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s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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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Bosnia - 지리, 기후, 역사

2019-02-01 1839
About Bosnia

보스니아 (Bosnia)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교차지점에 있는 나라이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끼어 디나리치 알프스(Dinaric Alps)에 걸쳐있으며, 동서가 만나 처음 악수를 나누고 의견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늘 분쟁지역이 되어왔다. 기독교, 회교, 정교회 권력의 지배를 교대로 받아가며 이 지역 사람들은 그들의 다문화 환경에 익숙해졌으며, 어느 정도 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1992년 조화롭던 사회구조는 베오그라드의 연방군과 세르비아 관료의 도움을 받은 보스니아 세르비아인 극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깨어진다.

3년의 내전은 한때는 모두가 서로 이웃이고 같은 남부 슬라브 계통인 이들 회교 슬라브인, 정교회 세르비아인, 카톨릭 크로아티아인이 서로 대항하게 하였다. 전쟁은 나라의 사회기반구조를 황폐화시켰고, 수 백만에 이르는 난민을 만들었다. 또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인종 청소’라는 말을 현대 용어에 소개했다는 불명예스런 평가를 받게 했다. 이제 전쟁은 공식적으로는 끝났고, 여행객들이 돌아오기 시작하지만, 전쟁의 상처가 아물고 다시 여행객의 유입을 자랑 삼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통계 자료

국명: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공화국
면적: 51,200평방km
인구: 430만명(전쟁 전)
수도: 사라예보 (Sarajevo)
인종: 보스니아인(44%), 세르비아인 (31%), 크로아티아인(17%), 기타(8%)
언어: 세르보- 크로아티아어(종종 보스니아어로 불린다.)
종교: 이슬람정교회(40%), 정교회(31%), 카톨릭(15%), 개신교(4%), 기타(10%)
정체: 신생 민주주의

지리 및 기후

최근 뉴스보도에서 빈번히 다루어지는 톱날같이 화살머리모양으로 생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유럽 남부의 중앙에 있으며 그 크기는 스로바키아나 미국 테네시주 보다 조금 크다. 아드리아해 바로 동쪽에 위치하며 북, 남, 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와 동쪽으로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와 접해있다.

남부 크로아티아를 바싹 마른 손가락정도의 굵기로 관통하여 가까스로 아드리아해와 접하며 총 20km의 해변을 가지게 되었다. 국경에 관한 데이톤 협약의 조인 후, 보스니아는 마치 환각적인 퍼즐조각같이 회교-크로아티아연합(영토의51%), 세르비아국가, 스르프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영토의 49%)으로 거의균등하게 분할되었다. 지중해, 발칸, 중부유럽의 3가지 뚜렷이 다른 생태계가 만나는 지점인 디나크 알프스는 중부와 남부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이다.

북쪽의 평원과 고원지대는 사바강에 접해 있다. 전국에서 제일 높은 곳은 헤르체고비나에 있는 마글리치 (Maglic)로서 아드리아 해변에서 2385m높이로 솟아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체가 강한 지진대에 속한다.이 지역의 전형적인 기후는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다. 사라예보의 1월 평균 기온은 섭씨1도이고 7월의 평균기온은 섭씨21도이다. 봄철은(4월, 5월) 고지대에서는 여전히 눈이 덮여있지만 풍부하고 다채로운 동식물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이다.

역사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일리안족(Illyrians)이었고, 뒤이어 사라예보(Sarajevo)근처 광천 부근에 로마인들이 이주해왔다. 로마제국이 분열된 기원 395년, 지금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의 국경선인 드리나(Drina)강은 서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을 분할하는 경계가 되었다. 슬라브족이 7세기경 이 지역으로 왔으며 960년 세르비아 독립국이 되었다. 1383년 최초의 터키 침공이 있었고 백년 내에 보스니아는 사라예보를 수도로 하는 터키의 한 주가 되었다.

터키가 지배하던 400여년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철저히 동화되었다. 로만 카톨릭을 믿던 크로아티아인과 정교회를 믿던 세르비아인중 상당수가 그들의 종교를 포기하고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보스니아는 이슬람과 기독교 국가들간의 경계가 되었다. 오토만의 지배가 느슨해진 16세기와 17세기, 터키인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제국의 전진 보루로 쓰기 위해 지배를 강화하였다.

19세기 중반 남부 세르비아인들의 국가부흥운동은 터키인에 대한 항쟁으로 이어지고, 불가리아전쟁에서 러시아에게 대패한 터키는 결국 영토를 포기하고 물러난다. 러시아의 지지를 받던 오스트리아-헝가리 합스부르그왕조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무력으로 장악한다.

계속되는 외세의 지배에 대한 분개는,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완전히 합병했을 때 더욱 심해졌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한 보스니아 세르비아인이 합스부르그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도 (Franz Ferdinand) 대공을 암살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지하자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러 뛰어든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세르비아 왕당파에 합병되고, 1941년에는 크로아티아 파시스트에 다시 합병된다. 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괴뢰정부는 수십 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을 40년대 스타일의 '인종청소'로 학살한다.

영국과 러시아군대의 도움으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지휘를 받는 유고슬라비아 국민군대는 1944년 둑일군을 몰아낸다. 1948년 소련의 지도자 요세프 스탈린는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의 연합을 제안하지만 티토는 거절한다. 티토 정부는 공산주의정권이지만 소련위성국가는 아니었으며, 그 후 약 40년 동안 티토와 그의 후계자들은 인종문제를 진압하고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등으로 이뤄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연방을 유지한다.

1990년 11월 공화국의 첫번째 자유선거에서 공산정권은 각기 자신들의 사회를 대변하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당과 압도적으로 다민족국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원하는 회교당에 패배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대항하여 크로아티아당과 회교당은 연합하고, 1991년 10월 15일 중요한 안건에 세 민족 각자가 거부를 행사할 수 있던 관례를 깨고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세르비아 국회의원들은 의회서 탈퇴하여 그들 스스로 의회를 구성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국제적으로 승인되고 유엔에 급히 가입하자 각 당간의 대화는 파기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회교 대통령이 세르비아인들의 권리를 보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오그라드 지도자들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을 ‘인종학살’로부터 보호하도록 세르비아 극우주의자들을 선동하였다. 내전은 1992년 4월 사라예보의 Holiday Inn호텔에서 세르비아 저격수가 평화를 부르짖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발포를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세르비아는 약 5만 명의 전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의 도움을 받아 영토를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사라예보는 4월 5일 포위당하고 세르비아 포병대에 의해 포격이 시작되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 서부의 다른 세르비아인 거주지와 자신들과의 300km 통로를 만들기 위해 북부와 동부의 보스니아 회교도들을 ‘인종청소’의 일환으로 잔인하게 추방하였다. 마을은 테러와 약탈을 당하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불태워졌다. 떠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학살당하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양측 모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1992년 6월 모스타르(Mostar)에서 헤르첵-보스나 (Herceg-Bosna) 크로아티아 공통체가 형성되었고, 그 해 11월 유고슬라비아 대통령과 크로아티아 대통령 사이의 보스니아영토 분할에 관한 협상이 결렬되자 크로아티아인과 회교도간에 격렬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모스타르의 회교거주지의 작은 봉쇄는 사라예보 봉쇄 만큼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1992년 8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인도주의적인 구조활동을 펴는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승인하였고, 11월 6000명의 유엔병력이 구호품의 운송을 보호하기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파병 되었다.

그들의 무능함은 1993년 1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부수상이 한 세르비아 검문소에서 유엔장갑차로부터 끌어내어져서 프랑스 평화유지군들 앞에서 처형될 때 극적으로 드러났다. 1993년 중반 세르비아의 ‘인종청소’가 거의 끝나 갈 때 유엔은 회교도를 위한 ‘안전지대’를 건설하는 것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중 하나가 스레브레니차 (Srebrenica)로 1995년 약 600명의 남자들이 ‘안전’지역에서 끌려 나와 유엔군의 시야에서 그다지 멀지않는 공동묘지에 버려졌던 악명 높은 장소이다. 한 세르비아인이 발사한 박격포가 사라예보의 붐비는 시장에 떨어져서 68명의 시민이 죽고 200명이 부상당하자 비로소 유엔은 뻣뻣한 태도를 그만두고 세르비아에 대하여 위협을 시작한다.

1995년 8월,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세르비아인들은 방어적인 입장에 있고, 회교도와 크로아티아인들이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해 계속 싸우는 것을 원하는 시점이 되기 전에 평화안을 제시한다. 당사자들간의 회의는 1995년 11월 미국 오하이오 데이톤에서 열렸고, 전쟁전의 경계선을 유지하고 두 분리된 주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회교-크로아티아 연합(Federacija Bosne i Hercegovine )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공화국(Republika Srpska)으로 남는다는 합의안이 도달하였다.(12월 파리에서 비준된다) 협약에 서명하고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군은 합의된 경계선으로 철수하였고 나토 평화유지군이 그들 사이를 완충지점을 차지하였다.

약 3만 4천명의 나토군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평화유지군으로 여전히 주둔하고 있으며, 여러 나라의 민간인들이 나라를 다시 재결합하고 건설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평화가 정착하였지만, 이웃 코소보의 민족간의 싸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긴장시키고 있다. 데이톤 협약에서 비준된 지도체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민주주의 체제의 나라로 남게 하였다. 대표대통령(the Chairman of the Presidency)으로 알려져 있는 현재 국가수반은 회교도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Alija Izetbegovic )로 부통령인 크로아티아인 안테 옐라비치(Ante Jelavic)와 세르비아인 지브코 라디시치(Zivko Radisic)와 함께 통치하고 있다.

정부 수반들로는 각료회의(the Council of Ministers) 공동의장인 보로 보시치(Boro Bosic)와 하리스 실라이지치(Haris Silajdzic)가 있으며, 이들이 함께 각료들을 임명한다. 3명의 대통령 연합제에 더하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솔리치(Vladimir Soljic )가 있고 스르프스카 공화국(the Republika Srpska )의 대통령, 니콜라 포플라센(Nikola Poplasen )이 있는데, 그는 강경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어서 평화협상의 중계자들을 걱정시켰다.

얼마나 정치적 상황이 복잡한가를 설명하는 한 예로, 1997년 지방자치선거에 80개의 정당이 등록하였다. 보스니아 세르비안인들은 분리요구를 철회하였지만 회교와 세르비아 지도자들간의 언쟁은 평화정착을 힘들게 한다. 유엔은 헤이그에 전범으로 25명의 용의자를 수용하고 있으며 1999년 나토군은 세르비아가 운영하던 케라테름 (Keraterm) 포로수용소에서 회교도와 크로아티아인들을 처형한 혐의로 드라간 쿠룬지야(Dragan Kulundzija)를 체포하였다.

전쟁은 여전히 국민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고 국제 평화유지군도 당분간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source : t2P8R4fCY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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