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Hungary - 지리, 기후, 역사
헝가리 (Hungary)
헝가리는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관광산업에도 경험이 풍부해서 동유럽으로 들어가는 이상적인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의 관광객들은 아름다운 부다페스트로 도착하게 되는데, 이 도시에는 생기 넘치는 예술, 카페, 음악이 흐르며, 다양한 문화 및 스포츠 축제가 개최된다.수도를 벗어나 평원, 리조트가 늘어선 호수가, 바로크 식의 마을, 전원 마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헝가리의 또 다른 볼거리로는 와인 시음을 포함해, 편안한 온천에서의 '물맛보기' 또는 유럽에서 최고로 꼽히는 장소에서 새들을 관찰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통계 자료
국가명: 헝가리 공화국
면적: 93,000 sq km
인구: 천 40만
수도: 부다페스트 (인구 2백만)
인종: 90% 헝가리아인, 5% 집시, 2% 독일인 & 1% 슬로바키아인
언어: 헝가리어
종교: 68% 로마 카톨릭, 21% 개신교 (칼빈파), 6% 복음교 (루터파), 5% 기타
정체: 의회 민주주의
지리 및 기후
헝가리는 강낭콩 모양으로 유럽의 중앙에 자리잡은 나라로 일곱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우크레인,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기본적으로 세 개의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부, 중부, 남동부의 낮게 자리잡은 대평원 지역과 북서부 지역의 작은 평원; 헝가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1015미터의 케케스테토(kekezsteto))를 보함한 북부의 산악지역; 서부 및 남서부 지역의 트란스다뉴비아(Transdanubia)구릉지역. 가장 큰 강인 다뉴브와 티짜(Danube and the Tisza)는 국토를 삼등분하며, 드라바(Drava)는 크로아티아(Croatia)와 접해 남서부 국경을 형성한다. 이 나라에는 약 1000개가 넘는 호수가 있다.
가장 큰 발라톤(Balaton)에는 곳곳에 온천수가 흐른다. 헝가리의 거의 70%는 개간되었고, 14%만이 숲으로 남아 있다. 숲의 대부분은 너도 밤나무, 참나무로 이루어져 있고, 일부는 전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숲에는 주로 사슴, 산토끼, 수퇘지, 수달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들 고양이, 호수박쥐, 파노니안 도마뱀등의 희귀 종도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에 서식하는 척추동물의 다수는 새들이 차지하고 있다. 특히 수많은 강, 호수 습지에 사는 물새들이 많다.
다섯 개의 국립공원과 1000여 개의 자연 보호 구역이 있다.헝가리의 기후는 온난하며, 3개의 기후대로 나뉜다.: 남부는 지중해성 기후, 동부는 대륙성 기후, 서부는 아틀란틱 기후, 남부의 트란스다뉴비아 지역은 여름은 길고 겨울은 온난하며 습기가 많다. 대평원은 극도의 계절적 다양함을 보여주는데, 겨울은 춥고 바람이 많으며, 여름엔 일반적으로 덥고 건조하다. 부다페스트와 서부 트란스 다뉴비아 지역은 여름엔 매우 덥고, 겨울은 비교적 짧고 구름 끼는 날이 잦으며, 때때로 화창하게 개인 날도 감상할 수 있다. 헝가리의 평균기온은 11도이다. 1월이 가장 춥고(-2도), 7월이 가장 덥다. (28도).
역사
헝가리가 자리잡고 있는 카파시안 저지는 수 천년 동안 사람이 거주해온 지역이다. 그 한 종족으로 유목생활을 하는 마자르족(Magyars)으로 8세기 중엽에 이 지역에 들어왔다. 기마술로 유명한 마자르족은 955년에 독일인에 의해 저지 당하기 전까지 멀리, 그리고 넓은 지역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이 패배로 마자르족은 혼돈에 빠졌고, 후에 그들이 로마제국과 연합하는 계기가 된다. 서기 1000년에, 마자르의 왕자인 스테판(Stephen)이 로마 교황이 보낸 왕관으로 '크리스찬 왕' 스테판 1세로 등극하는데, 이로써 헝가리, 왕국이자 국가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된다.
스테판왕은 무자비하게 땅을 빼앗고, 나라의 체계를 세우고, 시골까지 개종시킴으로 해서 왕권정리에 착수했다. 1038년 그가 죽기까지 헝가리는 신생 그리스도교 문화국가였으며, 점점 서구화되어가고 있었고, 다양한 민족을 가진 국가였다. 그 후 2세기 반-아르파드 가문(House of Arpad)의 통치기간-동안은 새로운 왕국의 한계를 시험하는 기간이 된다. 이 기간은 왕권을 노리는 숙적들 간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으로 점철되었고, 국토는 막강한 이웃국가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헝가리의 이러한 무정부주의로의 쇠락은 1301년 아르파드의 마지막 왕인 앤드류3세(Andrew III)가 죽은 후에야 가닥이 잡히게 된다. 앤드류 3세가 죽은 후 , 헝가리는 다시 꽃피게 된다. 찰스 로버트(Charles Robert)로 시작된 유능한 통치자의 왕위계승과, 황금 시대의 절정기의 메시아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의 훌륭한 통치로 인해 헝가리는 유럽을 이끄는 세력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490년 메시아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후계자인 블라디슬라브(Vladislav)는 왕권을 유지하기엔 부족하여 재정은 바닥나고 시대에 역행하는 법률은 소작농을 농노의 처지로 전락시켰다. 1526년 헝가리군은 모하치전(Battle of Mohacs)에서 오스만 투르크(Ottoman Turks)에게 패하고 만다. 이 패배로 그래도 비교적 풍요롭고 독립적이던 헝가리에 종지부를 찍게 되고, 나는 분단, 외세의 지배, 절망에 빠지게 된다. 투르크의 지배는 국가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다가, 그들의 지배에 대항한 헝가리인들의 저항으로 1699년 물러나게 된다.
외세 배격도 자유롭고 독립적인 헝가리를 만들진 못했다. 대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왕조의 한 지역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개화된 절대왕정이 시작되었다. 헝가리는 합스부르그의 지배 아래 경제, 문화적으로 꽃을 피우게 되었지만, 그와 함께 국수주의 또한 자라나게 되었다. 1849년 반란지도자 라요스 코수스(Lajos Kossuth)의 기치아래, 헝가리는 완전한 자유와 합스부르그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합스부르그는 이에 반란의 재빠른 집압과, 일련의 야만적인 보복의 선동으로 화답했다.
헝가리는 다시 한번 정복된 지역으로 왕조에 편입되었고, 국수주의로 복귀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인들 사이에 일어난 저항과 합스부르그를 위한 몇몇 전투에서의 패배로 이들 두 세력은 협상을 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가 1867년의 타협으로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이중 군주제를 탄생시켰다.
이 '이중체제의 시대'가 헝가리의 경제적, 문화적, 지적 재탄생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왕조내에서 이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는 우려의 징후가 보였다.이중 왕조는 독일 연합군으로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참혹한 결과를 맞았고, 전후 즉시 공화정으로 대치되었다. 헝가리 공산당이 권력을 잡았지만 5개월 후 루마니아 군에 이듬해 정권을 넘기게 된다. 1920년, 연합국은 트리아뇽 조약(Treaty of Trianon)에 의해 전후 복구 계획을 세웠는데 이로 인해 헝가리의 크기는 크게 줄어들었다.
헝가리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에게 자신의 국토를 되돌려 받고자 도움을 요청했으나, 제 2차 세계대전에서도 패하고 만다. 1947년 선거로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된다. 당내의 심각한 불화가 시작되었고, 숙청과 스탈린식의 재판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수 천명의 사상자를 낸 반 소련 반란인 1956년의 봉기로 더욱더 혼란에 빠졌다. 국가역사상 최악의 무력행사와 정권통합 후 야노스 카다르(Janos Kadar)는 '굴라쉬'공산주의 (소비자 지향적) 프로그림을 시작했다.
그의 개혁은 실효를 거두어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그 지역에서 가장 발전되고, 가장 자유로우며, 가장 부유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실업에 대한 불안, 치솟는 물가상승률, 쌓이는 빚 등으로 말미암아 1988년 마침내 카다르는 축출되고 만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없애는 것으로 공산주의 붕괴를 가속화 한 후, 1989년 헝가리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헝가리는 그 이후부터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있다.- 최초의 것은 약 40여 년 전에 있었다.
물가 상승률을 둔화시키고, 금리를 낮추는데 있어서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많은 경제 문제들로 인해 발전 속도는 늦춰졌다. 1998년 헝가리는 처형-형식의 살인과 폭파 사건으로 몸살을 앓았는데 여기에는 경찰이 조직범죄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희생자중 한 사람으로 경찰 첩보원이 대낮 관광 구역에서 있었던 자동차 폭파로 인해 사망했다. 이 사고로 행인 3명 또한 사망했다. 1999년에도 조직범죄와 연결된 비슷한 폭파 사건이 더 있었다.
source : nipHsxjBV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