헤나텐(Akhenaten)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아크헤나텐과 그 아내 네페르티티(Nefertiti)는 아크헤타텐(Akhetaten)이라는 이름의 새 수도를 건설하여 이 도시를 새로운 유일신에게 바쳤다(아마도 조직적인 일신교의 형태가 최초로 나타난 경우였을 것이다).
아크헤나텐의 사위인 투탄카문(Tutankhamun)은 9년간 이집트를 다스리다가 어린 10대의 나이로 죽었다. 그 후 이집트는 장군들, 즉 람세스(Ramses) 1,2,3세와 세티(Seti) 1세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들은 웅장한 기념비와 사원을 세웠지만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332년 그리스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침입했을 때는 혼란 속에 있었다. 알렉산더는 새 수도를 건설하고 그 이름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정했다. 프톨레미(Ptolemy) 1세의 치하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대도시가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300년간 이집트를 지배했지만 그들의 통치 시기는 귀족들간의 적대감이 치열한 골치 아픈 시기였으며 많은 이들이 추방되거나 암살당했다.
그 동안 확장일로에 있었던 로마 제국은 드디어 이집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로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드라마의 한 무대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51년에서 48년까지 이집트는 프톨레미 8세와 그의 누나 클레오파트라(Cleopatra) 8세에 의해 함께 다스려지고 있었고,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는 라이벌인 폼페이(Pompei)를 로마에서 이집트로 보내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프톨레미 8세는 폼페이를 살해하고 클레오파트라를 추방했다.
줄리어스 시저는 이집트로 와서 프톨레미를 나일강에 던져버리고 클레오파트라의 또 다른 남동생인 프톨레미 9세를 지명하여 클레오파트라의 공동 통치자로 만들었으며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이 되었다. 기원전 47년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의 아들을 낳았으며 2년 후 남동생 프톨레미 9세를 죽였다. 시저도 다음 해 암살되었다. 마크 안토니(Marc Antony)가 로마에서 이집트로 왔으며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10년을 함께 지냈고 화가 난 로마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와 담판을 짓기 위해 옥타비안(Octavian)을 보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로마 측에 붙들리기 전 자살했고 이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3,4세기에 들어서 로마 제국이 분열됨에 따라 외부 세력이 다시 이집트를 침략했다. 남부에서는 누비아인들이, 서부에서는 북아프리카인들이 들어왔다. 나중에는 페르시아인들도 침입했다. 이러한 전쟁과 심각한 기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령 이집트는, 기원후 640년 아랍인들이 들어올 때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아랍인들은 이집트에 이슬람교를 도입하고 불안정한 정부가 위치할 곳으로 푸스타트(Fustat, 오늘날 카이로의 위치)를 건설했다.
결국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 것은 파티마 왕조(Fatimids)였고, 가와르(Gawar)라고 불리는 그리스인 알 무이즈(Al-Muizz) 통치하에 알 카히라(Al-Qahira, 카이로) 시가 세워졌다. 파티마 왕조 치하에서 이집트는 융성했고 카이로는 번영하는 대도시가 되어 10층이 넘는 건물들이 늘어서게 되었다. 서유럽 기독교인들은 11세기의 십자군 전쟁으로 팔레스타인과, 약해져가던 파티마 왕조의 나머지 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시리아를 근거지로 하는 셀주크 왕조(Seljuks)는 이집트에 군대를 파견했고 살라 앗 딘(Salah ad-Din, Saladin)은 이집트에 아유비드(Ayyubid) 왕조를 세워 카이로를 요새화하였으며 1187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을 몰아내었다.
살라 앗 딘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맘루크족(Mamluks, 터키 용병)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맘루크족은 아유비드 왕조를 전복시켜 이집트가 터키로 넘어간 1517년까지 2세기 반 동안 이집트를 지배했다. 맘루크 족 대부분이 터키계였으므로 콘스탄티노플의 터키 제국 술탄은, 맘루크족에게 대부분 이집트 통치를 맡기고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이러한 상황은 1798년 나폴레옹 침략 때까지 계속되었다.
1801년 영국이 나폴레옹에게서 이집트를 빼앗았고 결국 영국인들도 모하메드 알리(Mohammed Ali)에 의해 축출되었는데 그는 터키군의 알바니아 분견대 부관이었다. 알리가 1848년 죽자 그의 손자 압바스(Abbas)가 뒤를 이었다. 압바스는 아들 사이드 파샤(Said Pasha)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는 수에즈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수에즈운하는 1869년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에 의해 개통되었다. 이집트가 국가 채무에 시달리게 되자 1879년 영국과 프랑스에서 감사관들이 오게 되었고, 영국은 이집트에 대한 터키의 종주권을 종결시켰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이집트는 연합국 측에 섰고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은 국가 정치 정당(Wafd)의 설립을 허용했다.
파드(Fuad) 1세가 입헌군주국의 수장으로 뽑혔고 그후 30년 동안 영국, 군주파, Wafd당이 권력을 획책했다. 2차대전 후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 국가 7개국이 아랍 연맹(Arab League)을 창설했지만, 전쟁은 이집트를 유혈 속으로 몰아넣었고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에서 패배함으로 혼란은 가중되었다.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대령이 이끄는 반체제 장교집단이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통치권을 포기하지 못해 결국 이집트를 침공했다.
미국과 소련이 같은 편에 섰고 유엔이 평화군을 배치해 침입자들이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세르는 영웅이 되었고 특히 아랍국에서 그의 인기는 엄청났다. 나세르는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 이집트, 시리아, 예멘, 나중에는 이라크까지 모두 통합하려 시도했고 아랍의 협동을 강조하며 이스라엘을 악마 취급했다. 몇 달간 이집트와 이스라엘간의 긴장이 격화된 후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이 선제 공격을 해 6일전쟁(Six Day War)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공군을 궤멸시키고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후 수에즈운하를 폐쇄했다(이스라엘은 시리아로부터는 골란 하이츠(Golan Heights)를, 요르단으로부터는 웨스트 뱅크(West Bank)를 빼앗았다). 1970년 나세르가 사망하자 부통령이었던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가 권력을 물려받았고 서방과의 관계를 호전시키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 3일 사다트는 시나이의 이스라엘 점령군을 갑자기 공격했는데 이 전쟁에서도 이집트가 패하기는 했지만 휴전 협약으로 수에즈운하의 동쪽 제방 부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77년 사다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지향하기 시작했고 1979년에는 캠프 데이빗(Camp David) 협약을 이끌어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은 시나이에서 물러나는데 동의했고 이집트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권리를 인정했으나,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랍세계의 많은 이들이 사다트의 배반에 불만을 품었고, 결국 사다트는 1981년 10월 6일 암살되고 말았다. 사다트의 죽음 이후 사다트의 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이집트의 지도자 역할을 해 왔다. 무바라크는 불안한 지역에서의 재치있는 정치 기술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고 이스라엘 뿐 아니라 다른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도 향상시켰다. 아랍 세계에서 원리주의가 두각을 나타냄에 따라 무바라크의 위치는 때로 대단히 위험해졌고 그는 여러 가지로 고생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걸프전이 일어나자 무바라크는 이라크에 대항해 3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걸프전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아랍이 싸운 것으로 보이지만, 이집트의 참전은 이집트와 서구 국가 관계를 향상시키는데 유용하게 작용했다. 1992년과 93년, 회교 원리주의자들은 관광객들과 이집트 비밀 경찰을 대상으로 폭력 및 협박의 움직임을 시작했다. 이 집단은 정부를 전복시키고, 1996년 유엔 복부를 폭파하려는 계획으로 미국 감옥에 수감 중인 세이크 오마르 압델 라흐만(Sheikh Omar Abdel Rahman)을 석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의 '주의사항' 항목을 참고할 것.
source : Gog8rAqcl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