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at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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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Croatia - 지리, 기후, 역사

2019-02-01 2008
About Croatia

크로아티아 (Croatia)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던 1991년 이전에는 새로운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 태양의 해변이라는 뜻의 지중해 연안의 휴양지)로 발전하고 있었다. 해마다 1000만 명의 서 유럽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태양, 경제적 여행, 중세의 고풍스러운 정취, 아마도 나체주의의 장소 등을 찾아서 아드리아해로 왔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와의 격렬한 분리독립과정에서 크로아티아는 ‘2 주간의 은신처’에서 ‘전쟁으로 찢겨진 악명 높은 곳’으로 대중적인 별명이 바뀌었다.

최근에 격은 비극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의 매력은 거의 그대로이다.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던 대부분의 장소는 손상되지 않았고 전쟁 후 보수 되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아픈 과거는 도처에 남아 있으며 누구나 한 가지 씩 사연을 가지게 되었다. 중세 크로아티아의 향기는 로비니(Rovinj)의 자갈길과 최근 재건된 두브로브니크(Dubrovnik)의 스타리 그라드 (Stari Grad)에 남아있다. 또한 크로아티아에는 스플리트(Split)의 웅장한 디오클레티안(Diocletian)궁전 등 로마시대 최고의 유적들이 일부 남아있다. 날씨와 해변은 예전이나 다름없이 훌륭하여 크로아티아는 여전히 머무르기에 좋은 곳이다.

통계 자료

국명 : 크로아티아공화국
면적 : 58,540평방km
인구 : 470만명
수도 : 자그레브 (Zagreb 인구 100만명)
인종 : 크로아티아인(78%), 세르비아인(5%미만), 슬라브-이슬람인, 헝가리인, 슬로베니아인 
언어 :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이탈리아어, 슬로베니아어
종교 : 로만카톨릭, 동방정교회
정체 : 의회민주제

지리 및 기후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 해의 북동 해안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슬로베니아 와 헝가리, 동으로는 유고슬라비아, 남쪽과 동쪽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공화국의 크기는 벨기에의 두 배이며, 슬라보니아 (Slavonia)의 판노니안(Pannonian)평원으로부터 구릉이 많은 중부 크로아티아를 지나 이스트리안 (Istrian)반도와 울퉁불퉁한 아드리아해까지 부메랑모양으로 빙 돌아 나오는 모양을 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마을이 있는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남쪽 끝은 손가락마디 하나정도의 차이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분리되어있다. 크로아티아 해변은 언제나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역이다. 해안선의 길이는 1778km이며 섬까지 포함하면 5790km에 이른다. 대부분의 해변은 모래보다는 넓직한 돌이 많다. 앞바다의 섬들은 그리스의 섬들처럼 아름답다. 1185개의 섬들 가운데 66개의 섬에 사람이 산다. 크로아티아에는 7개의 아주 훌륭한 국립공원이 있다.

풀라 근처의 브리유니 (Brijuni)는 잘 보존된 지중해 털가시나무 오크 숲이 있는 가장 잘 가꾸어진 공원이다. 산악지대의 리스니야크(Risnjak) 국립공원은 스라소니의 보금자리인 반면, 파클레니차(Paklenica) 국립공원의 우거진 숲에는 곤충, 파충류, 멸종위기에 처한 그리폰 독수리를 포함한 조류 등이 서식한다. 플리트비치(Plitvice) 국립공원에서는 곰, 늑대, 사슴 등을 볼 수 있다. 기후는 지중해에서 아드리아해를 따라 내륙으로 가면서 다양하게 변한다. 태양이 내리쬐는 해안지역은 덥고 건조한 여름날씨와 온화하고 비가 내리는 겨울 날씨를 지녔다. 해안의 높은 산들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서 봄은 빨리 오고 여름은 늦게 오도록 해준다. 자그레브의 평균 최고기온은 7월에는 27도이지만 1월에는 2도까지 내려간다.

역사

기원전 229년 크로아티아의 토착민이던 일리리안족은 로마제국에게 영토를 잃었고, 서기 285년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스플리트에 궁전을 겸한 요새를 지었는데 오늘날 이것은 동부 유럽 최고의 로마유적지가 되었다. 서로마제국은 5세기에 몰락하고 625년경 슬라브족이 오늘날의 폴란드에서 이주해왔다. 크로아티아 종족은 과거 로마제국의 주였던 달마시안 크로아티아와 북동쪽의 판노니안 크로아티아를 점령하고 지금의 크로아티아로 이주했다.

이 두 주는 925년 합쳐져 단일한 왕국이 되었고 12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1242년 타타르족의 침략으로 크로아티아는 황폐화 되었다. 16세기에는 터키인들이 발칸반도를 점령하고자 위협하기 때문에, 북부 크로아티아는 방위목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에게 도움을 구했고 1918년까지 그 영향권에 있었다.

그 동안 달마티안해안은 15세기 초 베니스에 점령되었다가 17세기말 나폴레옹이 지배하던 프랑스에 점령되어 일리리안 주(이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와 함께)의 일부가 된다. 크로아티아의 문화와 정치의 부활은 농노가 해방되고, 북부 크로아티아가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했던 헝가리의 지배를 받게 되는 1835년 시작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계 1차 대전의 패전국이 되자 크로아티아는 세르브, 크로아트& 슬로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1929년 유고슬라비아가 된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베오그라드가 연합국의 수도가 된데 불끈하여 이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1934년 알렉산더왕을 암살한다. 1941년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괴뢰 파시스트정권(우스타샤)을 크로아티아에 세운다.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의 모든 세르비아인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인종청소의 일환으로 약 35만명의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를 학살했다. 모든 크로아티아인들이 이에 동조하지는 않고 다수는 우스타샤를 전복하기위해 공산빨치산이 되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체르고비나에서 죽었다.

전쟁이 끝나고 크로아티아는 공산주의자 티토 원수가 지배하는 유고연방내 하나의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크로아티아가 남쪽 공화국들을 경제적으로 크게 앞지르자 더 많은 자치를 요구하였고, 이는1970년대에 한 차례의 주민대표 숙청을 몰고 왔다. 티토가 1980년에 죽자 공화국이 해마다 교대로 대통령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제도가 시작되고 크로아티아의 경제는 마비상태가 된다. 1980년 후반 세르비아 코소보주의 알바니아 소수족에 대한 심한 압제는 세르비아가 연방내 나머지 공화국들을 지배하고자 한다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동부 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몰락하자 크로아티아인들은 자치를 요구하는 소요를 일으켰고 공산주의는 끝났다.

1990년 프란죠 투즈만(Franjo Tudjman)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선거에서 승리한다.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을 국가의 구성원이라기보다는 소수민족으로 규정하는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새 헌법에 의해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하게 된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국가공무원자리를 잃었다. 

1991년 6월 크로아티아는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세르비아인들의 크로아티아 내의 영토 크라지나(Krajina)는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격렬한 전투가 전국에서 일어나며 세르비아 공산군이 우위를 점하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개입한다.

상황이 복잡해졌을 때 크로아티아는 3개월간 독립을 유보하기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되고 크로아티아 영토의 4분의 1은 세르비아 민병대와 연방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1991년 연방군은 두브로브니크로으로 진격하고 자그레브의 대통령궁을 폭격한다. 이에 유럽연합 (EC)은 세르비아를 제재하기에 이른다. 11월 부코바르(Vukovar)는 3개월의 봉쇄 끝에 세르비아에게 점령된다. 6달 동안 약 1만명이 죽고 수십만이 피난을 가고 수 만 채의 가옥이 파괴된다.

몇 차례의 휴전이 실패한 뒤에, 1992년 유엔은 세르비아가 점령한 크로아티아지역에 보호군을 배치한다. 연방군은 크로아티아에서 철수하고, 1992년 크로아티아는 소수그룹과 인권을 보호하도록 헌법을 고친 다음 유엔에 가입한다. 크라지나에서 세르비아 준 군사그룹이 우세하게 유지되었으나, 1993년 1월 크로아티아는 이 지역에 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크라지나는 공화국임을 선포하고 크로아티아인의 수를 거의 98% 추방하는 것으로 응수한다.

1994년 크라지나는 휴전에 서명하지만 다시 1995년 5월 폭력이 재발한다. 크라지나는 베오그라드의 지지를 잃고, 크로아티아 병력이 이 지역을 휩쓸어 15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수 세기를 살아왔던 마을을 떠났다. 1995년 12월 데이튼 협정(Dayton agreement)은 마침내 크로아티아에 안정을 가져왔다. 하지만 많은 피난민들이 중간지대에 살며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면에 정부는 고용되지 않은 제대 군인들을 이용하여 크로아티아인의 가옥문제, 심하게 손상된 사회하부구조를 해결하려고 힘쓰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는 전쟁 중 입은 손상을 상당히 회복했고, 특히 두브로브니크는 성공적으로 보수되어 여행객들이 다시 찾고 있다.

source : aWSv_7s_k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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