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Kuwait - 지리, 기후, 역사
쿠웨이트 (Kuwait)
이라크인들이 1991년 초 물러나자 쿠웨이트시티의 폐허에서 재건작업이 시작되었고 정부는 재빨리 전쟁 이전의 모습을 세심하게 재현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 쿠웨이트의 최고급 호텔 입구에 있던 분홍 대리석 계단까지 그대로 다시 만들 정도이다. 전쟁이 기억이 잊혀져 가면서 쿠웨이트는 다시 한번 전형적인 석유 수출국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이슬람 세계로 편안하게 여행할 방법을 찾는 여행자들은 모스크와 시장, 다른 예전 베두인 시절의 모래 발자취를 보길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통계 자료
국명 : 쿠웨이트 (The State of Kuwait)
면적 : 17,800 sq km
인구 : 200만 명
수도 : 쿠웨이트시티(Kuwait City, 인구 238,000)
인종 : 쿠웨이트인(45%), 다른 아랍인(35%), 아시아인(9%)
언어 : 아랍어, 영어
종교 : 이슬람, 기독교, 힌두교
정체 : 입헌 군주제
지리 및 기후
작은 쿠웨이트는 페르시아만의 북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과 서쪽으로는 이라크, 남쪽으로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크기는 슬로베니아나 미국의 뉴저지 주 정도이다. 쿠웨이트의 국토는 대체로 편평하며 지표 수량이 거의 없이 건조하다. 사막은 일반적으로 자갈이 많으며 유일하게 자라는 식물은 관목뿐이다. 유일하게 중요한 지리학적 특징은 악명 높은 알무틀라(Al-Mutla) 능선으로 연합군 폭격기가 페르시아만 전쟁이 끝날 무렵 퇴각하는 이라크 군 행렬을 학살한 곳이다.
여름에(4월에서 9월) 쿠웨이트는 지독하게 더우며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웃나라들처럼 습기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겨울에는 가끔 상쾌하고 이 지역에서 가장 선선한 기후를 맛 볼 수 있으며 낮 동안 기온은 18도 정도에서 멈추고 밤은 상당히 추워진다. 모래폭풍은 연중 내내 일어나지만 특히 봄에 일반적이다.
역사
쿠웨이트시티가 현재 자리잡고 있는 곶은 겨우 3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18세기 초에 쿠웨이트는 성채에 딸린 창고 주위에 텐트들이 몰려 있는 것에 불과했다. 성채 주위에 살고 있던 여러 가문들은 그들 내부에서 서로 나뉘어졌고 새로운 개척지에 의무들이 부과되었다. 알사바(Al-Sabah)가문은 현재 쿠웨이트의 지배 가문으로 현지의 법이나 질서를 담당하도록 임명되었다. 작은 정착 지역은 이후 급속하게 커져갔다.
1760년에 마을의 최초 성벽이 세워졌고 쿠웨이트 도우 선박들 수는 800척에 이르렀으며 낙타 대상들이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 사이를 정기적으로 오가게 되었다.19세기 초에 이르러 쿠웨이트는 번창하는 교역 항구였다. 그러나 항상 문젯거리는 임박해 있었다. 쿠웨이트가 오토만 제국의 일부였는지 아닌지는 종종 불명확하지만 공식적인 쿠웨이트 역사에서는 항상 오토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했다는 단호한 입장을 나타낸다.
19세기 말에 쿠웨이트는 오토만 제국과 대체로 잘 지냈다. 그들은 터키인들이 동부 아라비아(알하사로 알려졌다)의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와중에서 제국에 흡수되는 것을 교묘하게 피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알하사(Al-Hasa)의 지방 총독의 역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결정은 현대 쿠웨이트 역사에서 중추적인 영향을 미쳤다. 보통 무바라크 대왕으로 알려진 무바라크 아랏바 알사바(Mubarak al-Sabah al-Sabah) 수장은 1896년에서 1915년까지 재위하였다. 무바라크는 터키를 몹시 불신하였고 콘스탄티노플이 쿠웨이트를 병합하려고 계획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다른 형제와 함께 수장이던 그의 형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1899년 그는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 해군의 보호를 대가로 영국의 동의 없이 영토를 조차하거나 외국 세력과 지원과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영국이 조약을 체결한 데는 당시 터키의 주요 동맹국이며 재정정 지원자이던 독일을 페르시아 만에서 몰아내려는 의도였다. 오토만 제국은 쿠웨이트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지만 강제로 일을 벌일 만한 입장이 못되었다.
쿠웨이트는 1920년대 초반을 현대 사우디아라비아의 창시자인 압둘 아지즈 빈 압둘 라만 알 사우드(Abdul Aziz bin Abdul Rahman Al-Saud)의 군대와 싸우는데 다 썼다. 1923년 전투는 영국이 중재한 조약으로 끝났다. 결과적으로 석유 채굴권은 1934년 미국과 영국의 합작 기업인 쿠웨이트 석유 회사(KOC)에 넘어갔다. 최초의 유정은 1936년에 파여졌고 1938년에는 쿠웨이트가 석유 위에 뜬 국가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KOC는 활동을 정지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석유 수출이 재개되면서 쿠웨이트 경제도 활기를 되찾았다. 쿠웨이트가 석유로 부유해지기 시작하면서 보건, 교육, 일반적인 생활의 질도 급속히 향상되었다. 1961년 6월 19일 쿠웨이트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최초의 국회 선거는 다음해에 열렸다. 비록 쿠웨이트의 상인 가문이 상당한 의석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진보주의자들도 정부에서 최초로 발판을 마련했다. 1976년 8월 의회가 일상적인 통치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며 내각이 사임하였다.
왕은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한 뒤 왕세자(전통적으로 수상에 임명된다)로 하여금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게 하였다. 새로운 선거는 1981년이 돼서야 열렸지만 의회의 새로운 다수파 역시 충돌을 빚어 1986년 다시 해산되었다.정치, 경제적 긴장에도 불구하고 1990년 중반까지 특히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면서 쿠웨이트(그리고 걸프지역의)의 경제는 낙관적으로 보였다.
그런 와중에 1990년 7월 16일 이라크가 아랍 연맹의 의장에게 편지를 보내어 쿠웨이트가 OPEC 할당량을 초과하고 있으며 국경을 넘어 이라크 유정의 원유를 훔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큰 충격을 몰고 왔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군사 행동으로 위협했다. 이후 2주 동안은 뒤에서 여러 사절이 이라크를 바쁘게 오가며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라크 탱크는 8월 2일 새벽 쿠웨이트시티를 점령하였고 정오에는 사우디 국경까지 진격하였다. 왕과 그의 내각은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했다.UN은 재빨리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군하도록 요청하는 일련의 결정을 통과시켰다. 이라크는 침략이 쿠웨이트 왕을 전복시킨 반군 단체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며 응수했다. 8월 8일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합병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이라크에 대한 UN의 무역 제재를 발효시켰으며 같은 달 사우디아라비아에 500,000만 명이 넘는 외국 군대를 파견했다. 11월 말 미국과 영국은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라크가 자진해서 철군하지 않을 경우 쿠웨이트로부터 이라크를 몰아낼 군대를 파견하는 UN 결의안을 제출했다. 마지막 날이 지나도록 이라크 군은 움직이지 않았으며 몇 시간 뒤 대부분이 미국군인 연합군 폭격기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5주에 걸친 폭격 작전을 시작했다. 지상군 공격이 감행되면서 사태는 점점 끝나갔다.
이라크 군은 겨우 100여 시간만에 붕괴되었다. 2월 말 연합군이 쿠웨이트시티에 도착했을 때는 퇴각하던 이라크 군이 불을 질러 놓아 수백 개 유정들로부터 새어나오는 시커먼 연기들만이 가득했다. 정부는 단순히 쿠웨이트를 재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쟁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착수했다. 그러는 동안 쿠웨이트 정치의 미래에 대한 열띤 논쟁이 시작되었다. 점령기간 중 왕에게서 야당이 받아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국회 선거가 1992년 10월 열렸다.
야당은 새로운 50석의 의석 중 30석이 넘게 차지하면서 정부를 놀라게 하였다. 비록 알사바 가문이 중심적인 국방, 외무, 내무 장관 자리를 여전히 차지하였지만 야당 의원들은 내각의 16석 자리 중 6석을 확보하였다.침략으로부터 2년 뒤까지 이라크와의 긴장이 여전히 높은 가운데에서도 쿠웨이트 정부는 대체로 전쟁과 점령의 상처를 지우는데 성공했다. 1994년 쿠웨이트는 몇 명의 이라크인들을 전 미국 대통령인 조지 부시가 전 해에 방문하였을 때 암살을 시도한혐의로 기소하였다.
쿠웨이트 주장에 따르면 이 시도는 마지막 순간에 발견되어 무산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몇 번씩 이라크 해방군의 움직임에 따라 쿠웨이트나 미국, 아니면 양국의 군대가 동원되기도 했다.
source : OP2G6pPZXls